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엔 없던'깡티·위티'를 아시나요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1-28 23:36:05
메뉴판엔 없던'깡티·위티'를 아시나요
16 1960년대 추억의 다방들 - 특이한 메뉴
▲ 1960년대 다방 메뉴판.
다방하면 일단 커피를 떠올린다. 커피가 다방의 대표적인 메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초기 다방의 형태가 서양의 '카페'를 본뜬 일본풍을 답습한 것이라는 점에서 '개화 음료, 모던 음료'인 커피가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인들의 '개량(改良)'이었는지, 아니면 애초 서양의 카페에서도 그랬던 것인지, 커피 외에 부수적으로 밀크, 칼피스 같은 종류의 음료와 함께 케이크, 과일 같은 것도 메뉴에 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방을 논하려면 역시 커피를 말해야 하고 그 향기를 운위해야 한다. 커피 애호가! 그것이 진정한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자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다방에 다닌 것은 커피 맛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고작 몇 잔 뜨내기처럼 커피를 입에 대 본 주제에 그 맛을 잊지 못해 다방에 다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직 문화 예술인 흉내 내기 겉멋, 치기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방 이야기를 쓰는 지금도 과연 커피에 대해 말할 만큼 애호가인가 자문해 보면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이 연재물의 사진 촬영과 자료 정리 등 중요 조수(助手) 일을 보아 주는 김효선(金孝善) 양이 대단한 커피 전문가, 애호가들을 찾아 주었다. 그 중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외교관이자 성직자였던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 P.)은 "커피의 본능은 유혹,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커피 예찬 중에 동감하는 구절이라면 고작 "악마처럼 검고" 이 한 마디뿐이다. 김 양은 또 터키에는 "커피는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라는 속언이 있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발자크도 지독한 커피 애호가로 하루에 80잔을 마시며 글을 썼다고 한다.
작가 이효석(李孝石)도 대단한 '커피 한(漢)'이었던 듯하다. 1933년 4월호 <삼천리> 잡지에 실린 그의 '작가 일기'는 커피 애호가의 면목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물론 그 내용 중에 발자크의 이름도 나온다.
나남 가서 진하고 뜨거운 커피 한 잔 먹었으면―. 으슬으슬 추우니 반일(半日) 동안 커피 망상(忘想)만 나다. 이제는 거의 인이 박힌 듯하다. 평생 커피 편기(偏嗜)하였다는 발자크의 풍류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결에 깊은 인이 박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시골서는 좋은 커피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낱 채로 사다가 찌었다는 진짬 '자바'를 나남 끽다점에서 나누어다가 넣어 보아도 진짬 맛은 나지 않는다. 찌어서 통에 넣은 '브라질'같은 것은 두 층이나 맛이 떨어진다. 서울서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를 마시는 동무는 얼마나 다행한가.
커피 맛에 대해 전문가적인 평판을 하고 있다. 다음에 보는 작가 안회남(安懷南)의 커피를 향한 간절한 '애호의 정(情)'도 재미있다.
돈이 있었으면 나가서 점심 잘 먹고 영화를 구경하고 커피 한잔 마시며 레코드나 듣고 왔으면 마음이 달떠서 죽겠는 판에 어머님께서 술과 저육을 가지고 들어오시다. 커피 한잔 들이키는 것밖에 좋은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커피 예찬론자도 많았지만 유해론자(有害論者)도 적지 않았고,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커피의 유무해(有無害)를 떠나 처음부터 이 '양탕국'이 입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커피 대신에 다른 종류의 차나 음료를 찾았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다방에 다양한 메뉴가 생겼을 수 있다.
또 다방에 들어서면 누구든 차 한 잔은 마셔야 한다는 모면할 수 없는 '원칙' 때문에도 다른 종류의 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찻값이 곧 '머릿수에 따른 자릿세'였기 때문에 생리적으로 커피를 멀리하는 사람에게라도 다른 무엇으로 그 값을 대체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손님을 위해서나, 다방을 위해서나, 다른 음료와 간식의 등장은 필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1930년대 우리나라 다방 선구자들과는 달리 1960년대 우리 시대에는 다방에서 커피 외의 다른 음료나 간식거리를 주문하는 일은 은연중에 좀 품격이 떨어지는 행위로 치부하고 있었다. 더구나 앞장에서 이야기한 대로 여학생 앞에서(이미 둘 사이가 오래되고 깊어 속셈을 다 아는 경우에는 예외일 수 있다) 달걀 반숙을 시킨다든지, 사이다나 콜라 따위를 주문하는 일은 매우 체신없는 행동이었다는 점이다.
초기 우리나라 다방의 메뉴는 전체적으로 기록된 것은 없고 여기저기 보이는 단편적인 자료들을 모아 그 내용을 구성할 수밖에는 없지만, 비교적 다양한 종류가 있었던 것 같다. 먼저 1932년 <별건곤> 5월호에 실린 최상덕(崔象德)의 '더 큰 행복을 빌자, 전날의 애인을 노상에서 만날 때'라는 글에서 오늘날의 레몬차인 '하트 레몬'을 발견할 수 있다.
차점(喫茶店)에를 갔다가 맞은편 박스에서 딴 사내와 이마를 맞대고 '하트 레몬'을 마시고 있는 그이를 위하여도 행복을 빌자.
당시는 일본 음료가 판을 치던 시대이니 여름 음료인 '라무네(레모네이드)'와 함께 뜨거운 레몬차가 있었고 그것이 오늘에 이어진 듯이다.
나는 그래도 속은 멀쩡하니까 칼피스를 한 잔 주문하고 테이블에 엎드려 있으려니까 그 여자들은 저희끼리 나를 가리키며 무엇이라고 한참하며 웃고 낄낄대더니 하나씩 둘씩 카운터로 들어가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고 나중에는 마담 하나만이 있을 뿐이더니 칼피스를 가져온다. 나는 컵에 꽂힌 스트로도 다 집어던지고 그대로 들어 단숨에 마시고 또 한 잔을 청하였다.
이 글은 신경순(申敬淳)이 1935년 <개벽>지 1월호에 쓴 실화 '미까도의 지하실'의 한 구절이다. '컬피스'로 표기된 것을 칼피스로 고쳐 썼다. 칼피스(Calpis)는 "우유를 가열, 살균하고 냉각, 발효한 뒤 당액(糖液) 칼슘을 넣어 만든" 일본 음료수라고 하는데, 그 시절의 다방 음료였음을 알 수 있다. 야쿠르트와는 다른 것으로 연속극 같은 데서 "시원하게 칼피스나 한 잔" 운운하던 대사가 귀에 쟁쟁하다. 실제 1970년대 초반 무렵까지 다방 메뉴로 존속했던 것 같다. 소설가 최일남(崔一男)은 "초등학교 때 일본 칼피스는 먹어봤다. '첫사랑의 맛'이라고 선전하던 쌀뜨물 색 음료 말이다"라고 회상한다.
복혜숙(卜惠淑)--피곤한 머리를 쉬러 오시느니만치 고요히 '고-히'를 마시며 담배연기 뿜으며 생각들 하는 듯해요. 그 중에는 '킹 오브 킹'이나 '화이트호스' 몇 잔을 마시고 취흥이 도도하여 도원경(桃源境)에 배회하는 이도 있고요.
이 역시 1936년 <삼천리> 12월호에 실린 '끽다점(喫茶店) 연애 풍경'이라는 좌담 기사의 일부로 다방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의 대담 내용이다. 커피를 당시 일본 발음으로 '고-히'라고 이르던 것과 함께 칵테일 메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1934년 5월 <삼천리> 잡지 '끽다점(喫茶店) 평판기'에는 순전히 필자의 주관이었겠지만, 당시 서울의 다방들의 대표 메뉴를 선정해 놓아 부분적이나마 메뉴를 살필 수 있다. 먼저 이순석의 다방 '낙랑파라'는 "빨갛게 타는 난로 앞에서 아이다야, 아이다야 하는 로서아(露西亞)의 볼가 노래나 들어가며 뜨거운 밀크를 마시는 겨울의 정조(情調)! 이는 실로 '낙랑' 독특(獨特)의 향미(香味)"라는 상찬과 함께 "맛난 티와 케이크, 프루트(과일)" 등이 유명하다고 쓰고 있다. "케이크를 포크로 쿡 찔러 먹었다. 갑자기 내가 몹시 올라가는 것 같다. 김치를 젓가락으로 먹는 것보다 한층 더 문화적임에 쾌감을 느낀다"는 작가 이선희의 글이 '낙랑' 케이크의 명성을 뒷받침한다.
'뿌라타나'에는 양유(羊乳)가 특색이고, '본 아미'는 다른 다방보다 값은 비싸지만 홍차가 마실 만하다는 것이다. 다방 '멕시코'에는 "오뉴월 삼복에 마실 만한" 음료로 단연 소다수를 들고 있다. 다른 자료이지만 1936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관련 사건으로 조선인 유광호(柳光浩)가 경성지방법원에서 검사의 심문을 받을 때, "미소식당 건너편 집에서 모두 밀크 셰이크를 한 잔씩 마셨다"고 진술하는 대목도 있다.
그러니까 이 무렵 다방 메뉴는 커피를 비롯해 홍차, 우유(양유), 밀크 셰이크, 칼피스, 하트 레몬, 소다수 외에 케이크와 프루트, 그리고 약간의 칵테일 류가 있었던 듯하다. 이 메뉴가 광복과 함께 다소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것이 6·25전쟁 때까지 이어져 온 것 같다.
1951년 12월2일 동아일보는 보건부가 발표한 '고급요정 및 유흥업자 준수사항'이란 기사를 게재하고 있는데 당시의 가격과 함께 주 메뉴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맥차(麥茶)'로 500원이란 가격이 매겨져 있다. 값이 다른 차에 비해 현저히 싼 것으로 보아 이것이 후일 식당이나 다방에서 '메인' 시작 전에 놓아 주던 단순한 '보리차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전쟁 중이라 조달이 용이치 않았던 때문에 보리차에도 값을 매겼던 듯싶다. 주 메뉴로는 생소다 800원, 홍차 900원, 커피 1천원, 밀크 1천100원, 코코아 1천원, 밀크커피 1천100원 등으로 고시되어 있다. 이 화폐 단위는 1953년 2월, 개혁 전의 것이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이른바 '달걀' 메뉴는 없었던 것 같다. 1960년대에 이르러 양계(養鷄)도 차츰 자리를 잡아 시중에 달걀이 나돌게 되지만 아직은 시장한 사람이 있어 다방이 반숙, 완숙 따위를 내놓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하나 특이한 메뉴가 생겼는데, 소위 '깡티'니, '위티'니 하는 위스키 메뉴였다.
이 무렵이 우리나라 위스키의 대명사였던 '도라지 위스키'를 위시해서 '백양 위스키' '쌍마 위스키' 같은 주류회사들이 시음장을 내고 선전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인천에 시음장이 생긴 것은 아마 1960년대 중후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방에서도 이 같은 메뉴를 개발했던 것 같은데, 벽에 걸린 메뉴판에는 쓰여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른 사정이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다소간의 취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는 '깡티'가 제격이었다. 명칭 자체에서 '주먹'이나 '어깨'를 연상하게 하는 '깡티'는 차라고는 할 수 없는, 위스키 한 잔을 냉수와 마시는 것이었다. 이 불량스러워 보이는 '차 한 잔'으로 빈속의 초짜 대학생들은 금세 얼굴이 불콰해졌다. 이에 반해 '위티'는 '위스키 티' 곧 홍차를 혼합해 마시는 것이었다. 취기는 다소 약했지만 향미는 그럴 듯했다.
무슨 멋이었는지 여학생을 앞에 두고 '깡티'를 마셔본 적이 있지만, 이런 종류가 다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게 된 것은 늘 한 발 앞서 세상을 헤엄쳐 다니던 친구들 덕분이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는 미군 부대를 통하지 않으면 양주 한 방울 구경할 수 없던 때여서 '깡티' 한 잔으로 공연히 우쭐해 보기도 했던 것이다.
'낭만에 대하여'라는 가요를 부른 가수 최백호 씨가 스스로 '도라지 위스키' 마지막 세대라고 했다고 하지만, 훗날 그때의 위스키라는 것이 주정(酒精)에다 일본에서 수입한 위스키 향을 첨가한 소위 '위스키 소주'라는 말을 듣고는 쓴웃음을 지었던 생각이 난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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