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도 인천에의 다방 전래 - 1950년대 말 문화예술인과 다방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1-11-28 22:22:54
문턱 낮은 전시공간무지갯빛 예술혼 피어나
8 항도 인천에의 다방 전래 - 1950년대 말 문화예술인과 다방
▲ 1952년 8월'등대다방'에서 열린 우문국 화백의'인형전시회'.
당시의 인천화단은 동면상태에 있었고 신생동에서 낙랑다방을 경영하던 이무영 씨가 자신의 작품을 다방에 진열하여 상설 화랑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 그만해도 인천에 몇 군데밖에 안 되는 다방 중에서 예술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으로 이곳에서 예술인협회 창립에 대한 의견이 꽃을 피워 드디어 1949년 8월6일 인천 미국공보원 홀에서 결성을 보았다.
이 글은 우문국 화백이 1971년 <월간인천> 4월호에 기고한 '나와 인천예술인협회 시대' 중의 일부분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미 전편에서 언급을 한 것이지만 다시 원문을 옮기는 이유는 기록상 '낙랑다방'이 인천 최초의 문화 예술인들 다방이자 예술 행사를 연 '예술 판'으로 등장한 후, 잇달아 인천의 다방들이 예술인 고객들을 위해 그들이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낙랑다방'은 이 무렵을 마지막으로 예술인들과 더 이상의 관련을 가지지 않은 성싶다. 예술인들의 기록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모던 다방'으로서는 인천의 효시라고 할 수 있었던 '낙랑다방'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이다. 물론 '낙랑다방'은 1950년 초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大衆日報)> 1950년 1월6일자 2면 '신춘다방탐방'란에는 "예술인의 집으로서, 향그러운 커피로서, 왕위를 차지했다 하던 고전파 낙랑!"이라는 한껏 멋 부린 구절과 함께 여전히 이름을 보이기 때문이다.
▲ 인천상륙작전 직후 상륙한 국군이 신포동'유토피아 다방'앞을 지나는 장면. 전쟁의 참화와 고아인 듯한 여아,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적힌 다방 간판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낙랑다방'이 종적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은 6·25가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전쟁 중에 건물이 소실되었거나 주인 이무영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이렇게 추측을 하는 것은 대중일보 기사 이후 이름을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보다 4년 뒤인 1954년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낙랑다방'은 6·25 기간 중에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개인전으로는 8월에 필자의 테라코다 향사인형전(鄕士人形展)이 등대다방에서 열렸다. '나와 인천예술인협회 시대'에서 발췌한 이 문장 속에는 이렇게 '낙랑다방' 대신 '등대다방'이 예술인들의 아지트로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8월은 1952년도 8월이다.
아무튼 '등대다방'은 신포동 19번지 옛 동방극장 지하에 있었던 다방으로 애초 인천 출신 유명 탤런트 최불암(崔佛岩)의 모친인 고 이명숙 여사가 1948년 남편 최철(崔鐵)이 사망하자 이 극장 지하에 '등대뮤직홀' 이라는 음악다방을 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는 1949년 11월쯤이 되는 듯하다.
역시 대중일보는 1950년 1월17일자 지면에 "쥐만 알게 나타난 지 겨우 두 달" 운운하며 '등대다방'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대 뮤직홀'이니 '음악다방'이니 한 것은 근래 아들 되는 최불암이 기자와 대담하는 도중에 나온 말로 실제로는 '등대'가 맞는 명칭이다.
이명숙 여사는 1951년 일사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한 후 서울에 정착하여 1955년부터 서울 명동에 술집 '은성'을 연 것으로 보아, 1952년 8월의 '등대다방'은 이미 다른 사람이 경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우문국 화백이 후일 회고담을 쓰면서 최철에 대해 전혀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의아하다. 참고로 최철은 인천 최초의 영화 제작자로서 <수우>, <여명> 같은 영화 작품을 남긴 사람이다.
이야기 순서로는 전편(前篇)에 실렸어야 했을 것이지만 '낙랑'의 종언과 '등대'의 등장을 이야기하다 이제 밝히게 된다. 앞서 말한 대중일보 '신춘다방탐방' 시리즈에 실렸던 몇몇 다방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여기에 실린 다방들은 적어도 1940년대 후반 즈음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순서대로 "인천각(仁川閣)이 올려다 보이는 그 밑"의 '미락(彌樂)다방'과 1월 8일자에 실린 "1949년 만추(晩秋)부터 1950년에 걸쳐 신예 납인형(蠟人形) 매담 연출로 제작된 신판 미모사" 그리고 '오아시스 다방'과 '고향(故鄕)다방' 순인데 '고향다방'은 1954년 자료에까지도 보인다. 끝으로 '행복다방' '항구다방'이 그 뒤를 잇는다.
휴전 후 인천의 다방들이 모조리 예술인들만을 수용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다방들이 주 고객인 예술인들이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거나 후원자로 나섰던 것을 알 수 있다.
<나와 인천예술인협회 시대>를 보자.
다음해인 1953년은 이렇다 할 행사가 없이 넘어갔다. 이것은 자유예연(自由藝聯)이 분열 반목한 탓이라고 본다. 1954년 초여름 필자와 몇몇 회원들의 주선으로 자유예연으로 갔던 김찬희 씨를 다시 미협 지부장으로 선출하고 분열의 종지부를 찍고 단합된 미협전을 금융조합 이층에서 가졌는데 이때 지금은 서울로 간 여장부 허영렬 양이 출품하여 이채를 끌었고 10월에 한봉덕 유화 개인전이 호반다방에서 열리었다.
어느 사회나 다 같지만 예술인들의 휴식처와 집회 장소는 다방이다. 그들은 오래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철새처럼 이곳저곳으로 옮겨간다. 그동안에 인천미협원들의 지나온 길을 살펴보려면 전시장의 이동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해 10월에 필자의 제1회 유화 개인전을 다방에서 가졌다. 이때를 유토피아 시대라고 할까, 인천문총 회원들은 주로 유토피아 다방에 모였으며 미술전 시화전 등의 행사로 활기를 띠었다.
"어느 사회나 다 같지만 예술인들의 휴식처와 집회 장소는 다방이다. 그들은 오래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철새처럼 이곳저곳으로 옮겨간다. 그 동안에 인천미협원들의 지나온 길을 살펴보려면 전시장의 이동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재미있게 들린다.
다방은 분명 '문화 예술인들의 휴식처이자 집회 장소'이지만 '그들은 언제든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철새처럼 이리저리 이동해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동한 형태를 보면 미협 회원들의 지나온 길을 알 수 있다'는 솔직한 이 글 속에서 당시 문화 예술인들의 행태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 '낙랑'을 거치고 '등대'를 지나 1954년 10월, 우문국 화백은 마침내 "이때를 유토피아 시대"라고 선언한다. 모든 문총 회원들이 신포동 30번지, 유토피아를 아지트로 삼아 미술전, 시화전 등의 행사로 활기를 띠었던 시대이다. 유토피아에서는 인천문학가협회의 시화전이 열리고 각종 미술 전시 행사가 열린다.
더불어 문화 예술인 다방답게 '음악발표연주회(音樂發表演奏會)' 같은 행사의 후원자로도 나선다. 여기에는 '심원(心園)', '용궁(龍宮)' 등 1950년대 중반의 예술인 다방들도 합세한 기록이 있다.
특히 유토피아는 후원 광고를 할 때 "문화인의 집"이라는 문구를 꼭 삽입하고 '토요일 밤에는 음악 감상회'가 열린다는 선전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우문국 화백의 글 중에 보이는 '호반다방'은 1954년도 '인천시 다방요람'에는 이상하게도 이름이 빠져 있다.
7월에 제3회미협전이 시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열리었는데 유화부문에 유희강, 한흥길 씨, 서예에 금성순, 그리고 찬조 출품으로 고의동, 배렴, 배길기, 정우, 일진 여사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유토피아 다방에서는 9월에 유희강, 황추, 우문국의 양화 삼인전과 10월에는 박영성 씨가 유화, 수채화, 크레파스를 가지고 개인전을 열었고 김찬희 씨가 서울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중략>
1958년은 인천미협 회원 간에 화목을 이루어 개인전 또는 그룹전으로 꽃을 피웠다. 6월에 월남 재경 작가 박성환 씨 유화전이 당시 항도백화점 이층인 항도다방에서 첫 테이프를 끊자 7월 같은 장소에서 황영희 양 외 13인의 제1회 소묘전과 역시 7월에 미원다방에서 필자의 제2회 유화전과 김찬희 개인전이 전후해서 열렸고 10월에 한흥길 개인전이 신포동 창고 같은 건물에서 열렸다.
가을에 들면서 구월에 이규선, 조평휘, 이철명, 김종옥 4인의 공고 졸업생 미술전과 11월에 이명구 유화전, 재경작가인 청강 김영기 동양화전이 각기 항도에서 열리고 경인일보 주최로 현대작가 초대전이 호수다방에서 열렸고, 12월에 미협 회원들의 한미친선 미술전을 월미도 미군 써비스 클럽에서 가졌다. 이상과 같이 이해 미술인들은 항도와 미원다방을 오간 것으로 되어있다. <중략>
1959년 3월 김종휘 씨의 수채화전이 항도다방에서 막을 열고 다시 가을에 금잔디다방에서 유화와 수채화를 겸한 개인전을 가져 그의 정력의 도를 보여주었고 이보다 앞선 2월에 금잔디에서 이규선 .이철명 양인의 동서양화전, 그리고 같은 곳에서 이영식 동양화전이 12월에 있었으며 필자의 제3회유화전이 강화문화원 초청으로 5월에 상록수다방에서 있었다. <중략>
이렇듯 5.16혁명전까지는 유토피아, 항도, 금잔디, 미원, 은성다방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역시 우문국 선생의 기록이다. 1950년대 인천 미술계의 연혁을 살필 때, 마치 모든 미술 활동이 다방에서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인천의 다방들이 전시 공간 역할을 톡톡히 했음을 알게 된다.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도 미술 분야만큼은 다방이 이처럼 긴요한 전시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수련으로 검여(劍如) 같은 대가와 기외(其外)의 중견작가가 배출되었다."는 우문국 화백의 말대로라면 당시 다방들을 오늘날의 인천 미술을 있게 한 공로자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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