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1960년대 초반 무렵 인천 시가지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6-14 17:59:24
쭉 뻗은 선로·닥지닥지 붙은 건물 … 복잡한 도시 풍경
27. 1960년대 초반 무렵 인천 시가지
두 장의 사진이 모두 고 최성연(崔聖淵) 선생의 사진집에 수록된 것으로 1960년대 초반 무렵의 인천시가지를 공중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이 무렵의 인천 인구라야 고작 40만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시가지 풍경은 주택과 건물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어서 매우 복잡하고 큰 도시처럼 보인다.
인천 시가지라고 하지만 카메라의 렌즈가 잡은 지역은 지금의 중구, 동구, 남구에 해당하는 일부 지역이다. 그 무렵은 이 일대가 인천의 행정,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대부분의 관청은 물론 인구의 태반이 밀집해 있어 번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축항을 낀 중구와 거기에 인접해 있는 동구는 일제 때부터도 인천의 중심지였었다. 대형 사진이라면 사진 속 건물이나 집들이 어느 정도 분별하기가 용이할 터인데 그렇지가 못하다. 커다란 돋보기를 들고 이리저리 세심히 관찰해야만 그나마 큰길이나 건물을 찾아낼 수가 있다.
먼저, 왼쪽의 큰 사진은 그런 대로 몇 개의 건물과 길을 확인할 수가 있다. 우선 경인철도가 사진 하단 중앙으로부터 좌상 쪽으로 길게 빠져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도나 날짜에 대한 설명이 없는 이 사진의 시기를 짐작케 해주는 것이 바로 이 경인철도인데, 사진 속에는 철로가 아직 단선(單線)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동인천역 구내는 복선처럼 되어 있지만 배다리 철교를 지나면서는 단선임이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경인선 복선 개통은 1964년 9월로, 사진이 아직 단선 철로 모습을 보여 준다면 이 사진은 분명 그 이전에 촬영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그보다 더 이전일 수도 있으나, 돋보기를 통해 들여다보이는 중구 유동 일대의 주택들이 아주 말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는 점이 시기를 1960년대 초반으로 확정토록 한다.
적어도 1950년대 인천 시가지 풍경이라면 아직 6?25의 상흔이 이 지역 곳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불행하게도 유동, 율목동 일대가 매우 크게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 좌측 중앙 조금 위에, 흔히 배다리 철로문, 혹은 철로문다리라고 부르던 철교가 보인다. 철교 좌측으로 비스듬히 금곡동 입구, 곧 헌책방 거리 초입이 보이고 철교로부터 사진 아래 방향으로, 경인선과 나란하게 중앙시장 건물 지붕이 마치 무슨 화물열차가 지나는 것처럼 길게 열을 지어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철교 오른쪽으로는 길 한복판 공터가 광장처럼 훤하다. 철교에서 출발해 오른쪽 경동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이 건물에 가려 희미하게 보인다. 경동과 좌상 쪽 도원동으로 갈라지는 길모퉁이, 둥글게 라운드를 이룬 부분에 옛 서울신탁은행 건물이 서 있다. 그 길을 따라 싸리재로 얼마쯤 올라가다 보면 사진 우 중앙 부분에 율목동으로 올라서는, 백색의 짧은 길을 만나고 그 초입에 선 옛 항도백화점 3층 건물을 볼 수 있다.
그 항도백화점 위쪽 1시 방향으로 아직 일본인 묘지가 남아 있는 옛날 율목공원의 가지런한 풍경과 다시 그 위 2시 방향쯤에 백색의 옛 인천시립도서관 신관 건물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시립도서관은 1962년 7월 15일에 준공했으니, 결정적으로 이 사진이 촬영된 시기를 좁혀 준다. 다시 말해서 그 시기는 대략 1962년 7월 이후부터 1964년 9월 이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사진 윗부분 도원동 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는, 하얗게 보이는 넓은 길 오른쪽에 또 하나 공터처럼 보이는 지점이 지금은 무슨 정보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옛 인천고등학교 교정이다. 이 교정은 인천 야구 산실로 수많은 인천 야구의 대표적인 선수들을 배출했다. 사진 속의 구 교사(校舍)를 자세히 볼 수는 없으나 인천 최고의 역사를 가진 학교 건물의 하나로 보존해 둘 만했는데 학교가 이전해 가면서 헐어 버리고 말았다.
그 길의 반대 방향으로 동인천으로 가는 길, 곧 물산회사 길은 ‘1906년 옛 청과시장 자리에 있던 축현역을 지금의 동인천역 자리로 옮긴’ 기록으로 미루어, 일본인들이 경인선 선로를 변경하기 전 애초 철길이 놓였던 자리가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 시가지 사진을 통해 느끼는 것은 실로 무쌍한 변화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손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진 위쪽의 바다처럼 보이는 옛날 낙섬 염전지대의 변화이다. 매립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간혹 ‘토지금고’라는 지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지금의 용현 5동 지역이다.
이 사진 역시 앞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세한 변화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건물이나 도로가 눈에 띄게 크게 바뀐 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앞의 사진이 서북쪽에서 인천의 남부지역을 조망한 것이라면 이 작은 사진은 정북(正北) 방향에서 시가지 남쪽을 바라본 사진이다.
사진 중앙 좌에서 우로 경인선 철로가 횡단하고 있는데 좌측 거의 끝부분에 역시 배다리 철교가 보인다. 철교 아래쪽으로 흰 공터는 앞의 사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송림초등학교 교정이다. 철교 위쪽 우상 방향으로 경동, 좌로 도원동, 우로 동인천 방향으로 갈라지는 3거리 공지가 보인다. 그 좌측 위로 인천고등학교 교사 지붕을 볼 수 있다. 율목공원도 시립도서관 신관 건물도 앞의 사진과 비교해 거의 변화가 없다.
사진 중앙 오른쪽 끝 부분 흰 공터처럼 보이는 곳이 동인천역 광장이다. 몇 주 전 원고에도 기술한 바 있지만, 아주 희미한 채로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대 시민 홍보, 계몽용 탑이 보인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사진 상단 중앙 쪽으로 비스듬히 길게 벋어 올라간 대로가 용동마루턱이를 지나 경동사거리를 만나고 답동, 사동으로 향한다. 길 끝이 다시 사거리를 이루고 인천항 선거(船渠)에 닿아 있는데 아직 제2도크가 건설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되돌아, 용동마루턱이 오른쪽으로 어둑한 건물이 내리교회다. 그 앞의 옛 축현학교 쪽으로 가는 사이 길의 입구를 짐작할 수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경동사거리가 나온다. 오른쪽 신포동 방향으로 가늘게 S자형으로 뚫린 길의 모습은 그런대로 알아볼 수 있으나 왼쪽 싸리재 방향은 건물에 가려 윤곽조차 짐작하기가 어렵다. 워낙 사진이 원경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답동성당도 여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진을 통해 아직 가톨릭회관이 지어지지 않았던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칠 독자가 있을 것이다. 도로에 거의 자동차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동인천 광장이나 배다리대로나 할 것 없이 도로가 텅 비다시피 한가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당시 통계를 손에 넣지 못해 직접 비교를 할 수는 없으나 오늘날 90만대를 훨씬 넘는 인천의 차량 대수를 생각하면 실로 그 무쌍한 변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것은 ‘옛’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써서 설명하게 된다는 점이다. 변화와 역동이 우리 현실 삶에 활기와 안락을 주는 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저 ‘옛’이라는 말 한 마디로 허망하게 뽑혀나가는 우리 정신의 뿌리는 어찌 해야 좋은 것인가. 반세기 전의 인천 시가지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씁쓸한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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