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맛 좀 보여주세요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11-03-31 02:21:06
짬뽕을 주문한다. 식탁 앞에 바투 앉으면 여지없이 찬거리와 젓가락이 수십 년 동안의 내공이 쌓인 모습으로 가지런히 식탁 위를 장식하고야 만다. 일본식 반찬인 단무지와 중국식 반찬 양파와 춘장이 놓이고 아, 드디어 한국식 짬뽕이 나올 차례. 굳이 한국식 짬뽕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외국의 수없이 많은 짬뽕의 아류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즐겨 먹는 짬뽕은 색깔과 맛부터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식 짬뽕인 것이다. 아니, 인천식 짬뽕이다. 그러니까 인천식 짬뽕은 동북아 삼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 인천이라는 도가니에서 한껏 달궈져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1973년은 박정희 정권이 전 국민에게 대대적으로 혼·분식을 장려하고 학교에 싸 가는 도시락에 잡곡을 넣지 않으면 마치 큰 일 나는 것처럼 회초리를 들어댔던 시기였다. 그 발화의 불똥이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집으로 들이 닥쳤고 급기야 흰쌀밥(백반·白飯)을 취급하지 못하게 했을 때 홀연히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서 시뻘건 국물로 치장된, 차마 가당찮고 불순하게 들리거나 보였을지도 모를 짬뽕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하기야 그것이 일본식 발음 '찬퐁'에서 출발한다는 것조차 몰랐을 거고 게다가 중국집에서 파는 음식이니 당연히 중국음식이려니 했기에 당시의 반일 감정의 틈새를 묵묵히 메우고 있기도 하였을 것이다.
여하간 쌀 막걸리가 본격적으로 판매됐던 1978년 무렵 이전까지 중국집에서 짬뽕을 구경하기란 요즘 인천 하늘에서 별보기 쯤 이었을 것이다. 대게는 우동과 짜장면을 우스개로 불러대 '우짜우짜'를 주문송으로 불렀을 때가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이 시기 쯤으로 추정돼는 인천식 짬뽕의 탄생과 맞물려 이른바 '우리 문화찾기'는 1980년대 '국풍'이라는 기묘한 정치적 바람을 등에 업고 다니기도 하였다.
필자가 짬뽕에 요즘 시쳇말로 필(Feel)이 꽂히게 된 이유는 여러모로 보나 다진 양념처럼 꼼꼼히 분석해 보건데 인천은 필연적으로 짬뽕 같다는 생각이 늘 결론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짬뽕의 원류라 일컫는 중국 남부의 초마면(炒碼麵·일본식 짬뽕으로 와전된 원어)을 체류지에서 삼시 세끼 내내 먹은 것은 물론이고 베트남 쌀국수 '포(Pho)'의 원조인 하노이를 비롯해 태국의 꾸에이띠여우, 일본의 나가사키 짬뽕 등을 질리도록 섭렵하지 않았던가. 비슷한 재료와 각 지역이 안고 있는 물리적 환경과 역사의 변천에 따라 다른 얼굴로 처신하고 있지만 공통분모를 차지하고 있는 이 놀라운 동질감을 통하여 인생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를 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음은 물론이다.
여하간에 인천은 짬뽕 같은 도시이다. 짬뽕처럼 섞였고 다시 짬뽕으로 섞여서 살 수 있고 독특한 짬뽕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요즘 구도심을 둘러싼 짬뽕 같은 이야기들이 솔찮게 들려오고 있다. 월미은하레일을 비롯해 보존가치가 있는 세관 창고 건물, 제물포 고등학교 이전 문제,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짬뽕적 독창성이 없는 도시재개발계획 전반에 걸쳐 부재한 진득하고도 올곧은 철학이 그것이다.결론적으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역사의 냉엄함을 진정으로 거울삼지 않으면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물론이고 장밋빛 짬뽕을 만들다가 이도저도 못해 인천시민 모두를 굶기게 될 판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종복 터진개문화마당황금가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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