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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26. 신외과와 양지공사

by 형과니 2023. 6. 19.

26. 신외과와 양지공사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5-29 22:21:55

 

 

등 맞대고 있던 두 건물, 지금도 남아 있다면

26. 신외과와 양지공사

 

중구 중앙동을 지나치다 보면 생각나는 집이 둘 있다. 왼쪽 사진에 보이는 신외과(愼外科) 건물과 오른쪽 사진 속의 인천양지공사(仁川洋紙公司)이다. 생각 없이 이 집들을 지나쳐 다니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지금은 두 집이 다 사라져 없고, 주인들까지도 모두 타계하셨다.

 

신외과의 위치는 신포동 신한은행과 옛 중앙동 파출소 사이에 서 있는 5층 건물 자리로 중앙동 11번지 (신포로 27)이다. 이 옛 건물은 일제 때인 1920년대 초, 일본 면직물 도매상 히라노상점(平野商店) 주인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점포, 창고, 주택을 갖춘 연 건평 150평이 넘는 2층 호화 건물이었다고 한다.

 

신외과의 원장이 고 신태범(愼兌範 19122001) 박사였다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인천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신 박사는 서울 태생이지만 5세 때 부친을 따라 이주해와 인천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1936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바로 이 자리, 이 건물에 신외과의원(愼外科醫院)을 개원했다.

 

생전의 어느 자리에서인가 한국인 의사를 얕잡아보는 일본인들에게 어디 한번 실력을 겨루어 보자는 생각에서 일부러 일본인 거주지에 개업 장소를 잡았다는 말씀을 들은 듯한데, 신 박사의 저서 인천 한 세기에도 개업 당시의 사정이 나와 있어 옮겨 본다.

 

일본인 거주지 한복판인 본정(현 중앙동)에 병상 15개의 입원실과 당시로서는 완벽에 가까운 수술실을 갖춘 외과의원을 필자가 개업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일반시민, 특히 일본인들이 신외과 원장은 머리가 돈 의사가 아니냐는 야유도 있었다고 하나 졸업한 후 6년 반 동안 대학병원 외과에서 수련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개업 수단이란 전혀 모르고 열심히 진료에 전념했을 뿐이었다. 덕택에 차차로 환자가 늘던 중 다음해에 동양방적 인천공장장 나가노(永野某) 라는 거물이 일본인 의사의 치료로 악화된 위독한 후발찌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고 완치한 일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 후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입원 환자는 항시 만원이었고, 외래 환자도 매일 150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일본인 환자가 거의 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인천 출신 경성제대 의학박사 1호였던 신 박사의 실력과 젊은 날의 패기가 느껴진다. 이 명성이 광복 이후 1979년 폐업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져 인천에서 신외과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병원이 문을 닫은 후에도 신외과또는 신외과 자리는 사람들 입에서 신포동 일대 상점의 위치나 관공서의 방향을 설명하는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

 

행인지 불행인지 중구가 연고지였는데도, 이 병원 건물이 사라지기 전에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남아 있다. 1979년에 이르도록 몸에 단 한 번도 외과 처치를 받을 일이 생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적막한 듯, 좀 무뚝뚝한 듯, 그러면서도 단정해 보이는 신외과 병원 건물 사진은 사진작가이자 신문기자인 박근원 씨가 1960년대 무렵에 촬영한 것이다. 오늘처럼 제이디 피트니스센터니 페미니스트니 하는 서양 상호 간판을 단 5층 건물과 옛 건물을 비교해 볼 때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내친 김에 신 박사의 행장을 일부나마 소개하면, 광복 후 미 군정기 인천시 고문을 비롯해 인천의사회장, 중앙교육위원, 인천시정자문위원장, 국제로터리 376지구 총재를 역임했고, 인하대학교 교양학과 초빙교수로도 활동했다. 인천 갑구에서 제4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한 사실과 한때 민주주의 민족전선 인천지부를 결성하고 조봉암 의장과 함께 부의장에 선출된 특이한 기록 있다. 6·25 전쟁 때는 인천문총구국대 (仁川文總救國隊) 표양문 대장에 이어 화가 우문국과 부대장을 맡는 등 인천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저서로는 수필집 반사경(反射鏡)을 비롯해 인천한세기』『개항 후의 인천풍경』『먹는 재미 사는 재미』『우리 맛의 탐험과 번역서 미국사연의(美國史演義)가 있다.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을 지내고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을 거쳐 아시아올림픽평의회 부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용석(愼鏞碩)이 그의 장자이이고, 부친은 한국 최초의 해군 함정인 양무호(揚武號)의 신순성(愼順晟) 함장이다.

 

두 번째 사진을 기억하는 인천 토박이들도 꽤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집이 인천에 양지(洋紙), 문방류를 공급하는 총 본산 역할을 하던 집이다. 중구 중앙동 41번지(신포로 23) 대원호텔 맞은 편, 지금 돈씨네라는 돼지고기 집이 있는 자리이다. 공교롭게도 신외과와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있었다.

 

선명한 사진 덕분에 설명이 없어도 갖가지 지류(紙類)와 필기구·장부 등속의 사무용품이 그득하게 매장 안에 쌓여 있던 노포(老鋪)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점포의 사장 최용주(崔龍周 1917~2001) 씨의 혈색이 좋고 건강하던 풍채와 더불어 仁川洋紙公司라고 크게 써 붙였던, 중국 냄새가 풍기는 큼지막한 한자(漢字) 간판이 눈에 선명하다. 처음에는 아주 활달한 필치로 쓴 페인트 글자였는데 사진 속에는 양각(陽刻) 글자처럼 오려 붙여져 있다. 중학생 시절 간판의 맨 끝 자인 자의 독음(讀音)을 몰라 골치를 썩이던 애물이기도 했다.

 

사진 속에 보이는 가옥의 구조 보아 이 집은 이른바 일본식 목조 2층 적산 가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고스란히 그 외양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역시 세월의 변화를 어쩌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경기도 화성 출신인 최용주 사장이 인천에 거주하게 된 것과 또 인천에서 양지공사를 개업하게 된 것은 다 시절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1936년 최 사장이 스무 살 되던 해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뒤이어 취직한 곳이 일본인이 경영하던 경인트럭이라는 운수회사 경리부였다. 이 회사는 인천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 최 사장도 여기에 와서 기숙하고 있다가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집주인이었던 일본인으로부터 가옥을 물려받아 완전히 눌러앉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해에 양지공사라는 면적만도 백여 평이 넘는 큰 지물포를 차린 것이다.”

 

10년 전 어느 잡지에 썼던 글의 내용인데, 최 사장이 인천과 연고를 맺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부 인용했다. 양지공사는 학생 시절 어쩌다 미술반 친구들이 화선지나 켄트지 따위를 사러 갈 때 우르르 따라가서는 새롭고 다양한 문방구류를 선망의 눈으로 둘러보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우리 연배들에게나 통할 이야기이지만, 양지공사에서 I·P·C노트, Inchon paper company라는 영문 상호의 이니셜을 상표로 붙여 노트를 발매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목수가 재목에 먹줄을 튀기듯 흰 종이 위에 푸른 잉크를 묻힌 실을 튕겨 줄을 친, 실로 조잡한 노트였지만 예상 밖의 인기 품목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간단한 서류 봉투를 찍고 경리용 장부와 장표를 만들어 관공서, 회사에 납품하거나 군소 문방구점에 공급하면서 문방구류 공급 총본산 노릇을 했던 것이다.

 

이 사진 역시 박근원 기자가 찍은 것인데 앞의 신외과 사진과 거의 같은 날 촬영한 듯 사진의 명암이나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1960년대만 해도, ‘신포동으로 통칭하던 인천 한복판이 이렇게 적막하고 고요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보도 양쪽으로 놓인, 배달원이 끄는 듯한 화물자전거의 한가함이 불현듯 반세기 전 인천 풍경 속으로의 시간 여행을 이끄는 느낌이다.

 

사진에서 보는 이런 옛 병원 건물, 이런 노포(老鋪)가 그대로 오늘에 남아 있다면 어땠을까. 분명 좋은 향토관광 자원이면서 인천의 한 역사가 되고, 정체성이 될 수 있었을 터인데. 두 분의 옛 인천 명사, 유지를 그리워하며 그 두 분이 앞뒤에서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집들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 본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런 집, 이런 건물들을 그대로 남겨 두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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