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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 대회

by 형과니 2023. 6. 15.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 대회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10-14 14:11:30

 

'뛰자 또 뛰자! 수도 서울이 보인다'

11.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 대회

 

1950915, 인천에 상륙한 우리 해병대와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것이 928, 바로 60년 전 어제이니 근 두 주일이 걸린 셈이다. 그만큼 적의 저항이 완강했고 전투가 치열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수도 서울 탈환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던, 절대 비세(非勢)6·25전쟁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켜 마침내 북진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극적으로 국운을 회생시킨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일보사에서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를 창설한 것이다. 이 마라톤 대회는 우리나라 선수와 6·25전쟁 참전 16개국의 초청 마라톤 선수들이 인천-서울 간을 달리는 기념대회로, 첫 대회가 서울 수복 9주년이 되던 1959928일에 개최되었다.

 

공교로운 것은 우리 군대와 연합군 양측 상륙군 1진이 뭍에 올라 첫발을 디딘 중구 해안동 일대에서부터, 한미 해병대가 서울 수복과 동시에 맨 먼저 태극기와 유엔기를 게양했던 중앙청 앞까지의 거리가 마라톤 국제 기준 거리인 42.195였다는 점이다.

 

한국일보사는 이 국제 마라톤 대회 이전인 1955년에도 이미 9·28수복기념 부산-서울 간 대역전경주대회를 개최한 바 있었지만, 전쟁의 상흔도 다 가시지 않은 불모의 잿더미 위에서 한국체육사상 초유의 성사라고 이름 붙인 국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한국일보사는 이런 행사나 사업을 아주 적극적으로 펼치던 신문사였다.

 

 

한국 마라톤 사상 초유의 성사인 대망의 제1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는 한국일보사코리아, 타임스사 및 대한육상연맹의 공동 주최로 928일 인천을 출발하여 서울 중앙청 앞까지 당시의 서울 수복 전적, 전장 42.195(국제기준 거리)의 풀코스를 달리는 경기로 개최됩니다.

 

여기 참가하는 선수는 참전 16개국 중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하고 세계적 마라톤 선수를 총망라한 자유진영 6개국에서 오는 외국의 유명 선수 7명과 육련(陸聯)에서 선발한 국내 선수 10, 게다가 20명 이내의 희망 선수도 포함하여 40명 가까운 정예들로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마라톤의 장관이 마라톤 한국을 장식하게 되었습니다.(영국은 매니저의 여비를 주최 측이 부담하지 않는 본 대회 규정에 불만을 표시하고 금년 대회 참가를 보류, 프랑스는 무응답.)

 

이 경기는 1950915, 더글러스 맥아더 UN군 총사령관 지휘 하에 용감무쌍한 한·미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공산군을 격파하면서 수도 서울로 진격하고 마침내 중앙청사에 태극기와 유엔기를 게양한 역사적인 9·28을 영원히 기념하고, 아울러 전 세계 자유 국민들로 하여금 이날을 상기케 하는 동시에 전통 있는 마라톤의 나라 한국에서 참전 16개 우방 국가의 청년들이 다시 모여서 이 평화적인 방법에 의하여, 잊을 수 없는 당시의 전적을 매년 달리게 함으로써 국제 체육계에 대한 공헌은 물론 한국 반공전선에 대한 인식을 더욱 강인하게 하자는 데도 큰 의의가 있습니다.<후략>”

 

무슨 인연이었는지 당시 우리 집에서는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어서 마라톤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특히 매일 1뉴스의 눈에 선수들의 동정이나 프로필이 차례로 실리고 있어서 몹시 호기심이 갔었는데, 선친께서 신문을 손에서 놓으시기만 하면 이내 내 방으로 가져가 가위로 각 선수들의 프로필과 마라톤에 관련한 기사들을 스크랩했던 기억이 난다.

 

이 스크랩은 대학생 시절까지도 애지중지 소장하고 있었는데 군대 입대 후 어디론가 유실되고 말았다. 스크랩 중에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선수가 우리 대표로 인기가 아주 높았던 이창훈 선수이고, 그와 함께 유독 뉴질랜드에서 온 레이몬드 퍼케트 선수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다.

 

또 한 가지는 한국일보사에서 거금 ‘5만 환의 상금을 걸고 국문과 영문 표어를 현상 모집했는데 국문 표어에 응모를 했던 기억이 난다. 무슨 내용을 적어 보냈었는지 낙선을 하고 말았는데, 후일 당선작을 보니 나 같은 아이의 머리로는 전혀 생각조차 못할 우수한 것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한국일보 50년사를 뒤지다가, 표어 현상모집 국문 당선작이 뛰자 또 뛰자 수도 서울이 보인다라는 작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마라톤 대회가 오래도록 열리지는 못했지만, 인천을 출발해서 서울로 달리는 경기여서 당시 우리 인천 시민들은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3회 대회 때 연도에서 박수를 치던 생각도 떠오른다.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이던 1959928일 제1회 대회 날은 월요일이었고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경인가도를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다음날 신문을 보고 이창훈 선수가 우승한 것을 알았다. 뉴질랜드의 레이몬드 퍼케트 선수는 3, 동메달을 차지했다.

 

인천 개항100주년 기념 사진집에 들어 있는 이 사진은 스타트 라인에 서서 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참가 선수들의 모습인데 1959928일 해안동 로터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사진 좌측 뒤에 월미도 산 정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해안동은 맞는데, 한국일보의 기록은 다르다.

 

“928일 정오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동상이 서 있는 인천 자유공원을 출발했다. 첫 대회에서 이창훈(李昌薰)2시간 2478로 우승했고 케이스 제임스(남아연방)2시간 27526으로 2, 레이몬드 퍼케트(뉴질랜드)2시간 29436으로 3위를 차지했다.”

 

1959년에 열린 인천-서울간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의 첫 출발 지점인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 광장의 모습.황경진기자 ssky0312@i-today.co.kr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첫 마라톤 대회의 출발 지점은 자유공원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2회 대회가 열릴 때쯤, 자유공원이 마라톤 출발 장소로 협소하고 불편해서 해안동으로 옮긴다는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사진의 장면은 제1회 대회가 아닐 것이다. 더구나 1회 대회 때의 참가자 수가 33명이었는데 사진 속 선수들의 숫자와 뚜렷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사진은 2회 대회가 아닌가 싶다.

 

1969년 제 4회 대회로 영영 중단이 되고 만 이 마라톤 대회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 대회는 1960년 로마올림픽, 1964년 동경올림픽 마라톤에서 연승, 올림픽 2연패를 기록한 이디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 선수가 참가한 1966년의 3회 대회일 것이다.

 

대학생이어서 강의를 결강하고 숭의동 로터리쯤에서 깡마르고 검은 피부, 그리고 맨발의 아베베 선수가 서울 쪽으로 힘차게 달리는 모습을 박수를 치며 보았다.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가 부평 원통이고개 고바위 길을 달려 올라가는 아베베의 모습을 숨 가쁘게 중계하던 목소리도 쟁쟁하다. 아베베는 2시간 174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고 우승했다.

 

다음날 한국일보는 올림픽 2연패라는 영웅의 칭호를 가졌으며 한국동란 참전용사이기도 한 신비의 건각 비킬라 아베베가 9·28 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의 신기록을 수립하였다고 썼다.

 

1회 대회 이후 우리는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4회 대회는 아베베 후계라고 할 수 있는 마모 웰데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 마모 웰데 선수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였다.

 

인천상륙작전 60주년에 이어 어제로써 서울 수복 60년을 맞으며, 1959년에 창설되었던 인천-서울 간 국제마라톤대회를 떠올려 본다.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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