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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문화공간·문학현장으로서의 다방   

by 형과니 2023. 6. 22.

문화공간·문학현장으로서의 다방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1-11-21 10:55:22

 

낭송·미술전시장 넘어'소설 배경'으로

프롤로그 4 - 문화공간·문학현장으로서의 다방     

 

 

인천시 중구 경동'학다방'입구.

 

1930년대 '다방은 모더니즘을 경험하고 흡수하는 창구요, 또 문화 예술인들이 자기들끼리의 사색과 담소를 즐기면서 예술가적 자각을 갖게 하는 아지트였다'는 말을 앞에서 했다. 또 한 편 다방을 무가치하고 순전한 유희의 공간으로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는 장소로 폄하하는 태도도 설명한 바 있다. 이 같은 두 개의 상반된 시각은 역시 앞에서 언급한 대로 샐러리맨이나 상인, 공무원 등이 출입하는 '차를 파는 다방'이 아니라 소위 문화 예술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의 경우였다.

 

문화 예술인 입장에서 본다면 근래에도 이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서로 대립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처럼 다방이 '모던'의 창구가 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문화 예술인으로서 다방 취미, 다방 풍류'를 높이 여기는 부류가 있었고, 또 동시에 다방의 폐해를 들어 배척하는 일단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더라도 당시 다방은 문화 예술 분야에 커다란 사회적 공헌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양반집이나 부자들의 사랑채를 제외하고는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교류, 접견이 용이치 않게 되어 있던 우리의 생활 구조에서 다방은 유일한 만인 공통의 응접실 구실, 곧 이헌구(李軒求)"이른바 다방 취미, 다방 풍류란 일종 현대인의 향락적 사교 장소라는 대 공통 존재 이유가 있은 것"이란 의미에서의 '공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장소' 구실을 맡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곧 문학 단체나 문학 그룹의 탄생을 자극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건축가 이순석이 운영하던 다방 '낙랑파라'에 해외문학파 멤버들이주로 모였던 것도 그 비슷한 예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1930년대 다방들이 화가들의 미술전시장이나 시인들의 시집 출판기념회장 등 문화 공간으로 발전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공통적 다방 취미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다방의 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간편한 독서실처럼 문고(文庫) 설치나 잡지 비치를 통해 문인, 화가들의 여가와 지식 욕구에 부응했다는 사실이다.

 

 

인천시 중구 경동'학다방'내부.

 

1930년대 다방은 예술인들의 문화공간이었다. 시화전, 사진전 등이 열리곤 했으며 문고, 잡지 등을 비치해 이들의 여가와 지식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도 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당시 다방의 마담들이 자신들의 다방이 그와 같이 문화 공간으로 제공되는 것을 "자랑할 역사"로 여겼다는 점이다. 애초 문화 예술인들에 의해, 문화 예술인들을 위해 태생한 공간으로서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와는 얼마간의 변화가 있기는 했어도, 또 인천에만 그랬던 것은 아니라 해도, 이 같은 문화 공간으로서의 다방의 전통 역시도 고스란히 전해 내려와 1980년대 중반까지 시내 몇 군데 다방에서 미술전시회나 시화전, 사진전이 열리곤 했던 것이다. 문득 1970년대 말 무렵인가, 가을 이맘때였는데 중구 신포동 은성다방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잔뜩 목멘 소리로 시를 낭송했던 우스운 기억이 난다.

 

다시 그 당시 다방들이 문화 예술 공간으로서 어떤 식으로 역할을 했었는지 살펴보자. 대강의 것이지만 193612월호 <삼천리> 잡지에 실린 대담 기사 '끽다점 연애풍경' 속에 그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다.

 

 

다방'플라타느'에서 열리는 목판소품 전시회 기사(1934825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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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여러분의 홀에서 문사들의 집회와 화가들의 전람회를 한 적이 많았을 터인데요.

복혜숙(卜惠淑·이하 복) : 각 극장과 음악회의 포스터는 늘 걸지만 큰 집회는 그리 많지 못했어요.

김연실(金蓮實·이하 김) : 낙랑(樂浪)에선 많았지요. 언젠가 '시성(詩聖) 괴테 백년 기념제'30여 인의 문사가 모여 하였고 안석영(安夕影) 씨의 '춘풍영화(春風映畵)' 축하회도 우리 곳에서 하였고 그밖에도 시인들의 시집 출판기념회도 가끔 하였지요. 전람회는 언젠가 화가 구본웅(具本雄)씨의 개인전을 한 번 했고 기억은 다 못하겠지만 퍽이나 여러 번 했어요. 더구나 제국대학(帝國大學) 학생 그룹의 만돌린 회 같은 것은 가끔 있지요.

강석연(姜石燕·이하 강) : 우리 홀은 시작한 지 며칠 안 되어서 아직 '그러한 자랑할 역사'가 없어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온갖 편의를 다 봐 드리어 될수록 시인 묵객의 집회 장소로 제공코자 해요.

기자 : 외국서는 살롱 문화가 발달됐다는데 여기서도 자꾸 문화층(文化層)의 발()과 눈()을 여기 모이도록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걸요. <중략>

기자 : 비치해 놓은 문고는 대개 어떤 것이지요?

: 지금은 동아, 중앙이 없어졌으니 조선, <매신(每申)과 대판(大阪), 매일(每日), 조일(朝日)을 신문으로 갖다 놓았고 잡지로는 삼천리, 조광, 여성(女性) 등이지요. 그리고 영화잡지도.

: 대개 그렇지요. 스크린 같은 외국 영화잡지들을 좋아해요. '낙랑문고(樂浪文庫)'를 앞으로 더욱 확장코자 합니다.

: 대개 그렇지요. 어느 끽다점이나 다 마찬가지지요. 10, 20분 앉아 있는 짧은 시간에 되도록 머리를 평안히 쉬이고 그리고 눈을 살지게 하자니 자연히 호화롭고 경쾌한 독물(讀物)이 필요하게 되니까요.

 

다방은 이처럼 예술인의 안식처이자 창작 공방이면서 동시에 문화 예술 행사를 위한 장소 구실을 했다. 그러면서 '다방 공간' 자체가 직접 문학 작품의 대상이 되거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다방을 작품 속에 끌어들인 대표적인 작가가 박태원(朴泰遠)일 것이다. 그는 1933<피로> 1934년 중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애욕>,<방란장 주인> 등 다방을 무대로 한 소설 작품들을 발표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저본(底本)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 <피로>는 소설가인 주인공 ''가 다방 '낙랑'에 들어가 소설을 쓰려다가 옆자리의 문학 청년들이 조선 문단의 침체와 문인을 도매금으로 비난하는 소리를듣고 글쓰기를 포기한 채 거리로 나와 도시를 배회하다가 다시 다방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다방'본아미'에서 열리는 화가 구본웅 개인전 기사(19331119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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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생에 피로한 몸을 이끌고 이 안으로 들어와 2×2척의 등탁자를 하나씩 점령하였다. 열다섯 먹은 '노마'는 그 틈으로 다니며, 그들의 주문(注文)을 들었다. 그들에게는 '위안''안식'이 필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어린 노마에게 구한 것은 한 잔의 '홍차'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그리고 '축음기 예술'에 귀를 기울였다. 이 다방이 가지고 있는 레코드의 수량은 풍부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결코 그 '250'라는 수효에 있지 않았고 오직 한 장의 엘레지에 있었다. 엔리코 카루소의 성대(聲帶)만이 창조할 수 있는 '예술'을 사랑하는 점에 있어서, 나는 아무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내가 일곱 시간 이상을 그 곳에 있었을 때, 분명히 12번 이상 들었던 엘레지는, 역시 피로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작품 <피로>는 이렇게 다방을 무대로 해서 당시 문화 예술인, 지식인들이 느끼던 '정신적 피로'와 함께 '홍차', '리코드', '카르소' 등 그들이 누리던 모던 풍조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1936년도 발표작 주요섭(朱耀燮)<아네모네의 마담> 역시 대표적인 '다방 소설'이라고 할 것이다.

 

교수 부인을 사랑한 전문 학생이 아네모네 다방에 들러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악>을 청해 들으면서 카운터에 앉은 마담 영숙을 '언제나 무엇을 열망한 듯한, 열정에 타고 넘치는 그 눈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영숙은 전신이 수줍음에 휩싸이는 듯싶다가 차츰 야릇한 흥분과 만족감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숙은 귀고리를 다는 등 몸치장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이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다. 후에 동행했던 친구가 찾아와 그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바람에 영숙은 그때까지의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학생은 교수 부인을 열렬히 사랑했는데, 그 부인이 건강이 위독하여 장기 입원을 하고 있는데도 병문안조차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학생과 교수 부인 사이에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악>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깔려 있었던 데다가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가 꼭 교수 부인의 이미지라고 생각한 학생은 슈베르트를 들으며 아네모네 다방 카운터, 바로 영숙이가 서 있는 뒷벽의 모나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으로 비련의 심정을 삭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다 듣고 난 영숙은 이제 더 이상 귀고리를 하지 않는다. 전혀 방향이 엇갈린 이 기막힌 사랑의 소설은 이렇게 씁쓸하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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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밤. 찻집 아네모네에서는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재즈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 안 공기는 어느새 담배 연기로 안개 낀 것처럼 자욱해 있었다.

 

", 그런데 이 마담이 웬 변덕이 그렇게 많단 말이야? , 어저께 귀걸이를 새로 낀 것이 썩 어울린다구 야단들이기에 한 번 볼려구 일부러 왔는데 그 귀걸인 어쨌소 그래?"하고 어떤 사나이가 말했다. 영숙이는 아무 대답도 없이 빙그레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구슬프고 고적한 기분을 띤 웃음이었다.

 

이밖에도 대표적인 소설 작품으로 1955년 발표된 김동리(金東里)<밀다원시대>와 역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김용익(金龍益)1956년도 발표작 <겨울의 사랑>이 있다.

 

<밀다원시대>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가 '밀다원'이라는 다방에 드나들던 문인들을 모델로 하여 그 시대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한 소설이고, <겨울의 사랑>은 겨울 동안 방한용 마스크를 쓴 채 '푸른 돛' 다방 레지 지안을 사랑한, 언청이 몽치의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곧 봄이 오면 방한용 마스크를 벗어야 하는 몽치는 수술비 마련을 위해 미군부대 철조망을 넘어 타이어를 훔치다 총에 맞는 것으로 끝이 나는 다방 배경의 대표 작품이다.

 

한 마디로 다방은 인텔리들에게 번잡한 세속도시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별건곤(別乾坤)이자 휴게소요 안식처이면서 모더니즘을 경험하고 흡수하는 창구로, 또 인텔리 예술인들이 예술가적 자각을 갖게 하는 아지트, 활동 장소, 그리고 우리 소설문학의 한 산실이 되어 오늘에까지 유전되어 오는 것이다.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