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다방과 별다방Ⅱ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1-28 23:03:53
신청곡에 담긴 우리들'청춘코드'
14.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짐다방과 별다방Ⅱ
▲ 1960년대 중반'별다방'건물 5층은 음악감상실이었다. 해박한 재즈·팝 음악 지식과 달변으로 여학생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DJ 윤효중 씨.
이제 '짐다방' 다음 차례로 '별다방' 이야기를 하자. '별다방' 역시도 우리들 젊음이 지나온 한 교차로, 그 철없는 궤적이기 때문이다.
'별다방'은 1960년대 중반 이후에 생기지 않았나 싶다. 저녁 하교 길, 동인천역에 내려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던 다방이었다. '별다방'은 다른 다방들과 달리 실내 규모가 컸다. 극장 내부처럼 3, 4층을 터서 넓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당시로서는 인천 최고의 요지요, 번화가인 동인천 역전에 들어선 최신 건물로서 실내 장식도 상당히 호화로웠다. 지금 대한서림 빌딩 1, 2층은 별제과점이었고 3,4층이 바로 '별다방'이었고, 5층이 음악감상실이었다. 다만 현재의 대한서림 빌딩은 신식 전망 엘리베이터를 가지고 있지만, 그때는 이런 '첨단 설비'는 없는 채 그냥 층계를 오르내려야 했다.
'별다방'의 한 가지 특징은 듣고 싶은 음악을 정식으로 신청할 수 있던 점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다방들이 레지 아가씨에게 구두로 부탁을 하거나 읽던 신문지 구석 같은 데에 제목을 적어 주는 식이었던데 반해 '별다방'만은 이미 그때부터 자그마한 메모 용지에 제목을 적도록 했다. 레지가 가져 간 신청 음악 메모지는 유리창 너머 DJ에게 전해지고 음악은 신청 순서에 따라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때 신청해서 들었던 음악으로 일본인이 작곡했다는 '포에버 위드 유'라는 색소폰 연주곡이 있었다. 아주 감미로운 선율 때문에 젊은 층에 인기가 높아 자주 신청되곤 했다.
한 가지 더, '별다방' DJ는 흔히 우리가 아는 대로 목소리에 잔뜩 멋을 부려 쓸데없는 사설을 늘어놓거나 음악 해설 따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의 뒷주머니에서 '도끼빗' 같은 것은 더욱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일부러 꾸며낸 소품이었을 것이다. 이 다방 DJ는 시종 묵언으로 음악 트는 일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후일에 들은 바로는 '별다방'이 인천 최초로 구변(口辯) 좋은 DJ를 두면서 정식 음악다방으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류의 음악다방을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우리 또래가 군 입대를 한 뒤의 일이었거나, 아니면 제대 후 어느덧 '노장'이 되어 대학의 프레시맨들이나 그보다 고작 한두 살 위의 풋내기들이 드나드는 이 '별다방'에는 더 이상 발길을 끊고 다시 '은성다방'의 문예 분위기로 선회한 뒤일 듯하다.
▲ 1970년대 초 동인천역 쪽에서 남서방향으로 찍은 사진. 사진 오른쪽의 6층 건물 3, 4층이'별다방'이다. 동인천역 광장 밑으로 지하도를 굴착하기 위한 점선 표시가 있다. 이 지하도는 1974년에 개통됐다.
그러나 별다방에 이어 그 위 5층에 서울의 '세시봉'과 같은 전문 음악 감상실이 생기기는 했다. 바로 여기에 구변 좋은 DJ가 있었는데 역시 학교 2년 후배요, '짐다방'의 DJ였던 C와 동기생 윤효중(尹孝重)이었다. 그는 재즈 음악과 팝 뮤직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다 유창한 달변으로 한때 인천의 여학생 팬들에게 대단한 인기였다고 하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활약상을 실제 현장에서 보지는 못했다. 이 다방과 음악 감상실에는 인천 출신 가수 송창식(宋昌植)이 아직 무명 시절이어서 이따금 들르곤 했다고 한다.
근래 인천교통방송에서 과거 인천 지역에서 이름난 DJ들을 불러 특집 방송을 한 적이 있고, 이어 중구에 있는 맥주집 '향수'에서 그를 비롯한 왕년의 DJ들이 모여 추억의 잔치를 연 적도 있기는 하다.
'별다방'에 대한 추억의 하나는 거기 레지였던 매력적인 미스 G에 관한 것이 제일 먼저일 것이다. 늘씬한 키에 서글한 눈빛에 코가 높고 이마가 아름다웠다. 희랍 여성! 비너스 상이었다. 추근거리는 남자들을 경계해서였는지 그녀는 좀 해서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차를 주문할 때나 음악을 신청할 때, 흘끗 이쪽 얼굴을 한 번 보아 주고는 아주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곤 했다.
G에게 누구 하나 제대로 말을 걸어 본 사람은 없어도 내심 그녀를 보러 매일이다시피 '별다방' 계단을 오르던 친구들은 여럿이었다. 개중에는 우리가 처음 다방 비용 조달을 위해 혼비(Hornby) 영영사전을 돌아가며 헌책방에 넘기기로 작정했던 것을 고스란히 답습한 친구들도 있었다. 여러 권의 도서를 들어다 창영동 헌책방 거리에 내던진 동기생과 벌써 세상을 떠나고 없는 그 근처 친구도 생각난다.
아무튼 우리는 자주 이 '별다방'에 모여 앉았다. 여학생을 만나기도 하고 G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했다. 아주 가끔 문학 이야기나 그림 전시회, 음악회도 화제에 올리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화가 여학생들을 만나는 일이나 당구 치는 일, 술 마시는 일, 좋은 영화 프로에 관한 것들이었다. 여름방학 무렵이면 캠핑 갈 일, 크리스마스 때면 통금 해제에 맞추어 밤새워 놀아 볼 궁리 같은 것이 전부였다. 우연이었는지 '별다방'에서는 학생 신분으로서 썩 바람직하지 않은 그 같은 모의를 주로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들이 다방에 드나 드는 행위는 1930년대 저 '다방 선조'들에 비해 얼마나 얼치기이며 엉터리였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이 하는 짓은 예술을 위해서도, 순수 끽다(喫茶)의 선적(禪的)인 경지를 향해서도 아니었다. 아무런 건설적인 지향이 없이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 구석에 죽치고 앉아 무작정 시간을 죽이던 행위! 더구나 책을-이미 과정을 끝낸 것이기는 했어도-팔아서까지 다방을 다녔으니……. 김안서(金岸曙)의 탄식이 지난날 우리들의 행동을 나무라는 듯 통렬하고 뼈저리다.
술을 좋아하는 탓이겠지마는, 나는 찻집이라는 데를 그렇게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차 한 잔을 앞에다 놓고서 한 시간 두 시간을 눈이 멀뚱해서 앉아 있는 꼴이란 아무리 보아도 싱거운 짓이다. 그만한 시간을 이용을 하여 하다 못해 책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한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냐 말이다.
한 마디로 '은성다방' 출입이 건방진 '예술가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짐다방'이나 '별다방' 출입은 솔직히 위장된 '문화적 욕구' 충족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 중에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죄질이 나쁜,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행위가 있었음에 스스로 몸서리를 치게 된다.
K는 I여고 출신으로 같은 대학 간호과에 다니던 동갑내기 여학생이었다. 지금의 신포동 패션거리에서 내동 언덕으로 올라가는, 정미소가 있던 골목 안쪽에 살았는데 꽤 부유한 편이었다. 키도 작은 키가 아니었고, 거기에 또 얼굴도 빠지지 않는 미모였다. 굳이 결점을 찾으라면 코였는데, 코의 윤곽이 아주 조금, 강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러 흠을 잡고 지적하기 위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어떤 계제로 피차 말문이 트였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아침 저녁으로 같은 통학 기차 안에서 얼굴을 마주치다가 그렇게 되었을 듯 싶다. 하기는 전 부터 학교로 향하는 교외선 기차 안에서 K의 눈길을 한두 번 느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일은 굉장히 활달하게 처리하면서도 또 어떤 일에 대하서는 지나치게 소심한 이중 성격이어서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건 것 같지는 않다. 어느 늦은 봄날, 그녀가 기차에서 내리면서 먼저 한글 맞춤법 몇 가지를 물어 온 것이 처음일 것이다.
다행히 제대로 답변을 해 주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눈인사를 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에 열린 연고전(延高戰)에는 같이 기차를 타고 올라가게 되었고 그 후부터 급속하게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러나 마음에는 K 말고 이미 P가 있었던 것이다. P는 다른 여자대학 기악과에 다니고 있었다. 물론 P와는 아직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마음뿐인 상황이었지만 K에게 그런 사실까지 털어놓을 마음은 나지 않았다.
"내일 학교 끝나고 6시쯤 별다방으로 나올래요? 이야기 좀 하고 저녁 먹어요."
2학년에 여름방학을 얼마 앞둔 초여름 날이었다. 44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별다방'으로 나오라는, 그리고 저녁을 먹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선명하다. 어째서 거부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던 것일까. 무슨 핑계라도 대고 정중히 데이트를 사양했다면 그만일 것을 왜 선뜻 약속을 하고 만 것일까.
동인천에는 훨씬 먼저 도착했다. 옛 대한서림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별다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다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 대신 곧장 건물 6층 계단참으로 올라가서 동인천역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1967년의 역 광장은 오늘에 비하면 그저 휑하니 빈 마당에 불과했다. 그렇게 한 30여 분을 기다리자 서울 쪽에서 기차가 내려왔다. 흰 블라우스를 입은 K가 인파를 헤치고 빠른 걸음으로 '별다방' 쪽으로 다가 왔다.
이내 그녀의 자태는 내려다보고 있는 건물의 입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제 층계를 올라오리라. 그런데 몸은 6층 계단참에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역 광장의 시계탑이 그렇게 근 사십 분 가까이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다시 흰 블라우스가 아까와는 정반대 자세로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땅을 내려다보듯 약간 고개를 수그린 채였다.
몹시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함께 차를 마시기 위해 그녀는 30분 이상을 기다렸을 것이고, 그러다가 끝내 혼자 주문을 했을 것이다. 그 비애의 순간의 커피 맛은 말하기도 싫을 만큼 썼을 것이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는지, 아니면 졸업 후 얼마 지난 뒤였는지 K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도 영영 K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지금도 대한서림 빌딩 밑을 지나려면 한 멍청한 사내가 옛 '별다방' 옥상으로 통하는 맨 위층 계단참 창문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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