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장과 송현시장 주변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1-02-21 21:47:17
그들이 사고파는 것은 ‘추억’이다
양키시장 가게 진열대에 놓여있는 허쉬 초콜릿과 코티 분에 쌓이는 것은 먼지뿐이 아니다. 여러 가지 ‘과거’가 그 위에 쌓인다. 그들이 파는 것은 이제 양키물건이 아니라 ‘추억’이다. 시간에 떼밀려 가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뒷모습은 슬프고 서럽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정정호 자유사진가
송현동 100번지로 스며든 양키물건
송현동 개천가에 허름한 노점들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밤늦도록 노점들이 불을 밝히면서 일대는 자연스레 야(夜)시장이 되었다. 1936년에 노천시장에 양철지붕을 얹어 ‘일용품시장’으로 변모하였다. 이것이 중앙시장의 시작이다. 동인천역을 끼고 있는 덕분에 늘 사람들로 번잡한 인천의 대표시장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은 크게 혼수상가, 그릇상가 그리고 ‘양키시장’으로 섹터가 나뉘며 몸집이 커졌다. 그 중 가장 중앙시장의 색깔을 진하게 보여준 게 양키시장이다. 양키시장의 정식 이름은 ‘송현자유시장’이다.
송현동 100번지 양키시장. 물들인 군복, 청바지, 보세옷…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은 날 이곳과 얽힌 추억을 한두 개 쯤 갖고 있는 ‘무대’다. 1965년 12월 정식으로 시장 등록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6·25 동란 직후부터였다. 인천에는 미군부대가 곳곳에 있었다. 뒷문으로 흘러나온 양키물건들을 이곳에서 거래했다. 양주와 양담배, 향수, 로션, 초콜릿, 스낵, 통조림 등. ‘양키’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보다는 동경심으로 인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던 물건들이 좁은 선반에 빽빽하게 진열돼 있었다. 다른 편 가게에서는 간이침대, 야전삽, 수통, 군용식량 등 각종 미군용품도 거래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돈 달러와 이른바 ‘빨간책’이라고 불리던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등 같은 도색잡지도 구할 수 있었다.
허쉬 초콜릿과 코티 분
인천에 양키들은 이제 없다. 양키는 갔지만 아직 양키시장은 남아있다.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듯 어스름 조명 아래 늙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양키시장은 일반시장과는 모습부터가 다르다. 3층 높이의 건물들이 시장을 사방으로 막고 있다. 시장이라기보다는 골목이다. 1백여 개가 넘는 작은 가게들이 하루종일 한조각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골목에 줄지어있다. 30촉 짜리 백열등 아래서 ‘은밀히’ 거래하기 딱 좋은 분위기다. ‘쩨’를 쫓아 드나들던 사람들 발걸음으로 항상 활기를 띠던 시장도 이제는 바람만이 골목을 쓸쓸히 배회한다.
“다 죽었어. 가게 지키던 사람은 늙어죽고 가게는 장사 안돼 죽었지. 마트에 가면 이제 미제물건 다 살 수 있잖아. 오랜 단골이나 그냥 옛 생각나서 가끔 들르는 사람들 밖에 없어.” 아들의 어린시절 별명을 상호로 쓰는 똘똘사 허순영 사장(73)의 설명이다. 양키시장 가게 주인 중에는 92세 된 ‘현역’ 김고분 할머니도 있다. 김 할머니는 한 평이 채 안되는 가게에 매일 나와 미제 물건에 쌓이는 먼지를 털어낸다.
양키시장의 물건은 이제 더 이상 미군양키들에게 나오지 않는다. 남대문시장 중간도매상들이 정식으로 수입된 물건들을 이곳에 공급한다. 가게 진열대에 놓여있는 허쉬 초콜릿과 코티 분을 보자 불현듯 여러 가지 ‘과거’가 그 위에 겹쳐진다. 그들이 파는 것은 이제 양키물건이 아니라 ‘추억’이다. 시간에 떼밀려 가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뒷모습은 서럽다.
잔상마저 사라진 오성극장
수선, 마크, 명찰, 오바로크… 빛바랜 간판들이 어지럽게 걸려있는 양키시장 골목이 끝나는 곳에 극장이 하나 있다. ‘애관2관’이라는 희미한 글자가 붙어있는 오성극장이다. 마치 시장을 올라탄 모습을 하고 있는 오성극장은 씨네팝, 애관2관으로 이름을 바꾸며 운영하다가 2003년 4월 11일에 스크린을 내렸다. 문은 쇠줄로 굳게 감겨져 있다. 옛 영화의 잔상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바로 앞에서 50년 동안 구제품 옷을 팔아 온 흥신사 주인에게 극장에 들어가 볼 수 있냐고 물었다. “거긴 뭐 할려고 올라가요. 아마 귀신 나올텐데…”하며 혹시 애관극장에 문의하면 될지도 모른다며 말끝을 흐린다.
애관극장에 연락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열 수가 없다는 황당한 이유를 들어야 만 했다. 극장 바로 앞에는 재난위험시설(D)급 지정 안내표지판이 붙어있다. 이제 우리의 기억뿐만 아니라 눈에서도 영원히 사라질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극장 옆에는 순대골목이 있다. 얼마 전까지 순대국밥집은 골목을 양쪽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20여 곳의 순대집이 그야말로 순대처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지금은 동인천재생사업으로 한쪽이 철거된 상태다.
이 순대골목의 뿌리는 30여 년 전의 수문통 시장이다. 당시 화수부두, 만석부두와 가까운 수문통 주변에는 항만이나 공장 노무자들이 즐겨 먹던 순대국밥집이 시장통 안에 많이 있었다. 수문통 시장이 헐리면서 국밥집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고 기존에 있던 몇몇 국밥집들과 합쳐지면서 순대골목이 된 것이다.
수문통과 세느강
송현시장은 중앙시장과 길 하나를 놓고 마주하고 있다. 1960년대 초에 문을 연 송현시장에는 영화 파이란에서 ‘루저’ 최민식과 공형진이 소줏잔을 기울이던 ‘영종집’ 등 정감가는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장이 얼마 전 문화관광부와 지식경제부, 중소기업청 등으로부터 ‘문화관광형’ 시장이란 타이틀을 받았다. 시장 안에는 옛 향수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빨래터와 펌프장 등을 복원해 놓고 길거리갤러리도 만들었다. 송현시장이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지정된 것은 인근에 골목이 그대로 살아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최대 달동네였던 곳을 추억할 수 있는 수도국산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송현시장 부근에는 수문통이 있다. 이제 수문통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스팔트 밑에 여전히 남아 있다. 화평치안센터와 송현치안센터 사이 약 200m 거리에 수문통이란 수로가 있었다. 이 수로는 바다와 배다리까지 이어지는 갯골이었다. 지대가 낮은 이 수문통으로 온갖 생활하수가 다 떠내려 왔다. 여름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똥바다’였다.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밀물은 수문통을 정화시켰다. 썰물로 나갈 때 온갖 쓰레기는 수로를 따라 바다로 떠내려갔다. 물때 따라 작은 돛단배가 수문통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뭣 모르고 고깃배를 쫓아 온 갈매기가 길을 잃기도 했다.
“여름철 장마 때는 전동, 인현동 등 윗동네에서 놀다가 하수구로 들어간 공들이 다 떠내려와 이곳 아이들은 돈 주고 공을 산적이 없었어요.” 수문통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방송인 한영우씨의 추억담이다. 백중사리 때는 어김없이 물난리가 나기도 했다. 바닷물이 아궁이까지 차기 일쑤였다. 인근 송현초등학교 교실 마루바닥에 물고기가 버둥거리기도 했다. 배짱 좋은 아이들은 수문통 갯골에서 멱을 감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은 수문통을 ‘세느강’이라고 부르며 늘 함께 했다. 화평동 쪽 수문통 끝자락에는 한동안 ‘수상가옥’이 있었다. 갯골을 일부 복개한 곳 위에 많은 판잣집들이 지어졌다. 안방 밑으로 바닷물이 찰랑거렸다. 우리나라 유일의 수상가옥인 셈이었다. 1996년 수문통의 나머지 부분을 복개하고 수상가옥은 철거했다. 그렇게 ‘세느강’의 낭만과 추억이 땅 밑으로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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