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도 인천에의 다방 전래 - 8·15광복과 6·25한국전쟁 시기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1-11-28 22:18:14
격변기 지나 낭만으로의 회귀
항도 인천에의 다방 전래 - 8·15광복과 6·25한국전쟁 시기
▲ 1930년대 서울 소공동에 있었던 건축가 이순석의 다방'낙랑파라'전경. 1층은 다방, 2층은 화실로 운영했다. 내부에는 꼽추화가 구본웅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바깥 장식은 이상이 설계했다.
▲ '낙랑파라'에서 찍은 사진. 맨앞 안경을 쓴 사람이 안익태의 형인 음악가 안익조, 그 옆이 이순석이다./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소설가 이상(李箱)이 다방 '제비'를 개업하던 1933년을 전후해 서울에는 영화 연극인, 화가, 음악가, 문인 등에 의해 수많은 다방이 생겨나고 이 다방들은 각자 특색을 자랑하며 이른바 '다방 문화'를 꽃피운다. 이 시기는 '문화 다방 전성기'라고 할 정도로 러시아풍이니, 불란서풍이니, 또는 독일풍이니 하는 특색 다방들이 유행했고,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장소로서 음악 감상 전문 다방이나 또는 매주 정규 음악회를 개최하는 다방 등이 생겨나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8·15광복과 6·25한국전쟁 같은 사회 격변을 거치면서 다방들이 가지고 있던 종래의 문화적인 멋은 점차 사라지고 상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고 다방의 문화 공간적 성격이 일시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많은 문화 시설이 파괴되면서 일부 다방은 오히려 문화 활동의 장으로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 같은 당시 상황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8·15광복과 6·25전쟁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앞서의 멋은 점차 사라지고 상업 다방으로 변화하는데, 6·25전쟁 직후 전쟁으로 문화 시설이 부족해지자 다방이 차를 마시고 쉬는 장소에서 더 나아가 종합 예술의 장소 구실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문화 활동은 다양하여 그림 전시회·문학의 밤·영화의 밤·출판기념회·환영회·송별회·추모회·동창회·강습회 등이 다방에서 열렸다.
또 한편, 광복과 6·25는 우리 사회에 다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하는 기폭제 구실도 했다.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일제 말 전쟁 분위기로 인해 위축되었던 사회 전체가 광복을 통해 활기와 희망을 찾으면서 1930년대의 낭만적인 분위기로의 회귀가 곧 다방 재건으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6·25라는 극한적인 절망과 허무를 딛고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의 삶을 확인하고 위안(慰安)하는 심리적 장소로서 다방업의 폭발적인 신장을 조장했을 것이다.
통계에서 보듯 1944년 60곳이던 서울의 다방이 1955년에는 무려 5배에 가까운 286곳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1953년 7월24일자 동아일보는 "1·4 후퇴 당시 59곳이었던 다방은 그 해 말에는 78곳, 1952년 말에는 99곳, 지난 6월 말 현재 무허가를 합쳐서 배가 넘는 123곳, 곧 64곳의 증가를 보여 '늘어난 것은 다방뿐'이라는 말까지 생겼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 대도시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6·25 이후에는 피란민, 이주민들이 도시로 집중함으로써 거대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개인 생활의 변화와 함께 교제 범위의 증가가 다방 수요를 늘렸을 것이다. 또 한편 많은 인구가 뒤엉켜 사는 도시 생활의 극심한 피로와 고달픔을 위로하는 휴식의 장소로서도 다방이 각광을 받았을 것이다.
다시 광복 이후의 인천으로 돌아가자. 1930년대 초반을 멀리 지나지 않아 '파로마' 다방이 인천에 탄생한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기간 동안, 인천의 다방에 관련한 기록은 거의 없다. 몇몇 다방의 이름이 <인천시사>에 보이기는 하지만, 달랑 이름만 등장할 뿐으로 위치나 분위기, 소유주 같은 다방 전반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 인천 신포동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인 다방이었던 국제다방의 내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는 듯 비어 있다.
1940년대 초 암울하던 식민지시대 말기, 더구나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던 시절 이들 화가들은 이무영(李茂榮)이 경영하던 '낙랑다방'을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이 다방은 전시장도 겸했다고 전해진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2월 최초의 순수 미술인 단체로 인천미술인 동인회라는 그룹이 탄생되었다. '세루팡'이라는 다방에서 모임을 가진 창립 동인은 이건영(李建英), 최석재(崔錫在), 김순배(金舜培), 김찬희(金燦熙) 등이며 임직순(任直淳), 김기택(金基澤) 등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이 두 다방 이름이 등장하는 시사(市史)의 기록이다. 예술인들의 '활동에만' 초점을 맞춘 까닭에 다방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낙랑'의 주인인 화가 이무영도 서울의 경우처럼 자신이 직접 다방을 경영했다는 점이다. '낙랑(樂浪)'이란 이름도 건축가 이순석(李順石)의 '낙랑파라'를 본뜬 듯하며, 다방 성격도 그와 비슷해 인천 미술인들의 문화 공간, 문화 아지트 역할을 했고, 결국 인천예술인협회 조직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나와 문총시절을 말하기 전에 인천예술인협회를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인 줄 안다. 왜냐하면 예협은 문총의 모체가 되었고 해방 후 인천에서 처음으로 문화예술인을 집결시켰던 단체였고 예협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48년 당시 신포동에 양화가 이무영(李茂榮)씨가 경영하던 낙랑다방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인천에 다방이라고는 몇 군데 안 되었고 다방 낙랑은 일명 화랑다방으로도 불리었다.
다방의 흰 벽에는 이 씨의 작품과 친구의 작품이 늘 전시되어 있었고 은은히 흘러나오는 고전음악은 문화인들의 조용한 휴식처로 알맞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인천 사정에 어두웠던 나는 이경성(李慶成), 현송(玄松), 조수일(趙守逸) 씨 등을 통해 이 다방에서 새로운 교우 범위를 넓혀 나갔다. <중략>
낙랑(樂浪)다방에 모이던 우리들은 흩어져 있는 인천의 예술인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인천예술인협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우선 내가 발기인 조직에 나서기로 했다.
위의 인용문은 1946년 상해에서 귀국한 고 고여(古如) 우문국(禹文國) 선생이 인천에 정착하면서 문화 예술계에 투신한 뒤의 행적을 기록한 회고기 <나와 문총 시절>의 일부분인데, '낙랑다방'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고여 선생이 인천문총을 결성하기에 앞서 그 모체인 인천예술인협회 조직을 위해 '낙랑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내용과 함께 다방에 대한 몇 가지 중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즉 이 다방의 별명이 '화랑다방'이었다는 것과 특히 벽에 그림을 전시하고 고전음악을 틀었던 것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영락없는 1930년대 유행한 서울의 모던 다방 풍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대략 1940년 전후해서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이무영의 '낙랑다방'은 '파로마'의 뒤를 이은 또 하나 인천 모던 다방의 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랑다방'은 곧이어 기록에서 사라지고 전쟁 중인 1952년 무렵에는 신포동 옛 동방극장 지하의 '등대다방'이 문총 회원들의 주 회합 장소로 등장한다.
그 다음, 틀림없는 일본식 발음일 성싶은 다방 '세루팡'은 오직 이름뿐으로 그 외의 사항은 전혀 기록이 없다. 그밖에는 전편에서 언급한 예의 제물포사진동지회 결성이 1946년 5월 '파로마' 다방에서 있었다는 기록으로 한 번 더 '파로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 해방 공간 인천의 다방 풍경은 더 이상 확인할 길이 없는 채 6·25를 맞는다.
1950년대 초, 6·25전쟁 3년간의 기록은 더더구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1951년 12월 하순 무렵, 인천의 한 다방 풍경을 당시 자유신문이 <외상에 녹는 다방>이라는 제하에 씁쓸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인천의 유일한 다방 밀림(密林)에서는 쌓이고 쌓여진 외상값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달픈 몸을 식후에 다방 소파에 싸여 지내자는 것이 소위 신사숙녀의 미워하지 못할 심정이지만 그래도 찻값쯤은 준비하는 것이 신사 체면도 되겠는데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 군복 입은 정체 모를 문관과 군속들 족속이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해 더 한심하다고 주인 마담이 비명을 올리고 있다.
기사 첫 머리 "인천의 유일한 다방"이라는 표현이 좀 갸우뚱하게 하지만, 전쟁 중이어서 아마 다른 다방들은 다 폐업한 채였고 이 다방만 홀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기자가 '유일한'으로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밀림다방' 기사를 읽으며 문득 1950년대 중반 어린 시절 외갓집 상점에서 종종 보았던 이 비슷한 전시(戰時)의 혼란과 무질서를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이 다방이 언제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지금은 고증(考證)하는 사람이 없다.
전쟁 중이나 그 직후의 다방들은 사회로부터 고등실업자, 즉 룸펜의 집합소라는 부정적인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 속에서도 다방은 무수한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사교 장소로, 또 삶의 정보를 교환하는 시장으로, 또 한편 휴식의 공간으로, 한걸음 더 바짝 서민 생활에 밀착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곧 '시대의 불안과 생활의 과로가 너 나를 불문하고 다방' 구석으로 끌어들였다는 말로 풀이될 것인가.
참고로 휴전 이듬해인 1954년도 인천의 다방 현황을 살펴본다. 이 자료는 1955년에 발간된 <인천연감>의 기록이다.
여심(餘心) 중앙동 23, 춘원(春園) 신포동 30, 향악(香樂) 중앙동 4가 1, 청파(淸波) 인현동 23, 유토피아 신포동 30, 르네상스 신포동 26, 호수(湖水) 관동 3가 5, 칼멘 신포동 26, 고향(故鄕) 신포동 26, 청탑(靑塔) 신포동 19, 캐러밴 내동(번지 불명), 장안(長安) 인현동 1, 소원(笑園) 용동 120, 등대(燈臺) 신포동 19, 서울 용동 14, 월광(月光) 인현동 24, 용궁(龍宮) 인현동 74, 소라 중앙동 4가 1, 대지(大地) 경동 238, 심원(心園) 중앙동 4가 6, 목연(牧燕) 인현동 76, 희망(希望) 신포동 17, 담담(淡淡) 용동 239.
이상이 당시 인구 26만 6천여 명의 인천에 소재한 전체 다방이다. 혹 누락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허가 다방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당시 인천의 중심지답게 총 23개 업소가 모조리 중구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포동은 '다방 거리'라고 부를 정도로 8개의 다방이 모여 있어 당시의 번화(繁華)를 짐작하게 한다. 더불어 '파로마'나 '낙랑' '세루팡' 같은 다방 이름은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음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차호(次號)에서는 휴전 이후 다방을 무대로 해 펼쳐졌던 인천 예술인들의 활동상을 찾아가 보자.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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