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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22. 1954년의 인천

by 형과니 2023. 6. 17.

22. 1954년의 인천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4-08 13:47:41

 

휴전 이듬해 전쟁의 상흔 고스란히

[김윤식의 인천산책] 22. 1954년의 인천

 

단기 4288년도 판 인천연감(仁川年鑑)에는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인 1954년 인천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연감이라는 것은 바로 직전 해에 각 분야에서 생기(生起)한 사항의 모든 수치와 내용을 수록하는 통계, 자료집인데 단기 4288년 판이라면 서기로는 1955년도 출판 본으로 실제 내용은 그 전 해인 1954년 내용이 되는 것이다.

 

연감을 펼치면 눈길을 끄는 것이 우선 개설(槪說)’에 나와 있는 당시 인천 인구 통계다. 195412월 말 현재 5285가구에 인구 총수는 266914명이다. 280만에 육박하는 오늘날의 거대 도시 인천 인구에 비하면 겨우 9.5%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6·25 발발 전의 인천 인구, 즉 원주민 인구는 241561명이었다. 그것이 1954년 말 현재는 52579명이 감소한 188982명으로 줄어들어 있다. 그것은 전쟁을 피해 타지로 피난했거나 아니면 사망, 실종 등의 사유로 보인다. 그러나 인천 인구는 77932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대거 유입됨으로써 오히려 증가한다. 전쟁 전 241561명이었던 인천 인구가 총 266914명으로 25353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참고로 순 원주민 인천 인구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20~24, 25~29, 30~34세 층에서 남자 인구가 여자보다 월등히 적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인천 원주민 중 상당수의 남자 인구가 감소한 것은 결국 전쟁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54년이면 바로 휴전 이듬해이니 나라 전체에 이 같은 전쟁의 상흔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인천은 더더욱 전쟁의 피해를 본 곳이어서 책자 곳곳에서 그런 상황을 읽을 수 있다. 누렇게 빛바랜 책자만큼이나 초라하고 피폐했던 57년 전 인천의 모습을 살펴보노라면 상전벽해, 격세지감에 앞서 문득 숙연한 느낌마저도 든다. 목차에 보이는 연감의 편제는 개설·연간 약사(略史정치·경제·교통 통신· 사회·교육·체육·문화·종교·치안·명승고적·상공요람·인사록(人士錄) 등으로 인천의 모든 면모가 드러나 보이도록 짜여 있다.

 

정치 편에는 그 해에 있었던 5·20총선에서 갑구 선거구 자유당 김재곤(金載坤), 을구 무소속 곽상훈(郭尙勳), 병구 역시 자유당 표양문(表良文)의 당선을 기록하고 있고, 동년 115, 2대 인천시장 선거도 곡절 끝에 김정렬(金正烈) 시장이 당선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장 선거 내용이 참으로 뜻밖이다. 시장 선거는 오늘날과 달리 28명의 시의원이 선출하는 간선이었다. 당초 입후보자는 김정렬, 허섭(許燮), 최병환(崔炳煥), 사준(史埈), 조승환(曺勝煥) 5명이었는데 1, 2차에 투표에서 출석의원 2/3 이상의 득표자가 없어 3차 결선 투표에 들어가 김정렬, 허섭이 각각 12표씩 동점을 얻는다. 결국 당시 지방자치법 시행령 제36조에 의해 양자가 추첨으로 가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그것이 해프닝이었는지, 아니면 끝내 밝힐 수 없는 사유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추첨 당사자인 허섭이 나타나지 않아 김정렬이 자동으로 당선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12표의 동점을 얻은 김정렬, 허섭 양씨에 지방자치법 시행령 제36조에 의거하여 16일 하오 1시까지 출두하여 추첨토록 하는 동시 만약 동점 입후보자가 출석치 않을 때에는 출석한 입후보자에게로 시장을 결정하겠다는 통고를 쌍방에 내렸으나 10분이 지나도록 허 씨는 출두치 않고 김정렬 씨는 김은하(金殷夏) 의원에게 전권을 일임하는 위임장이 전달되어 왔다. 이리하여 이명호(李明浩) 의장으로부터 김정렬 씨 당선 선언이 있었다. 장내는 박수성으로 김정렬 씨의 영예로운 당선을 열광적으로 축하하였다.’

 

경제부문 중에는 어종별 위탁 판매고 누계가 눈에 들어온다. 특히 이 통계를 통해 그 당시는 우리 인천이 조기와 민어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19541년 동안 조기 위탁 판매고는 무려 12920580(?)으로 단연 최고치다. 민어가 5942460, 갈치가 34796425환으로 각각 그 뒤를 잇고 있고, 국민어종이라는 고등어는 4093180환으로 4위에 올라 있다. 이처럼 풍족했던 인천 어장은 지금은 모든 어족이 씨가 마르고 말았다.

 

시내에 개설된 네 군데 시장에서도 반세기 이전의 인천 모습이 보인다. 송현동, 금곡동에 걸쳐 있는 중앙시장은 점포수 802개로 규모가 가장 크다. 그 다음이 인현동의 청과시장으로 점포수 38. 신포시장은 점포수 35개로 지금에 비하면 상당히 규모가 작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어시장이라고 해서 4개 점포를 별도로 제외한 수치이기는 하다. 지금은 사라진 송월동 가축시장도 당시에는 제법 거래가 큰 시장이었다.

 

저명 생산 공장이라는 표현이 좀 어색한 듯한데 인천연감은 몇몇 생산 공장을 선정하고 있기도 하다. 초토에서 일어나 공장을 복구, 가동하고 있으니 그것이 대견하고 요긴해서 이런 문구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저명 생산공장은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적공사와 대한제분, 대동제강, 조선화학비료공장,흥한방적 등이다. 동양방적은 책의 뒷 표지 안쪽 양면에 걸쳐 회사 전경 등 광고를 게재하면서 당시 44세의 장년 서정익(徐廷翼) 이사장의 얼굴도 함께 실었다.

 

전후의 극심한 전력난도 보인다. 195410월 말 현재 수요가의 시설은 전등 관계 69, 동력 관계 7정도가 복구되었는데 서울서 인천지방으로의 송배전 시설은 66v 계통이 미 복구되어 현재 22v 계통으로 가복구하여 수전(受電)으로 받고있는 까닭에 제한 송전이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우리 생활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초저녁에 들어왔던 전기가 밤 12시 통행금지와 함께 꺼지던 일이 196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급수 사정도 당시까지는 매우 눈물겨웠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연감에는 비교적 양호하게 나와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렇더라도 통계 수치를 인용하면 인천은 당시 급수 호수가 28658호로 70%, 급수인구는 134768명으로 60%에 달한다는 것이다. 아마 공동우물이나 가정우물을 가진 호수와 인구는 제외한 수치를 가지고 비율을 산출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인천에는 병·의원이 총 87개소, 치과의원이 14개소가 있었다. 인구 368명 당 병·의원 1개소 꼴이다.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신외과의원, 이중설의원(李重卨醫院), 경동에 유명했던 김응석의원(金鷹錫醫院), 이종화(李宗和) 원장의 공립병원, 고주철(高珠徹) 원장의 고의원, 허이복(許利福) 원장의 숭의동 삼성의원, 김려성(金麗性) 원장의 해안의원, 오근영(吳根英) 원장의 숭의동 순천의원, 뼈 병원으로 유명했던 고병령의원 (高秉齡醫院), 김관철(金寬哲) 원장의 지성소아과의원 등이 언뜻 떠오른다.

 

교육자로는 초등학교의 조석기(趙碩基), 조운준(趙雲濬), 양준식(楊俊植) 교장과 중고등학교의 길영희(吉瑛羲), 김형철(金亨喆), 남상협(南相協), 허섭(許燮), 김연우(金演佑), 이병규(李炳奎), 심상원(沈相元), 박해룡(朴海龍), 최봉칙(崔鳳則) 교장 등의 면면이 낡은 사진 속에서나마 또렷하다.

 

1954813일부터 16일까지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거행된 주간 인천신문 주최 제14도시야구대회에서는 대구상고가 3전 전승으로 우승, 인천고가 21패로 준우승을 차지한다. 경남고가 12, 경동고가 3전 전패로 꼴지를 차지했다.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는 서울 팀에 32로 석패, 준우승했는데 유인식(劉仁植)이 타격상을, 그리고 홈런상을 박현식(朴賢植)이 받아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자전거경기대회에서는 인천꼬마김호순(金好順)이 거의 전 종목을 휩쓸어 자전거 인천의 명성을 과시한다. 그의 전적을 보면, 500m 속도경기 1, 1m 선두경기 1, 4m 속도경기 1위를 차지하고 1m 속도경기만 김장곤(金長坤)과 그의 형 김호진(金好鎭)1, 2위를 차지한다.

 

조병화(趙炳華), 조수일(趙守逸), 한상억(韓相億), 박송(朴松), 한무학(韓無學), 최태응(崔泰應), 이인석(李仁石), 이흥우(李興雨), 최정삼(崔定三), 김양수(金良洙) 같은 문인들 명단과 함께 작곡가 최영섭(崔永燮), 우문국(禹文國), 김영건(金永健), 유희강(柳熙綱), 김학수(金學洙), 박응창(朴應昌) 화백들도 실려 있다.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시내에 양복점이 총 7군인데 중구 관동의 춘방양복점을 제외하고 6군데는 모두 중구 경동에 있다. 다방은 23업소로 당시 인천시내 한복판이 신포동, 중앙동, 관동, ··용동, 인현동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 선대들이 다방 출입을 했을 무렵이니 훗날까지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다방은 고작 호수다방, 유토피아 다방 정도이다. 그 유명한 은성다방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권말에 실린 인사록인데, 당시니까 이런 편집이 가능했지 요즘 같으면 몹시 시끄러웠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인천의 저명인사 명단으로 인구 30만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에서 여기에 끼고 안 끼고 상당한 설왕설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자로 인쇄가 되어 나왔다는 것은 인천 사회가 이런 정도는 받아들일 아량이 있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인천의 소박한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전후 피폐할 대로 피폐한 이 땅에서 우리 선대들이 내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린 모습들이 낡고 퇴색한 인천연감(仁川年鑑)이 한 권 속에 생생히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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