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다방 전성기의 시작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1-12-20 11:54:46
시시콜콜한 이야기 들어주던'아네모네의 마담'
9.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다방 전성기의 시작
▲ 1961년 5월29일 동아일보에 실린 커피 판매 금지 기사.
5·16 직후 전국 다방은 일제히"오늘부터 커피를 팔지 않습니다"란 게시문을 내걸었다. 외래품 근절을 위한 자발적 움직임처럼 보도됐지만 사실은 전량을 외국서 수입하거나 미군부대 PX를 통해 불법 유통되는 커피를 뿌리 뽑자는 군부의 조치였다.
다방에 대해 기록으로 남은 것은 문인 등 주로 문화 예술인들이 쓴 글뿐이어서 일반인들의 다방 출입이나 그 관련한 내용은 거의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실제 1960년대가 되도록 일반인들의 다방 출입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여기에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에 걸쳐 다방이라는 '모던 공간'이 우리나라에 처음 생겨날 때부터 문화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방이 생기고 6, 7년이 지나 1940년대에 가까워지면서 서울에서는 총독부 관리, 일본인, 기생, 은행원, 회사원, 대학생 남녀 등 일반인이 출입하면서 손님 층의 확산을 가져 온다. 물론 이때에도 드나드는 손님의 취향에 따라 '문화 다방'과 '일반 다방'으로 구별이 있기는 했었다.
이러한 현상이 인구가 많은 서울에서는 비교적 빨리, 넓게 확산되었을 터이지만 인천의 경우는 알려진 대로 1930년대에는 '파로마 다방' 하나뿐이어서-그나마도 동일한 다방인지 불명한 대로-'1946년 5월에 그곳에서 제물포사진동지회를 조직했다'는 기록 외에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이때 일반인의 다방 출입 자료에 대해서는 더욱 암중(暗中)을 헤매는 꼴이다.
이후 다방은 광복이 되고 6·25를 거치는 동안 더욱 크게 변모해 간다. 그동안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으로서, 문화 예술의 현장이 되고 배경이 되었던 다방은 이제는 완전히 성격이 바뀌어 일반 대중이 무시로 드나드는 공공 출입처로, 또 만인의 응접실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1950년대, "6·25라는 절망과 허무의 극한을 딛고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의 삶을 확인하고 위안(慰安)하는 심리적 장소"에서 1960년대, '여전한 국가 경제의 피폐와 함께 수많은 무직자들이 답답한 집을 빠져나와 갈 데 없이 모여드는 집합소'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문화 다방'이 여전히 시내 몇 군데에 존재하기는 하면서. 이런 과정을 거쳐 1960년대는 말 그대로 다방 전성시대를 이룬다.
다방 전성시대와 더불어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종전과 다른 경영 체제의 변화였다. 이미 앞장에서 언급한 대로, 초창기 서울의 다방들은 이경손, 이순석, 이상을 비롯해 유치진(柳致眞), 그리고 영화배우 김용규(金龍圭), 심영(沈影)처럼 남성 문화 예술인들의 직접 운영 체제였다.
그리고 이것이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여성 문화 예술인들로 바뀐다. 그때 등장한 다방 2세대라고(시간적 세대 개념이 아니라 경영체제 변화상의 개념이다) 부를 수 있는 여성들이 193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영화배우 복혜숙(卜惠淑)-'비너스 다방', 영화배우 김연실(金蓮實)-'낙랑다방', 연극배우 강석연(姜石燕)-' 모나리자' 등이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여류 수필가 전숙희(田淑禧), 소설가 손소희(孫素熙) 등도 다방 개업 대열에 합류한다.
인천 역시 '파로마 다방' 문방구점 주인 박정화였고, '낙랑다방' 창업자가 화가 이무영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인천의 경우 여성 문화 예술인들이 1세대의 뒤를 이은 기록은 없다.
이와 같이 남성 예술인에서 여성 예술인으로 경영 주체의 변화는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에 들면서는, 급기야 여성 문화 예술인들도 경영에서 물러나고 대신 자본 투자자인 여주인과 다방 일선을 책임진 마담, 레지 등으로 체제가 확 바뀌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의 다방은 그 전과 달리 지식인 계층의 남자주인 대신에 장삿속이 밝은 여주인이 얼굴 마담과 레지·카운터·주방장 등을 데리고 경영하는 체제로 변모하였으며, 이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그러면서 시내 중심가에서 점차 주변과 외곽 지역으로 확산이 이루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와 있는 구절이다. 이것이 1960년대 들어와 종래와 다른 본격적인 상업 경영의 채비를 차려 나가는 다방의 모습과 손님의 증가로 다방이 점차 비대해지고 수적으로 증가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다방은 이제 "장삿속이 밝은 여주인"이 '다방의 얼굴'이라고 하는, 상시 한복을 입는 얼굴 마담 즉 '가오 마담'을 두고, 미모와 교태를 지닌, 두어 명 차를 나르는 레지 아가씨들로 하여금 내방한 손님들의 대화 상대가 되어 시시콜콜한 시중을 들어 주도록 하는 경영 체제가 된다.
여기서 또 하나 다방의 변화를 말한다면 초창기 다방에는 이헌구가 <보헤미안의 애수의 항구-일다방(一茶房) 보헤미안의 수기>에서 "다방 낭(娘) 또는 다방 아(兒)"라고 지칭했던 대로 차를 나르는 사람은 사내아이였거나 나이 어린 여자애였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것이 이 1950년대를 지나면서 성숙한 여종업원, 레지로 바뀐 것이다.
특히 이런 다방과 식당에서 일하는 고용인들 중에는 미성년인 소년·소녀들이 많아 그들은 법정 노동시간인 5시간의 곱쟁이를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1949년 11월27일자 국도신문에 실린 "서울시내 식당과 다방 대부분이 고용인을 혹사"한다는 제하의 기사 중에 다방 종업원 관련 부분을 발췌한 것으로, 여기서 '다방과 식당에서 일하는 미성년 소년·소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밖에 또 다른 다방 구성원으로는 카운터를 보는 여종업원, 일명 '카운타'와 차를 끓여 내는 주방장이 있었다.
마담이란 호칭은 성 뒤에 붙여 '김 마담' '이 마담' 하는 식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전기(前記) 2세대 다방 때부터 주인을 '매담'으로 부르던 '모던한 뉘앙스'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소설 <아네모네의 마담>의 제목도 그 한 실례이다. 레지 아가씨들은 성 앞에 '미스' 자를 붙여 부르다가 훗날 다방이 쇠퇴해 가는 말기 무렵에는 '미스'를 떼어 내고 반대로 뒤에다 우리말 '양(孃)'을 붙여 불렀다.
현재 2~30대 젊은층 중에는 이 같은 다방 풍정(風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 같다. 이런 유(流)의 옛 다방들은 오늘날 대부분 사라져 아주 희소(稀少)한 데다가 몇 군데 남은 것들조차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시 일우(一隅)로 물러나 앉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다방 대부분이 노인층을 상대하다 보니 매상이 전과 같지 않고 한산해서 더 이상 레지와 주방장을 두지 않은 채 통상 마담 혼자서 1인 3역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다방이 "시내 중심가에서 점차 주변과 외곽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내용처럼 이 시절에 들어 인천에서도 다방이 크게 수적 증가를 이룬 것 같다. 단적인 예가 어린 시절 이사해 살던 남구 숭의동 308번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경인 국도 변에 다방이 생긴 것을 들 수 있다.
이 다방은 이름이 '양지다방'이었는데 이미 1959년에 이 자리에 문을 열었다. 그 무렵 숭의동이라면 인천의 중심가와는 사뭇 떨어진 외곽이었다. 중학생 시절 언뜻 들여다본 바로도 대단한 성업(盛業)을 누린 것 같지는 않으나 꾸준하기는 했었던 것 같다. 주인의 선각적 예지에는 다소 어긋난 듯 싶어도 반세기를 꿋꿋이 버텨 오다가 재작년인가 저재작년인가에 문을 닫았다. 이 다방의 추억이라면 1961년 중학교 2학년 시절 석간신문을 배달하고 돌아서던 때, 진눈개비 속에서 불러 세워 뜨거운 엽차 한 잔을 건네주던 거기 레지 누나의 온정뿐이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에 이르는 시기에 인천의 다방 수효가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시의 중심가인 중구 일대, 특히 신포동, 중앙동, 관동 등지와 인현동 등 동인천역 인근 일대에 수십 군데의 다방이 더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고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1950년대 말,
"용동 다방 거리 '뉴문' 윗집" 운운하는 구절처럼 용동 일대가 "다방 거리"로 불릴 정도였다면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 시기에 여전히 '문화 예술인 다방'을 고집(?)한 업소라면 우문국 화백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유토피아 다방' '항도다방'을 비롯해 '금잔디다방' '미원다방' '은성다방' 그리고 '매란다방' 등이었다. 그 중 '매란다방'은 불행하게도 불과 개업 1년 만에 문을 닫고 만다.
잠간, 여기서 1960년대 다방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넘어 가자. 1960년대 우리 사회의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4·19학생 혁명과 5·16군사쿠데타였다. 특히 5·16은 사회 구석구석을 뒤흔들어 놓았는데 다방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 한 실례가 미군 PX를 통해 불법 유통되는 커피를 뿌리 뽑으려 했던 사건이었다. 민병욱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이 쓴 '그 시절 그 이야기' <6080 다방의 추억>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1961년 5·16쿠데타 직후인 5월29일 전국 다방은 일제히 "오늘부터 커피를 팔지 않습니다"란 게시문을 내걸었다. 외래품 근절을 위한 자발적 움직임처럼 보도됐지만 사실 정부의 강압적 조치였다. 전량을 외국서 수입하거나 미군부대 PX를 통해 불법 유통되는 커피를 아예 뿌리 뽑자는 군부의 조치였던 것이다.
9월부터는 커피 홍차 코코아 레몬주스 등 외래품 일체와 국산과의 혼용도 판금 됐다. 단골들에게만 몰래 커피를 팔던 다방주인들이 치안재판에 회부된다는 등 당국의 위협에 손들고 문을 닫는 곳이 속출했다. 커피 등 외래품 단속은 60년대 내내 지속돼 업자들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포켓 속의 전용다방'이란 광고문과 함께 등장한 00커피 캬라멜이다. 맛이 외국산과 거의 비슷하다는 '인조 커피' 광고도 신문에 심심치 않게 실렸다. 다방에선 커피 대신 콩을 볶은 '콩피'를 내놓기도 했다.
이 짤막한 글을 통해 1960년대 벽두부터 홍역을 치른 다방들의 이야기가 새삼 흥미롭다. 또 한 가지는 '다방 에티켓'에 관한 것이다. 어중이 떠중이들로 해서 다방이 얼마나 부산스럽고 예절이 없었으면 이런 기사를 신문이 다 싣고 있을까 싶다. 1967년 7월4일자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연재물 '몸가짐 백과(百科)' 중의 <다방 에티켓>이란 기사 전문이다.
다방은 잠깐씩 빌어 쓰는 응접실이 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다방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만큼 서로 '에티켓'을 지켜야 한다.
다방에서는 대개 음악소리가 나고 있어 이에 따라 말소리가 커지기 쉬운데 그렇다고 옆의 '박스'에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웃는 일은 삼가야 한다.
차를 얼른 가져 오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지르는 것과 옆의 박스에 있는 다른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은 남의 응접실을 넘겨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이 모두가 다 자신을 천하게 보일 따름이다. 그리고 다방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은 마담이나 레지의 눈총을 맞게 되지만 차 주문을 너무 서두르게 되어도 촌스럽게 보인다.
내용을 보면 다방이 이미 '만인의 응접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꼴불견 사례도 생겨나고, 보다 못한 신문이 '다방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이런 에티켓 쯤은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기사를 내보낸 듯하다. 그러나 그 내용 대부분이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까지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어서 '제 버릇 누구 주랴' 하는 말을 씹어 보게 된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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