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도 인천에의 다방 전래- 최초의 모던다방'파로마'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1-11-28 22:11:41
멋쟁이 신사의 찻집'인천의 명동'에 문 열다
6 항도 인천에의 다방 전래 - 최초의 모던다방'파로마'
▲ 인천시 중구 경동 싸리재 네거리'파로마'다방 자리는 후일 상업은행 인천지점(지금은 철거되고 다른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다)이 옮겨 올 만큼 번화했던 거리로'인천의 종로'로 불릴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다.
아쉽게도 인천 초기의 다방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1932년에 일제가 간행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단 두 줄, 그리고 우리 기록으로는 인천의 원로로 의사이자 수필가요, 향토사가였던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간략하나마 전한다. 일제의 기록은 모호하다. 그러나 신 박사의 글은 우리 한국인 손에 의해 생겨난 최초의 모던 다방을 분명히 설명한다.
<인천부사>는 뒤로 미루고, 우선 <개항 후의 인천 풍경>의 내용을 살펴볼 때, 그것이 다방을 주제로 한 대목이 아니라 당시 인천 사회 전반을 훑어가는 과정에서 지나가듯이 언급한 간단하고 피상적인 기록이기는 해도, 인천에 근대식 모던 다방이 탄생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또한 인천 땅에 최초로 생겨난 다방의 태생 연대를 알려 주는 단서로서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학용품은 학교 정문 앞에 자리를 잡은 구멍가게에서 요즘의 편의점처럼 군것질거리와 함께 팔고 있었다. 고급 학용품과 사무용구를 파는 이림상회(二林商會·내동), 희문당(喜文堂·경동), 문운당(文運堂·경동) 등 문방구점이 등장했다. 희문당 주인은 어린이 손님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면서 몹시 친절하기로 유명했고, 문운당 주인은 멋쟁이 신사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역시 멋쟁이답게 싸리재 네거리(후일 상업은행이 있던 자리)에 인천에서 처음으로 '파로마'라는 다방을 열어 인천 사람을 놀라게 했다. 당시 다방이란 서울에도 문화인들이 시작한 '멕시코-종로' '카카듀-관훈동' '낙랑-소공동' 등 몇 군데 안 되는 시기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글에서 제일 먼저 읽어 낼 수 있는 것이 다방 '파로마'의 개업 시기인데, 내용 중에 보이는 '카카듀'가 1927년에, '멕시코 다방'이 1929년에, 그리고 '낙랑'이 1931년에 생겨났음을 볼 때, 파로마의 개업은 아마도 1930년대 초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가 될 것이 틀림없다.
1918년 무렵 대불호텔이 청요리집으로 바뀌면서 그나마 차를 파는 곳, 다방이든 다실이든 공공의 '끽다' 장소가 인천 땅에서 사라진 후 10여 년 후의 '사건'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시기라면 다방 탄생에 관한 한 서울에 비해 그다지 크게 뒤처지지 않는 기록이라고 할 것인데, 당시 서울이 약 30만, 인천이 3만을 넘어서고 있는 인구 비례를 따져 볼 때도 '파로마'의 탄생이 매우 진취적이고 모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당시 세간에서는 문방구점이 '문화 냄새'가 짙게 풍기는 업종으로 치부되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면이 '멋쟁이 신사' 문운당 주인으로 하여금 모던 다방 개업을 심정적으로 자극했는지 모른다. 또 오늘날의 중구 경동, 그 당시 싸리재 네거리 '파로마' 다방 자리는 후일 상업은행 인천지점(근래 철거되고 다른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이 옮겨 올 만큼 번화했던 거리로, '인천의 종로'로 불릴 정도로 지리적 이점이 컸던 조건도 다방 개업을 부추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니까 '파로마'가 탄생한 정황은 서울에서의 다방 탄생과 거의 유사하지 않았나 싶다. 서울의 가장 번화가인 소공동, 관훈동 등에 문화 예술인들이 다방을 개업했듯이, 서울과 비슷한 입지(立地)인 인천의 요지 경동에 문운당 주인 같은 문화 예술인이 다방을 차린다.
거기에 인천 주재 언론사 기자들이나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하던 인텔리 계층, 예술인들, 관공서 직원, 그리고 서울로 통학하던 얼마간의 경인기차통학생들과 그 졸업생 등을 주 고객으로 예상했었을 것이라는 점! 그 당시 이들 인천의 신문기자나 인텔리 문화 예술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故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仁川昔今)>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어 그 같은 추측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더라도 서울에서처럼 해외 유학파들이 득실거리고 있다거나, 또 서울에 비교할 만큼 다수의 문화 예술인들 그룹이 여기저기 포진해 있던 것도 아닌, 고객이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인천이라는 여건 속에서 근대적 모던 다방이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이채롭다.
여기서 '파로마'를 언급한 또 하나의 책으로 1968년에 발간된, 의사이자 초기 인천 사진 예술계의 중추였던 사진작가 이종화(李宗和) 선생의 저서 <인천사진문화사(仁川寫眞文化史)>를 살펴보자. 물론 그것이 인천 최초의 다방인 박정화의 '파로마'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리고 그 기록이라는 것이 실상 당시 사진작가들의 회합 장소로 겨우 이름 한 번 나오고 마는 매우 소략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만으로 사진 서클이 조직된 것은 1946년 5월이었다. 인천시내 파로마 다방에서 첫 회합을 가지고 제물포사진동지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전부인데, 앞서 말한 대로 여기 나오는 '파로마' 다방이 문운당의 '신사' 박정화가 개업한 그 '파로마' 다방이 확실하다면, 1946년 5월까지는 존속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방으로서 최소한 수명을 십 년 이상 넘긴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만약 이종화 선생이 "인천시내"라는 불명확한 표현이 아니라 동명(洞名)을 붙여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책을 출간한 때가 1968년 12월이니 이미 20년 이상의 시간적 상거(相距)가 생긴 셈이고, 그래서 선생의 기억이 희미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천의 근대 다방의 역사를 짚어 보다 보니 좀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신태범 박사보다 9년이나 연배이고, 또 1920년대 이후부터 광복 전후의 시기까지 인천 사회 각 분야에 대해 실로 다양한 글을 저서 <인천석금>에 남긴 고일 선생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파로마' 다방에 관해서는 단 한 줄의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책 중에는 당시 문방구점들을 설명하고 있는 <인천의 옛 저자거리와 점포> 편이 있는데, 유독 다방 '파로마'를 개업한 문운당만은 제외한 채 다른 문방구점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지나치게 앞서 나아가 추측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신 박사가 '멋쟁이 신사'라고 평한 박정화와 저자 고일 선생이 피차 무슨 불편한 관계에 있었거나 아니면 글로 기록 못할 다른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이 두 글 외에 다방 '파로마'에 대해서 쓴 어떤 기록도 현재까지 확인할 수가 없다는 점을 고백한다. 하다 못해 한두 마디 흘러 다니는 구전(口傳)조차도 들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하기야 웬만큼 긴요하지 않았다면 당시 누가 다방에 대해 일없이 무슨 기록을 남기고, 무슨 이야기를 전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파로마' 다방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파로마'의 원명만은 스페인어 'Paloma'로서 1830년대에 작곡된 노래 '라 팔로마(La Paloma)'에서 연유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본다. '라 팔로마'는 '쿠바의 아바나 항구를 떠나는 배에 실린 비둘기를 통해 자신의 순정을 보내는 한 남자의 구구절절한 연정(戀情)을 표현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모르기는 해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항도 인천 최초의 다방을 'Paloma'로 작명(作名)한 이 '신사' 스스로 심중에 두었던 '연정과 낭만'이 지금도 가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이 인천 모던 다방의 선구(先驅)는 어떤 식으로 생겨나 또 어떤 식으로 퇴장했을까. 저간의 사정이 궁금해도 이제는 당시를 여쭈고 자문을 들을 고로(古老)조차 한 분 계시지를 않다. 이제 이번 편의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서두에서 미루어 두었던 <인천부사(仁川府史)>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자.
이 책은 1933년 개항 50년을 맞아 일제가 한껏 자랑해 만든 인천 백서(白書)이자 역사책인데 다방에 관해서는 기록이 아주 간단해서 제 13편 제2장 제3절 <여관 및 요리점> 항목에 용리(중구 용동)의 '소성(邵城)다방'과 중정(관동 2가)의 '예기(藝妓)다방' 두 군데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소성다방'은 '조선인 대상'이라고 적고 있고, '예기다방'에 대해서는 대뜸 "요즈음 신시대의 산물인 카페의 출현은 다른 도시와 같은 현상으로 상당한 기세로 증가하여 바로 21곳이 생겨났다."고 앞뒤 없이 기술하고 있다.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소성다방'은 누가, 언제 개업했으며, 과연 이것이 '파로마'와 같은 근대식 다방이었는지, 또 '예기다방'은 정통 다방이 맞는지, 다방이었다가 그 무렵 유행을 타 카페 형태로 전향한 것인지, 또 21곳이나 생겼다고 하는데 과연 인천 어디에 그렇게 많은 카페가 생겨 영업을 했는지, 자못 의아스러운 구석이 많다. 이 모두 사회 풍속사 측면에서 연구가 있어야 하리라는 생각이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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