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12-21 18:25:59
과거의 영광·한숨 깃듯 인천 스포츠 안마당
낡은 사진첩을 들추는데 문득 그라운동장--숭의공설운동장의 '옛 모습'에 눈길이 가 머문다. 내가 보아 온 것만도 어언 반세기가 넘는 세월, 이제는 '옛'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옛'은 또 변하고 사라져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거기 주인공들도 정녕 다시 만날 수 없고 다만 추억 속에만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운동장이 변한 것은 불과 10년 안팎이다. 문학운동장에 인천 스포츠의 요람이라는 간판을 내주고, 그저 텅 빈 듯이 시간 속에 웅크리고 섰던 그라운동장은 헐려져 무슨 웰빙 타운이 된다는 것이다.
'도원동 모모산 언덕에 메아리치던 응원 함성을 뒤로 한 채 70여 성상(星霜)을 지내오는 동안 인천 스포츠의 안마당이었던 그라운동장이 그 의미도, 상징도 영원히 벗어버리고 만다는 것!
참으로 속절없다.
이곳이 운동 경기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기억하게 하는 흔적이라면 현재 전체의 반쯤이나 지어졌을까 하는 축구전용경기장뿐이다.
워낙 주변 지역이 낙후되어 도시를 활성화하기 위해 주거, 상업, 업무, 체육 등 복합기능을 갖춘 첨단 웰빙 도시로 꾸민다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무어라 할 말은 없지만, ‘그 옛날의 원형’이 이토록 덧없이 사라진다는 사실만은 못내 섭섭하고 아쉬운 심정이다.
숭의동 옛 인천공설운동장을 영어의 ‘그라운드’와 우리말 ‘운동장’을 합쳐 ‘그라운동장’이라는 기상천외의 혼혈 합성어로 부르던 1950년대 ‘국민학교’ 시절이며, 그 유명했던 ‘인천 꼬마’ 김호순(金好順) 선수의 사이클 경기가 열리던 날이면 만사를 제치고 그를 보러 운동장으로 달려가던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인천고와 동산고 출신의 두 유명 투수, 청룡기 2연패의 이기상(李起祥)과 3연패의 신인식(申仁植), 당시 한국 고등학교 최고의 투수 대결도 실제로 목격했다.
1950년대말 숭의운동장 모습
단 한 차례, 어떤 연유로 열리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천하장사 김학룡(金學龍)과 재치 있는 씨름꾼 김학응(金學應), 그리고 마산 출신 모의규(牟義奎) 장사가 출전한 ‘황소 타기 전국 씨름 대회’도 볼 수 있었다. 야구장 캐처 뒤 백넷 앞에 임시 모래판 씨름장을 만들어 시합을 치렀다. 황소는 김학룡 장사가, 그리고 몸집은 작아도 묘기백출하던 김학응 선수가 준우승으로 금 열 냥인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 우리 인천 사람으로는 일제 때 경찰을 했었다는, 그래서 유도가 몇 단이라는, 키가 큰 장사가 카키색 미군 반바지를 유니폼으로 입고 나섰는데(그가 ‘전도관 밑에 산다’는 소리를 그때 어떤 관중이 이야기했었다.) 그만 작은 키의 재치꾼 김학응이 밑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벌렁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1958년 여름방학에는 고국을 방문한 재일 동포 장훈(張勳) 선수의 모습을 이 그라운동장에서 처음 보았다. 재일교포학생야구단과 우리 인천 선발군과의 시합에서 그가 히트를 쳤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또 야구장 한복판에 가설한 특설 링 위에서는 김영배(金英培) 선생의 번개같이 잽싼 펀치를 본 것 같기도 하다. 1957년이었던가, 그 이듬해였던가. 한일 고교 배구 대회가 열린 곳도 이 그라운동장 야구장이었다. 씨름과 마찬가지로 홈플레이트 뒤 백넷까지의 공간에 급조된 맨땅 코트에서였다. 우리 인천 선발군이 전국최초로 일본 선발로부터 두 번째 세트였던가, 한 세트를 빼앗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당시 흥분한 장내 아나운서의 “인천 시민 여러분, 얼마나 기쁘십니까?” 하던 멘트가 지금도 귓속에 또렷하다. 물론 우리 팀의 선전은 그것이 끝으로 결국 3 : 1로 패배하고 말았다.
볼거리가 없고 유흥이 없었던 그 무렵에는 ‘황소가 이기느냐, 공수도가 이기느냐’ ‘멧돼지와 여인의 목숨 건 혈투’ 운운하는 황당한 흥행도 이 운동장에서 열릴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인지(人智)가 썩 깨지를 못해서였는지,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그런 경기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엉터리 주최 측도 역시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어떤 실세의 공공연한 비호를 받았을 것이다.
공수도로 사나운 황소와 겨뤄 뿔을 뽑겠다는 선전과 달리, 황소는 그만 송아지보다 조금 컸을 뿐이고, 목숨 건 멧돼지와의 대결은, 수십 차례 여자의 수도(手刀)가 발 묶인 중돼지의 배에 내리꽂혔지만 창자를 꺼내기는커녕 놀란 돼지새끼만 그라운동장 한가운데서 그야말로 멱따는 소리를 질러대던 엉터리였다.
한때 인천에서 주간지를 발간하던 주간인천사가 1955년부터 주최해 오던 서울, 부산, 대구, 인천 ‘4도시고교대항 야구대회’도 공설운동장에서 대단한 흥행카드였다. 당시만 해도 인천 야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전국을 휩쓸던 시절이어서 아마 다른 대도시에서도 한 수 배운다는 자세로 인천을 찾았을 것이다.
1958년 10월 17일에 열린 제4회 대회에서는 인천고가 경기공고, 부산상고, 경북고를 물리치고 종합 전적 2승 1무승부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투수가 우리 동네에 살던 남창희(南昌熙) 선수였다. 그리고 또 한 명 이선덕(李善德) 투수가 있었다. 물론 그에 앞서 195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도 맹활약을 했던 백인천(白仁天)의 경동고가 서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라운동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운동장 최씨’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키에 늘 운동장에서 살아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 운동모자 밑으로 유난히 길고 크게 느껴졌던 코, 그는 참으로 성실하고 묵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라운동장의 생생한 역사였다. 야구장 1루 쪽 스탠드 뒤, 제법 정원이 꾸며진 관사에 살던 그는 혼자서 손수레로 경기 용구들을 나르거나 함석 롤러로 흰 석회라인을 긋곤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모든 경기의 ‘경기장 설치 규칙’이 그림책처럼 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허들을 놓는 간격도 투척경기장의 라인도 그는 아무런 책자를 보지 않은 채 척척 그리거나 설치하곤 했던 것이다.
경기가 열리는 본부석에서는 자주 “운동장 최 씨, 운동장 최 씨, 본부석까지 와 주세요.”라는 호출 방송을 하곤 했다. 무언가 그에게 묻거나 의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항이 있었을 것이다. 운동장에 관련된 모든 일이 다 이 운동장 최 씨의 몫이었다. 이 같은 방송이 하도 잦아 구경나온 시민의 귀에 못이 박혀 공설운동장 하면 으레 운동장 최 씨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아들이 그 일을 대물림 했었는데 문학경기장이 생기며 손을 놓았다.
1953년부터 1955년에 이르는 사이에 미군의 도움으로 개축 공사가 있었지만 야구장의 외야쪽 관중석은 그냥 맨흙 언덕이었다. 경기에 몰두하다 보면 밑으로 줄줄 미끄러지기가 일쑤였다. 야구장에는 계단식으로 높게 설치한 본부석 스탠드와 양쪽 덕 아웃만 덩그러니 있었다. 육상장도 엉성한 대로 트랙 모양만을 갖추고 있었다. 이 운동장 재건은 인천 체육의 한 거목 고 정용복(丁龍福) 선생의 공이 지대했다.
정 선생은 충남 서산 출신으로 경동 싸리재에서 미곡상을 하여 부자가 된 부친의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평생을 청빈한 생활로 일관한 분으로 체육계에 투신하여 많은 활동을 한 대표적인 인천 사람이다.
그라운동장의 외곽 담장은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철판에 시커멓게 ‘타마구(콜타르)’를 발라 두른 것이었다.
구도심 재생사업으로 건축 공사가 한창인 숭의운동장. 2013년에 완공되면 숭의축구전용경기장으로 재탄생한다.
아무리 경비를 철저히 해도 가난한 관중들은 이 철판을 뜯어 놓거나 밑으로 개구멍을 뚫었다. 담을 타고 넘는 사람들 또한 부지기수였다. 사나운 경비원들이 개구멍으로 머리를 디미는 사람들을 향해 몽둥이나 돌 세례 아니면 인분을 퍼다 부었다. 멱살잡이를 당하면서 쫓겨나던 풍경도 흔했다. 그러나 좀 점잖은(?) 사람들은 소방서 옆 ‘모모산’ 기슭에 앉아 까마득히 먼 운동장 안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웰빙타운이 된다는 숭의공설운동장. 야구장 서쪽으로는 벌거숭이 모모산이, 육상경기장 남쪽으로는 도화동 저쪽에서부터 경인철도 옆을 지나 흘러오는 긴 개천, ‘장사래 하천’이 논밭과 함께 펼쳐져 있던 1950년대 풍경이 공사가 한창인 옛 터전에 겹쳐진다. 세월은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전에 어느 지면에 썼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다시 보충하고 정리한 것인데 옛 사진을 보며 세월의 변화를 새삼 실감하는 것이다.
이 사진은 1950년대 말경의 사진인데 사진 윗부분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봉산이고 그 앞이 숭의동 마을이다. 사진 중앙의 타원형의 운동장이 육상장이고 전면의 정사각형 코트는 한때 수영장이기도 했던 연식정구 코트이다. 이 정구장의 검은 담장이 일명 ‘그 타마구 담장’이다. 육상장도 야구장도 이때는 이미 맨땅이 아닌 스탠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진 왼쪽에 중앙부분에 검은색의 구부러진 짧은 담장이 보이는데 이것이 육상장과 야구장을 분할하는 경계 담장이었다. 그리고 그 담장과 정구장 둑과 사이에 하얗게 작은 문이 보이는데 도원동 쪽의 야구장 정문과 이 쪽문에서 야구장을 입장하는 사람들의 입장권을 검사하곤 했다. 선친께서도 한때 경기도야구협회에 관여하셔서 바로 정용복 선생과 이 문 앞에서 표를 받으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밖에 일본 프로 야구 한규(阪急) 브레이브스 선수였던 유완식(劉完植) 선생, 김선웅(金善雄) 전 인천고 감독, 박현덕 (朴賢德) 전 동산고 감독, 이덕영(李德永) 선생 같은 분들의 모습도 다 이 그라운동장에서 볼 수 있었다.
세 번의 전국 체전을 치르면서 크게 발전을 했던 유서 깊은 승의그라운동장이 이제 과거의 영광과 한숨을 한갓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글=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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