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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24. '인천도나스'

by 형과니 2023. 6. 18.

24. '인천도나스'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5-06 01:04:44

 

 

즉석 도넛 사이에 두고 男女학생들 '속닥속닥'

24. '인천도나스'

 

인천도나스집처럼,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추억의 장소로 남은 곳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 설레며 드나들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196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 집이 더욱 아련하게 떠오를 것이다.

 

기독병원을 지나와 율목동으로 내려서는 돌계단 조금 못미처서 가로로 넓은 유리창과 표정 없이 무뚝뚝한

 

출입문과 그리고 인천도나스라고 쓴 아크릴 야간 조명 간판이 돌출해 달려 있던 도넛 집. 이 도넛 발음을

 

일본식으로 도나스라고 부르고 그대로 써 붙인 것도 다 추억의 한 장면 같게만 느껴진다.

 

인천도나스는 그다지 넓은 평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홀 안은 단순한 사각형 구조로 테이블이

 

6개쯤인가 놓여 있었다. 다른 도넛 집들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비교적 고급스럽고 안락한 소파 같은

 

의자가 특징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재즈나 컨트리 송 같은 음악도 곁들여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메뉴는 사진에서 보듯 직석 도나스가 주였는데 가격과 수량은 기억이 희미한 대로, 방금 끓는 기름에서 건

 

 

져 낸 황금색 도넛이 흰 설탕가루와 초콜릿 시럽을 뒤집어 쓴 채 양은쟁반에 담겨 나왔다.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겠지만 커다란 포크로 쫄깃하고 향미 있는 도넛을 찍어 먹었다. ‘직석이라는 표현이 요즘 쓰는 즉석과 대비가 된다.

 

특히 이 집 메뉴로 이름났던 것이 겨울철로 들면서 내놓는 젠사이였다. 우리말로는 단팥죽이 옳은데 그때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흔히 그렇게 불렀다. 아무튼 작은 보시기 같은 그릇에 담긴 그 맛이 어찌나 입에 착착 감기었는지 노년으로 접어드는 지금에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사진 속에도 흐릿하게나마 유리창의 볶음밥글자 위로 단팥죽 개시라고 비스듬히 종이에 써 붙인 것이

 

보인다. 기독병원 쪽으로 가고 있는 행인의 파커 같은 옷차림에서 단팥죽의 계절, 곧 겨울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 단팥죽 한 그릇 값이 얼마였는지 영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집을 처음 가 본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3년이었는데, 참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단팥죽을 먹었던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그때가 고1 겨울방학 직전으로, 같은

 

그룹의 김 모 군이 우리 학교 옆의 여학생 하나를 불러낸 자리에 동석해서 얻어먹은 것이었다.

 

여학생의 동그마하고 깨끗한 얼굴도 가슴을 뛰게 해 고개를 잘 들지 못했지만, 상상만 하던 이 집 단팥죽

 

맛을 처음 본 것이 기분을 더 흥분시켰던 것 같다. 그 후로 그 여학생이 우리와 더욱 친밀해져 자기 친구

 

몇을 데리고 나오는 데까지 발전해 아예 그룹 형식으로 만나곤 했는데, 자기들 용돈 사정에 따라 정해

 

주는 대로 우리 남학생들은 주로 수량이 많은 도넛을 먹었다.

 

솔직히 말해 당시 도나스젠사이값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지불한 적이 있었다면 흐릿하게나마

 

얼마였는지 짐작이라도 해 내련만 불행하게도 돈을 낼 만큼 넉넉한 경우에 단 한 차례도 이르지 못했던

 

까닭에 도무지 값을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사진 속 풍경은 1960년대 말경이 아닌가 싶다. 유리창에 분식코너라든가 칼국수라는 말이 씌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박 대통령이 분식 장려를 하기 전에는 거의 쓰이지 않던 말로,

 

그 전까지는 국수집이나 국수장국이란 말이 통용되었었다. 유리창에 써 붙인 냉면과 볶음밥 메뉴도

 

우리가 자주 드나들던 시절에는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문득 이 사진 한 장 속에서 멈추지 않고, 재빨리

 

변전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앞에서 추억의 장소니, 마음 설레며 드나들던 곳이니, 하는 말을 한 것은 이 장소가 남녀 학생들이

 

그나마 주위의 눈총을 받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이곳이 학생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는지 그 연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짐작컨대 음식의 가격과 품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회 통념상 학생들이 금해야 할 음식은 인천도나스에 없었다.

 

그 무렵은 사회나 학교의 규제가 워낙 심해서 남녀 학생이 함부로 마주하거나 대화하기도 어려웠다.

 

요즘 젊은 학생들이라면 아마 질식해 버릴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천도나스같은 업소

 

출입도 학교에서 불가(不可)로 판정하면 불가였고, 혹 담임이 나서 금지 판정을 내렸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규율이 되는 때였다. 하기사 그런 규제가 있다고 해도 그 정도 어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강심장 학생들도 있기는 있었지만.

 

아무튼 이 인천도나스는 그런 규제에서 풀려 있었다. 크게 염려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이 학교에

 

알려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통 남녀 학생 단둘이서는 좀해서 이런 데 오기가 힘들었다.

 

역시 삽시간에 양쪽 학교에 소문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로 여럿이 만나게 될 경우에 이용했는데

 

문제는 도넛 값이었다. 여학생들은 늘 우리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서 도넛 값을 치러 주는 것이

 

통례였다. 도넛이 한 쟁반이 되거나 두 쟁반이 되거나 하는 것은 오로지 여학생들의 선심과 선처에 의한

 

것이었다.

 

인천도나스가 애초부터 학생들을 보고 개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집이 생긴 이유라면 이 일대가

 

일제 때부터 부촌인 데다가 기독병원이 인근에 있고 아래쪽에 경동의 번화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우리가 드나들던 1960년대 초반에는 어른들도 심심치 않게 출입을

 

했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찾는 명소가 된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집이 남녀 학교들과 상당히 떨어져 있고,

 

번화한 대로에 면하지 않은 그런 이점 때문이었을 듯싶다.

 

인천도나스에서 계단을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율목동 길과 직각으로 경동으로

 

꺾여 가는 골목길, 그리고 그 겨드랑이 사이로 유동 쪽으로 빠지는 골목길이 있었는데 바로 이렇게 길이

 

갈라지는 삼각주 모서리 지점에 용일당이라는 인천도나스와 유사한 음식점이 있었다. 주인 여자가 우리

 

보다 서너 살 위 누나뻘이었는데 인기가 있었다.

 

이 집도 인천도나스와 비슷한 음식을 냈지만, 실내 분위기나 출입하는 학생들 모습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테이블이 여러 개여서 편리하기는 했어도 문제 학생들이 출입하면서 소소한 충돌과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이밖에 비슷한 집이라면 내리교회 정문 밑에서 옛 축현학교 방향으로 향하는 길 중간쯤 오른쪽에 있던

 

명물집이다. 그러나 그 시절 빛바랜 추억을 되씹을 겨를도 없이 지금은 이들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여학생들과 동행이라고 해야 서로 다른 테이블에 떨어져 앉아 누가 들을세라 낮은 소리로 그것도 띄엄띄엄

 

속에 든 말을 다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 시간이 왜 그렇게 황홀하고 행복했었는지. 요즘 전철이나 가로나

 

공원이나 가리지 않고 끌어안고 비비적거리고, 아무데서나 목소리 높여 자기들 마음껏 떠들어대는 젊은

 

사람들과 인천도나스에서의 그 숙맥 같았던 우리 세대를 비교해 보면 실로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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