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 Ⅲ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1-24 20:46:58
이제는 사라진 추억 아지트 거기, 청춘이 있었다
12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 Ⅲ
▲ 과거 인천의 다방은 갤러리 역할도 함께 했다. 많은 작가들이 다방에 모여 예술을 논하며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경기다방'내부. /김효선 촬영
앞 장 말미에서 '은성다방'에서 생긴 특별한 가연(佳緣)을 얼핏 이야기했는데 말이 난 김에 그 반대의사사로운 이야기도 하고 넘어가자. 그것은 약속 시간에 늦어 생긴 비극이다. "8분이 지나고 9분이 와요. 10분만 있으면 나는 가요" 펄 시스터즈가 부른 노래 구절처럼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타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S의 "오빠, 술 취해서 지난주에 여기서 만나기로 한 약속 잊었나 봐요. 오빠가 말한 사진 한 장 두고 가요. 이쁘지는 않지만 가져 가셔서 보여 주세요. 놀림 받지 않게요"라고 적힌 메모와 S의 사진 한 장을 레지 C로부터 전해 받아야 했던 가슴 저린 추억을 가진 사람도 있는 것이다.
1971년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고, 귀대 날짜를 이틀 남기고였을 것이다. 서울 성북동에서 헐레벌떡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시간은 상당히 지나 있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S는 활짝 핀 코스모스 무더기 앞에서 흑백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1년여 후 제대를 했을 때, S가 결혼을 하고 먼 타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약속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지난주'의 약속이란 그날 은성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 동창과 S가 동성(同姓)이어 자연스럽게 셋이 어울려 술을 마신 끝에 한 약속이었다. "오빠, 그럼 내 사진이라도 한 장 드릴게요. 가기 전전날 이리로 와요." 술이 취해 S가 태워주는 택시를 타고 동창과 나는 숭의동 목욕탕 집에서 그날 밤을 기숙한 뒤 헤어졌다. 술 때문에 S는 내가 약속을 잊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동창은 몰락한 가세(家勢)를 비관해 그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S는 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고 C는 한 동안 '무도회의 권유'나 '허밍 코러스'를 틀지 않았었다. 이 모든 일들을 P는 아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은성에서는 자주 전시회가 열렸다. 주로 그림 전시회와 시화전이었다. 주인 김 여사의 큰 이해(理解)가 있었을 것이고, 정감 있는 다방의 분위기가 이런 예술 행사를 부추겼을 것이다. 그 무렵 시내에 이렇다 할 전시장이 없는 까닭에 대부분의 전시가 다방에서 열렸던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전시회를 허락하는 것은 여간한 결심이 아니었다. 다방 전시회는 주인에게 그다지 크게 이바지되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시회가 열리는 기간, 대체로 1주일간은 '주최 측 측근이나 관계자'들은 드문드문 커피를 걸러도 좋은 무상출입이 가능했고, 아침 일찍 '한 잔'을 들고 나면 종일토록 들락거리면서도 더 이상 추가 주문없이 '엽차'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시회를 보려는 관객, 즉 새 손님이 눈에 띄게 늘어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주인으로서는 큰 매상도 없이 소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이따금 주최 측에 망외(望外)의 큰 소득이 있을 경우(어쩌다 넉넉한 가격으로 그림이 팔리는 경우 등) 카운터에 얼마간 '풍족한' 찻값이 돌아갔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아주 드물었다. 해서 앞에서 김 여사의 '큰 이해'라는 말을 쓴 것이다.
연전에 끝내 화가 지망생으로 생을 마감한 친구 K의 개인전을 회상하면서 시내 어느 문화원이 내는 잡지에 기고했던 글이다. 그가 전시회를 가진 것은 1967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딴에는 당시 미술 전시회나 시화전을 흔쾌히 허락했던, 그러면서 '은성다방'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고충'을 나름대로 적어 본 것이다. 실제 전시회 전문이었던 '은성다방' 외에도 몇몇 다방이 썩 이문(利文)이 남지 않는 이런 '장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사계에 관록이 있고, 정평을 얻은 시인, 작가, 화가에 한한 것이었다. 그런데 K를, 이 애송이 무명 화가를, 김 여사는 선선히 대접해 준 것이다. 그것은 역시 최승렬 선생이나 최병구 시인의 보증(保證) 덕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화실 '아틀리에 영'을 운영하던 김태영 선배의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방을 유수한 선배 화가나 시인들처럼 선뜻 전시회 장소로 허락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9월 하순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회는 오늘날과는 달리 오프닝 세리모니 없이 월요일부터 시작했다. 그 일주일 동안 학교 강의가 끝나는 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차를 타고 내려와 '은성다방'으로 달렸다. 출입문 옆의 6인석이 전시회를 주관하는 본부였다. 어설픈 팸플릿과 방명록으로 쓰는 스케치북 한 권, 잡지, 신문 따위가 얹힌 테이블에 자못 숙연한 예술가들의 표정으로 앉았었다.
그러나 그 일주일 내내 관객의 수효는 고작 스물이나 서른이었을까. 벽에 걸린 작풍을 하나하나 뚫어지게 보던 두 명의 젊은 여자 외에는 누구도 썩 관심 있게 들여다보아 주지 않았다. 김 여사도 C와 P도 속으로는 여간 안타까웠을 터이지만, 일주일은 그렇게 흐르고 말았다. 고독과 가난과 방향 없는 열정을 어쩌지 못하던 청춘 시절의, '은성다방'에 얽힌 그립고 그리운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면서 신포동 일대에 독특한 일화를 많이 남긴 화가 J화백의 개인전 뒷이야기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전시회가 우문국 선생이나 서예를 하시던 김인홍(金麟弘) 선생, 심창화(沈昌化) 선생의 발길을 한동안 '은성다방'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덩달아 고촌(古邨)이나 그 일단까지도 '은성다방'을 외면했던 일이 있다. '은성다방'뿐이 아니라 아예 '백항아리집'까지도 멀리했던 사건이었다.
1980년대도 중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J화백의 전시회에 한 여인이 와 있었다. 그다지 미모는 아니었지만 이 계통의 '여류(女流)'는 빤해서 누가 누구인지 다 아는 판인데, 전혀 낯선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J화백의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앉아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여인에 대해 어렴풋이 종교 관련 이야기가 있었던 듯도 한데 지금 기억에 분명하지는 않다. 그것이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는 투였을 것이다.
아무튼 하객들은 모두 J화백의 가정사로 미루어 그럴 수 있다고 우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시종 투정 비슷하게 언사를 부려 잔치 분위기를 자꾸 어둡게 하던 시인 R씨가 어느 결에 여인을 나꾸어 자기 옆에 앉힌 것이다. 그날은 그것이 눈에 거슬려서들 일찍 다방 문을 나서 백항아리로 갔는데, 그 얼마 후 여인과 R시인 사이의 해괴한 후일담이 들려왔던 것이다.
더구나 그 무대가 R시인의 집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목격하지도 않았고, 진위를 확인하지도 않았으나, 심지어 '처용가(處容歌)' 운운하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것이다. J화백은 졸지에 여인을 잃었고, 우문국 선생, 김인홍 선생 등은 장탄식 끝에 그 길로 '은성다방'을 떠나 얼마 동안 창영동 철도 차단기 옆의, 허름하기는 했어도 메밀묵과 막걸리가 좋았던 대폿집으로 아지트를 옮겼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은성다방' 대신에 저녁이면 고 손설향 시인과 역시 일찍 돌아간 선배 동양화가 고촌과 부천시에서 표구점을 하는 선배와 지금은 강화로 가서 사는 서양화가 홍윤표(洪潤杓), 외환은행에 다니던 김학균(金學均) 등등과 어울렸다. 모두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찻값과 술값을 이중으로 쓰기가 버거웠다. 이당기념관(以堂紀念館)을 지키던 이정(以汀) 화백과 만난 것도 이 무렵 '은성'에서였다.
후일 그의 전시회 도록에 '학이 지키는 마을'이라는 해설 아닌 감상문을 '은성다방' 창가에서 쓰기도 했다. 고맙게도 '은성다방'의 찻값과 백항아리의 약주 값은 주로 이정이 냈고, 미미집의 대폿값은 김학균이 자주 냈다. 어쩐 일인지 아동작가 김구연(金丘衍) 선배나 조우성(趙宇星), 정승렬(丁承烈) 시인등과는 은성에서 차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다. 조우성은 술을 못하는 체질인데도 저녁이면 미미집에 나와 박주(薄酒)에 객쩍은 방담을 잘도 참고 들어주었다.
'은성 30년'을 돌아보면 불현듯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제는 다방의 흔적도 없고 또 여기서 뵙던 어른, 선배, 문인, 화가들 대부분이 다 타계하셨다. 겨우 선배 몇 분, 또래 몇이 남았을 뿐이다. 젊은 한때 그렇게도 드나들던 내 집 같았던 곳! 고향 같았던 은성에 황혼이 온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러니까 1950년대 말부터 이때까지가 '은성다방'이 인천의 예술 행사 현장으로서 말 그대로 '문예를 중흥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시기'인 셈이다. 먼저 앞에서 시기 구분을 위해 1960년대 초반의 행사는 우문국 화백의 글을 인용해 언급한 바 있지만 실제 그 이후에도 수많은 문화 예술 행사가 이곳에서 펼쳐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면서는 더 이상 '은성다방'이 전에처럼 인천의 문화 예술의 장소로 활발하게 이용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재래 다방들이 쇠퇴하기 시작한 이유도 있지만, '은성다방' 1세대들 중에는 인천을 떠나 서울 등지 타 지방으로 이주한 분, 연령적으로 고령에 이르러 활동이 미미해진 분이나 아예 활동을 접은 분들이 상당수 생겼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 시기에는 시내에 몇 군데 화랑 같은 전시장이 등장한 데다가 공보관이나 예총, 문화센터등의 전시장과 갤러리를 겸한 다방의 등장 등 각종 문화 예술 활동을 펼 수 있는 무대가 생기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중구 송학동, 성공회로 올라가는 경사 길 왼편에 있던 이당기념관(以堂記念館), 그리고 신생동 공보관, 가톨릭회관 지하 '성지다방' '고전다방' '이집트 다방' 그리고 1980년대 초에 건립된 숭의동 수봉공원의 인천예총 전시실이다.
또 하나 '은성시대'의 쇠퇴를 재촉한 사건으로는 건물 신축도 빼놓을 수 없다. 공사가 1980년대에 들어서였는지 얼추 1990년대로 들어와서였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옛날 삐걱거리던 목계(木階)와 실내 널 바닥, 한없이 온화하게 느껴지던 백열등불과 전등갓, 또 위아래로 여닫는 환한 유리 창문이 사라지고 시멘트를 바른, 그리고 애초 앉았던 위치마저 뒤바뀐 낯선 양옥 모습에 정(情)을 잃기도 했던 것이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은성다방'을 '은성다방'으로 기억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단정한 목조(木造) 건물로 여느 다방과는 다른 품위 있고 온화한 분위기였었다는 점이다. 밝으면서도 따듯한 일류미네이션과 나지막하게 실내에 깔리는 클래식 선율, 그리고 명랑하고 교양 있는 레지 여성들로 해서 '은성다방'의 분위기는 아마도 당시 시내에서 가장 편안하고 단정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물론 인천 예술가 손님들 역시 세련된 매너의 신사들로 별달리 풍파가 없어 다방의 분위기에 항시 유쾌와 안락을 더했다.
문사 양반들이 차 마시는 풍경은 퍽 고요해요. 곁에서 누가 신문장 뒤지는 소리 나는 것조차 귀찮은 듯 '침묵의 실(室)'에 잠겨 시상(詩想)을 닦거나 소설 스토리를 생각하는 듯해요. 간혹 이야기한대야 예술과 영화에 대한 화제가 많더군요. 그분들은 세레나데 같은 고요하고 낮은 음악을 좋아하더군요.
1936년 서울 소공동에 있던 다방 '낙랑(樂浪)'의 마담 김연실의 말처럼 그 20여 년 뒤 인천 땅 '은성다방'의 풍경이 바로 이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과거사이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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