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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21. 경인기차 통학

by 형과니 2023. 6. 17.

21. 경인기차 통학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3-13 01:29:03

 

떠나는 기차 난간 붙잡고 뛰어오르던 일 다반사

21. 경인기차 통학

 

부평이나 주안, 그리고 수인선을 타고 다니던 송도 바깥쪽, 소래 근방의 학생들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인천으로 기차통학을 했지만, 인천 한복판에 살던 우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서야 기차통학을 처음 시작했다. 그 날짜까지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196632일 수요일, 45년 전 꼭 오늘부터였다. 이날 입학식을 했는지, 강의를 처음 들었는지는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아직 추위가 물러가지 않은 미명의 새벽을 달음질쳐 동인천역에 다달아 들뜬 기분으로 같은 대학 신입생 동기들과 기차에 오르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모습이라니! 어느새 웃자란 머리에 새 옷, 새 구두, 새 가방을 들고는 명색이 대학생입네 하고 대합실에서 담배를 물고 철없이 으스대거나, 흘끗흘끗 여학생들이 앉은 쪽을 넘겨보던 주착과 함께 애송이 프레시맨의 첫 통학 풍경이 선명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천에 대학이라고는 고작 단과대학인 인하공과대학과 2년제 인천교육대학만이 있을 뿐이어서 대다수 고교 졸업생들이 진학을 위해 서울로 통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1시간이면 서울에 가 닿고, 통학권(通學券) 값이 당시 제물포역에서 서울 신촌역까지 3개월간 480원일 정도(다소 기억이 희미하다)로 저렴한 이점이 있기도 했다.

 

“3년제 인천상업학교가 내동에 있을 때, 3개 공·사립보통학교 출신들은 인천상업에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인문 중학교나 그 이상의 전문학교를 지망하는 학생들 역시 80리나 떨어진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하게 되었다. 우리 학생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일본인 남녀 학생도 서울로 통학했었다.”

 

오늘날의 대학과 과거의 중학교(혹은 전문학교)라는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언론인이었던 고() 고일(高逸) 선생이 기록한 인천석금에도 191020년 당시 상급학교가 절대 부족한 인천의 실정과 그 때문에 부득이 경인기차통학이 생겨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인천 학생들이 기차통학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언제일까. “인천 청년들이 서울로 기차 통학을 시작한 것은 약 40년이 된다.”고 한 인천석금의 기록대로 대략 1910년대 전반이나 중반 무렵이다. 40년이라는 것은 고일 선생이 그 원고를 쓰던 때가 1954년이었기 때문에 그때를 기준으로 소급한 연수이다. 물론 고일 선생 자신 역시도 1918년부터 경인기차통학을 시작했다.

 

이 같은 기차통학 시기를 놓고 보면, 어쩌면 이 새로운 풍조도 우리 인천이 처음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작년 어느 기관지에도 쓴 적이 있지만, 그 주된 이유의 하나로 개항으로부터 근 30년 가까이 경과한 1910년대에는 일본인 틈에서나마 정미업, 포목점업으로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한국 상류층 상인들과 해관(海關)의 관리 등을 지낸 인텔리 계층의 증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미 1899년 경인선 개통 이후 10여 년 동안 이 같은 상류층 인천 사람들은 고작 1시간 내외면 서울에 당도할 수 있는 경인기차의 편리를 누리고 있었다는 점을 상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들 성공한 상인들과 인텔리들은 우리가 국제 정세에 무지했고 신문물에 대해 무식했기 때문에 결국 나라까지 잃었다는 뼈아픈 자각을 했을 것이고, 또 당면한 생존의 조건은 오직 후세를 교육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교훈을 터득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더구나 그 같은 교육열은 경쟁적으로 퍼져 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인천은 당시 우리나라 사회상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많은 수의 여학생들까지 기차통학에 합류한 사실로도 그 같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경부선이 1905, 경의선이 1906년에 개통이 되지만 경인선처럼 대규모 기차통학생을 유발해내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인천은 서울과 1시간 내외 거리의 가까운 지리적 여건과 자제 교육에 열의를 가진 다수의 부유한 부모들이 있었던 까닭에, 많은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등하교하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통학 형태를 처음 발생시켰다는 가설이다.

 

그때는 거의 한 시간마다 출발과 도착이 이루어졌는데, 그 시간이 매우 정확했다. 또 학생 정기권은 월 1원이니 얼마나 편리했던 것인가? 객차의 좌석도 크고 넓어서, 서서 가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경인간 왕복에 소요되는 시간과 요금이 인천에 사는 학생을 서울에 있는 학교로 통학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축현역(동인천역)에서 서울까지 소요 시간이 50분이고 파스라고 부르던 정기통학권(定期通學券)1개월이 150, 3개월 3원이었으니 뜻만 있으면 누구나 경인기차통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위의 인용문은 고일 선생의 글이고, 나중 것은 의사이자 향토사학자였던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두 분 다 경인기차의 유리한 통학 여건을 설명하고 있다. 다만 신 박사가 고일 선생보다 9년 연하여서 정기통학권의 가격차가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통학 풍경은 어떠했을까.

 

기차간은 이동 교실이나 도서실, 연구실도 되었다. 처음에는 여학생이 그리 많지 않아 남녀가 합석했으나, 나중에 여학생이 많아지자 맨 뒤 칸으로 그들을 몰아넣었다. 새벽밥을 든든히 먹고, 도시락까지 책보에 싸서 어두운 새벽길을 달음질해 기차에 오르면 그 날의 일은 성공이었다. 그래서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게 나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달려가는 기차에 오르는 일에 익숙해야 했다.<중략>

 

한겨울 컴컴한 새벽, 첫차에 오르면 무럭무럭 김이 나는 뜨거운 스팀과 밝은 전등이 학생들을 위로해 주었고, 봄철이 되면 오류동에 활짝 핀 벚꽃이 공부에 시달리던 학생들의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또 이른 여름과 가을에는 축현역 연못가의 서늘한 아카시아 숲에서 영시(英詩)를 암송하는 취미는 기차 통학생이 아니면 맛 볼 수 없었던 정취였다. 경인 기차 통학은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오늘 어디서 그런 낭만을 맛볼 수 있겠는가?”

 

고일 선생이 묘사한 통학 풍경은 우리 시대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여학생들과 자유롭게 합석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새벽밥을 든든히 먹고도 기차 시간에 늦지 않는 것은 반세기 뒤의 우리에게도 큰 성공이었다. 기차 시간에 늦어 이미 발차하는 기차의 난간을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뛰어오르던 일은 너나 할 것이 다반사로 벌이는 곡예였다. 봄철 오류동의 벚꽃은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소사의 복사꽃만은 화안했던 기억이 난다.

 

두드러진 차이라면 1950년대엔가 매립이 되어 축현역(동인천역) 연못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아카시아 그늘에서 영시를 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하긴 아카시아 그늘이 있었다 해도 우리는 영시를 낭송할 정도로 격조를 가진 대학생이 아니어서 틀림없이 희떠운 농지거리나 주고받으며 지나는 행인 앞에 버릇없이 굴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경인 기차 통학은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오늘 어디서 그런 낭만을 맛볼 수 있겠는가?”라는 고일 선생의 표현은 우리 세대에게도 딱 들어맞는 감정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통학 친구들과 어울려 끊임없는 정담과 의기를 나누었으니…….

 

요즘은 기차 자체가 전철로 바뀐 데다가 경인간에 들어선 수많은 정거장에 쉴 새 없이 정차해 대는 통에 도무지 부산스럽고, 책 한 줄을 느긋하게 들여다보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디젤 기관차였지만 그나마 서울까지 10개의 역밖에 없던 우리 시대 기차보다 무슨 낭만이 있으랴.

 

그때를 회상하는 향토의 어른들은 향수처럼 아늑한 향토에 사로잡히리라. 경인 기차 통학생은 꿈과 희망과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청춘 시절은 얼마나 아름다웠던 것이냐! 이제 현존하는 향토인으로 초기 통학생을 들어보면 배재의 최영억, 갈홍기, 장대진, 강흥석, 진종혁, 박태성, 서정익, 임종성 등 여러분이고, 양정의 임정록, 이상태, 이상용의 종형제와 이극남, 필자 등과 한만억, 박칠복, 이인학, 강신혁, 이비도, 이대근, 심의균, 임영균, 홍리표, 차태열, 조진만, 이형식, 고희련, 최봉기 등 여러분이고, 고인으로는 고유섭, 조준상, 송공예 씨 등이다.

 

여학생으로는 여고보의 서메리(서은주), 이도라, 이순희 씨 등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성공한 분들이 많으나,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지낸 곽상훈 씨 등이 겨우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고일 선생은 이렇게 경인기차통학생편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대단한 우리 인천 선대들의 함자를 읽을 수가 있다. 특히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는 1920년에 야구팀 한용단(漢勇團)을 결성해 웃터골 운동장에서 일인 팀을 상대로 민족의 울분을 잠시나마 달래 주었고, 정노풍, 고유섭, 이상태, 진종혁, 임영균, 조진만, 고일 등은 문예 활동을 펴기도 했으며, 이길용, 이건우, 장건식 등은 제물포청년회를 조직해서 사회 계몽 활동을 했음을 기억한다.

 

시대가 같지 않아 우리가 통학할 1960년대에는 이런 열혈 조직도 없었고 뜻 높은 결사도 없었지만, 옛날처럼 지역사회나 나라의 동량지재로 자라난 사람들은 여럿 있다. 이야말로 우리 선배들이 최초로 개통했을 경인기차통학의 전통이 이어진 것인데, 오늘날은 이런 통학 풍경조차 보이지 않아 결국 한 세기를 다 이어가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45년 전, 기차통학 첫날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이런 값 없는 상념에 잠기게 되는 것인지···.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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