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인천의 성냥공장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4-13 12:42:15
'성냥 메카' 이름 날려 ← 1960년대 → 라이터에 밀려 사양길
23. 인천의 성냥공장
전국 어디서나 인천하면 떠올리는 것이 소금과 성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소금은 한창 때인 1932년, 인천 주안염전을 비롯해 남동염전에서 전국 소비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해 낼 정도였으니 그 명성이 널리 퍼지지 않을 리 없었고,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소금 한 줌 나지 않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짠물’이라는 별명으로 남아 있다.
인천 성냥 역시도 세월의 변화와 물자의 발전을 따라갈 수 없어 진즉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는데, 상스럽고 저속하기 이를 데 없는 노래 가사(歌詞) 속에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 운운하며 살아남아 끈질기게 불리고 있다.
이 같지 않은 노래는 특히 군대에서 많이 불리고 또 전파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 역시 40여 년 전 군대에서 처음 들으면서 누가 지어낸 가사인지 참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늘날 우리 군대에는 더 이상 이따위 노래가 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일설에는 그 곡조가 과거 일본군의 군가 곡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실제 이런 노래곡이 일본 군가에 있었는지 확인은 못해 보았으나, 그렇더라도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하낫 둘’ 구령을 넣어 여느 군가처럼 맞춰 부를 수 있는 점에서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담이 길어졌다. 성냥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와 인천에 성냥산업이 그토록 융성했던 연유에 대해서는 『굿모닝인천』 지난 3월호에 짧게나마 기록한 바 있어 편의상 인용해 본다.
석유와 마찬가지로 1880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한말의 개화 승려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램프·석유·성냥’ 같은 일본 제품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여왔다는 것이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양화수통(洋燧火筒)이 또한 석유와 함께 성행했는데 민간인들은 그것을 자기황(自起黃)이라 불렀다(洋燧火筒亦隨石油而盛行, 民間謂之自起黃)”라는 구절이 보인다. 고종 17년이니까 곧 1880년의 기록이다. ‘양화수통’은 ‘서양 부싯돌 통’이라는 의미이고 ‘자기황’은 ‘불을 일으키는 황(黃)’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문지르거나 무엇에 부딪히면 불이 일어나도록, 화약에 다른 물질을 섞어서 만든 고체의 황’ 즉 성냥을 의미하는 것이다.
석유와 마찬가지로 성냥 또한 그 편리함과 유용함 때문에 급속하게 우리 생활 속에 퍼져 나간 듯하다. 황현이 ‘성행’했다는 표현을 쓴 점으로도 그 같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성냥의 수요가 점차 늘어나면서, 국내 시장에 주목한 외국인에 의해 직접 성냥 제조가 시작된다.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하에 성냥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는데, 그 주요 원인은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이었다”는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라는 보고서에서 국내 생산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인천에 성냥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7년 10월이다. 현재의 동구 금곡동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가 그것인데, 금곡동에 자리를 잡은 것은 서울, 경기 지역의 넓은 배후 시장과 함께 함경, 평안 등지에서 생산된 목재를 압록강을 거쳐 인천으로 들여오기가 용이한 그런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 금곡동은 배다리 인근 지역으로 수로가 서해로 열려 있고 또 경인철도 축현역이 가까워 제품 운송도 수월했던, 그런 유리한 공장입지였다. 『인천 한 세기』의 저자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지적했듯이 “서울에는 공장을 세울 만한 부지가 없었고 전력도 인천보다 부족했다”는 것이다. 금곡동 후방의 고지, 즉 쇠뿔고개 정상 부근에는 인천 최초의 변전소까지 들어서 있었다.
조선인촌은 신의주에 직영 제재소까지 두었는데 직원만 남자 약 200여 명, 여자 300여 명 등 총 500여 명에 이르는 대식구였다. 여성 직원이 많은 것은 성냥 생산이 거의 수공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노동 자체가 단순하고 섬세한 데다가 임금도 저렴해서 여성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성냥을 담는 갑(匣)은 종이처럼 얇게 저민 목재를 선을 따라 사각형으로 구부린 뒤 풀칠을 한 종이에 붙여 만든다. 그리고 이 갑을 집어넣는 겉 상자도 그런 방식으로 만든다. 아주 꼼꼼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상표를 붙이는 작업, 성냥개비에 인(燐)을 발라 건조시키는 일 등은 차라리 여성들이 더 유리한 노동이었다.
조선인촌은 ‘패동(佩童)’이니 ‘우록표(羽鹿票)’니 ‘쌍원표(雙猿票)’니 하는 성냥을 연간 7만 갑을 생산했는데, 당시 인근 500여 가구가 집에서 성냥갑을 붙여 납품하는 일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는 아랫집 춘삼네를 통해 성냥갑 붙이는 재료를 얻어 왔다. <중략> 하루 만 개 가까이만 붙였으면 공전이 일 원 오십 전, 그만하면 우선 급한 욕은 면하겠고 그리고 노마 어미에게 할 말도 하겠고, 하루 만 개!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이니 인력으로 아니 되란 법도 없으리라. 오냐. 만 개만 붙여라―.”
이 글은 1930년대 인천항을 무대로 한 현덕(玄德)의 소설 ‘남생이’에 나오는 구절이다. 성냥에 얽힌 당시 인천 하층민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인천의 성냥산업은 광복 후 대한성냥공장주식회사로 이어져 전국을 휩쓸다시피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라이터’ 산업이 고개를 들면서 점점 사양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191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40~50년간 인천이 성냥의 메카로 전국에 군림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천하면 성냥을 떠올리고, 또 기묘한 노래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인용한 글에서 보듯 인천이 성냥산업의 메카 구실을 한 데 대한 이유나 앞에서 이야기한 그 저속한 노래 속에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말이 나온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글에서는 주로 최초의 성냥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는데, 그 후 반세기 가까이 흐른 1956년에는 인구 불과 30만의 인천에 성냥공장만 무려 9군데로 늘어나 있는 것이다.
대한성냥(화수동), 조선성냥(숭의동), 평안성냥(송현동), 송현성냥(송현동), 인천성냥(송림동), 인천인촌(송린동), 고려성냥(송월동), 한국성냥(금곡동), 한양성냥(금곡동) 등이었다. 그야말로 성냥불이 붙듯이 일시에 확 일어선 것이다.
이 정도면 과연 ‘인천의 성냥공장’ 소리가 얼마든지 나올 법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서로 경쟁하기가 버거운 면도 없지 않았던 듯 그 이듬해 자료에는 ‘인천성냥’ 한군데만 보이는 것이다.
역시 1960년이 되기 전에 문을 닫고 신철공장(伸鐵工場)으로 재빨리 변신했던, 안봉재(安鳳載) 사장이 운영하던 ‘조선성냥’은 숭의동으로 이사한 우리 집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에 오며가며 들여다볼 수 있어서 지금도 그때 직원들의 작업 모습이나 공장 풍경이 아주 눈에 생생하다.
이 공장에도 직원은 주로 처녀들이었다. 적어도 20~30명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자 직원은 안 사장과 늙수그레한 직원 둘, 그리고 안 사장의 두 아들이 전부였다. 그 두 아들은 얼추 청년 티가 났던 것 같다. 공장은 늘 성냥개비를 자르고, 편편하게 켜낸 통나무에서 성냥갑을 만들 얇은 판대기를 저며 내느라 하루 종일 치카치카 하는 소음을 내었다.
아버지 안 사장의 눈을 피해 큰아들이 가끔씩 성냥개비에 황을 묻히던 처녀 직원 곁으로 다가가곤 했지만 푸르스름한 연기 속에 공장 안은 왜 그런지 한적한 느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살 위의 이 집 막내가 자기네 성냥을 들고 나와 골목에서 담뱃불을 붙이고는 캑캑거리던 기억도 있다.
아무려나 이것도 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현덕의 소설 속 이야기대로 195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인천 시내 수천 가구가 성냥갑을 붙여서 삶을 도왔다는 이야기, 실제 내 외가에서도 당시 ‘인천성냥’ 갑을 붙여 숫골 한적한 길가에 여러 장의 가마니를 깔고 풀칠한 성냥갑을 내다 말리던 광경이나, 여러 가지 성냥 상표를 백로지에 붙여 방학 숙제로 제출했던 국민학생 시절 이야기를 하면 과연 요즘 사람들이 흥미 있어 할까.
글=김윤식 시인·前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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