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 다방 - 美 공보처의 흥미Ⅱ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2-27 16:25:30
"차나 한 잔 할까?"문턱 낮은 다방, 일상으로
18.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 다방 - 美 공보처의 흥미Ⅱ
▲ 1951년 10월21일 자유신문에 실린 부산의 다방거리 관련 기사.
앞에서도 인용했던 미 공보처 보고서가 1930년대 서울의 종로, 소공동, 명동, 충무로, 인사동 등지에 둥지를 틀고 독특한 문화 공간을 제공했던 초기 다방 이야기까지 자세히 곁들이고, 거기 손님으로 드나들던 문인, 화가, 음악가, 영화 연극인들의 행태에 관한 이야기까지 보탰다면 그들이 바라본 꽤 그럴 듯한 '다방의 사회문화사'가 그려졌을 터인데, 평범하게 다방의 기원과 변천, 그리고 기능, 현황에만 초점을 맞춘 계량적(計量的) 보고서에 그치고 있다. 이것도 미국인들이 가진 사고방식의 한 단면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그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인 '다방의 손님'과 그들이 내린 한국 다방에 대해 그들이 내린 '결론'을 살펴보자. 먼저 '다방 손님들' 부분이다.
부산지역의 다방(한국의 다방을 포함해)이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적인 장소이기는 하지만, 다방을 이용하는 손님들은 특별한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현장 실사 시 개인 면담에 응해준 309명의 다방 손님 가운데 88%가 남성이었고, 나이별로는 26~40세 사이가 70%에 달했으며, 53%의 손님이 대학 졸업자였고, 고교 졸업자까지 합하면 83%가 넘었다.
다방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다방 출입을 매끼 식사나 신문 구독처럼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었다. 손님의 약 3분의 1(32%)은 다방을 하루에 2회 정도 찾으며, 4분의 1 가량 되는 손님이 하루 한 번꼴로 다방을 찾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일주일에 2~3회 다방을 출입하는 사람은 16%, 일주일 1회는 14%였으며, 일주일에 한 번 미만인 사람은 13%였다.
▲ 인천 중구에 위치한'청평다방'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다방을 찾아가는, 다방 최다 이용자는 대부분이 사업이나 언론, 예술에 종사(77%)하는 중년층(36~50세 사이가 54%)이었으며, 반면 젊은 층이나 군인, 가정주부 등은 이들보다 다방 이용 출입 횟수가 적었다.
여기서 얼핏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방 손님의 주류가 남성이며 연령은 대체로 26~40세 층이 70%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우리 사회가 일제 때와는 달리 여성들에게 상당히 폐쇄적인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지적한 내용 중 특히 재미있는 데가 "다방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다방 출입을 매끼 식사나 신문 구독처럼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다방이 '한국인의 생활의 일부, 생활 그 자체였다'는 말인데 실제로도 그 무렵 우리에게 다방처럼 밀착된 공간도 없었던 것이다.
우선 당시 한국인에게는 오락이나 취미, 여흥을 즐길 만한 거리도 장소도 없었다는 점이다. 당구장은 이용이 가능하나 게임 시간에 비례해 예사롭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곳이다. 또 영화관은 다방 찻값에 비해서 상당히 비싼 돈을 물면서 불과 2시간 내외면 다시 무료(無聊)의 세상으로 내던져진다. 대폿집은 대체로 저녁 시간에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술값 또한 만만찮은 것이다. 그리고 허구한 날 가 앉을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커피 한 잔 값으로 한낮이건 저녁이건 장시간 편안히 '벽화(壁畵)'가 되어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은 다방뿐이었던 것이다.
또 실제 1960~7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다방은 만인 공통의 '집 밖' 응접실 구실을 했다. 과거 양반집 사랑채를 빼고는 타인과의 교류, 접견이 용이치 않게 되어 있던 우리의 생활 구조에서 6·25 전쟁 후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이루어지고 경제 발전에 따른 생활의 다양화와 개인 교제의 범위가 늘어나면서 다방이라는 공간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 타인을 접대하기 위해서, 모임을 갖기 위해서, 구직을 위해서, 매매를 위해서, 시간이 남아서, 폭우가 쏟아져서, 우울해서, 마땅한 행선지가 없어서, 마담을 보기 위해서, 전시회를 갖기 위해서, 잠시 휴식을 위해서, 청탁을 위해서, 해고를 위해서, 선보기 위해서, 출판기념회를 하기 위해서, 음악을 듣기 위해서, 거절과 마지막 결별을 위해서…….
차라리 모두가 매일 다방에 갈 핑계를 만들며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싶다. 마주치면 '차나 한 잔'을 맨 처음 인사말로 말했듯이 다방은 도시 생활 현장이고, 우리 사회 문화의 한 패턴이었으며, 만인이 드나드는 자유, 평등의 광장이었으니…….
아무튼 한국인의 다방 출입을 '밥 먹는 일, 신문 보는 일'처럼 일상적이라고 한 미 공보처의 비유는 썩 적절한 표현이라는 느낌이다. 만약 이 시절에 다방이라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필경 우리 사회는 이와 다른 어떤 모습이었을 터인데, 그랬다면 지금은 과연 또 어떻게 변화한 모양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다 들 정도다.
이 보고서는 하루 한 번 이상 다방을 출입하는 사람이 전체의 절반(50%)이 넘음을 알려 준다. 물론 현재 다방에 와 앉은 사람을 면담한 것이니까, 그 비율이 높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산골 벽지에 사는 사람은 일 년이 가도록 전혀 다방 출입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통계를 가지고 '100% 한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도시 생활자의 태반은 분명 이 같은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 좋은 예로 1964년에 발표된 김승옥(金承鈺)의 소설 <차나 한 잔>이 당시 다방이 도시인의 삶 속에 얼마나 깊이 녹아들었고, 또 얼마나 밀접했던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주인공은 신문에 연재만화를 그리는 인물이고, 다방에 가서 상대하는 사람은 각기 다른 두 명의 신문사 문화부장이다. 그날치 만화를 그려 가지고 신문사에 간 주인공 '그'는 '차나 한 잔' 하자는 처음 신문사 문화부장에 끌려 다방으로 가서 해고 통보를 받는다. 다방을 나온 그는 탈이 난 배를 안고 다시 '조용한 다방'을 찾아간다. 거기서 그는 만화 연재 부탁을 위해 또 다른 신문사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찾아간 다음 신문사 문화부장을 이번에는 자신이 '차나 한 잔' 하자며 밖으로 이끈다. 결국 이 다방에서도 그는 두 번째 문화부장의 진력나는 농지거리와 함께 연재를 거절당하게 되고, 선배 만화가를 불러내 술잔을 나눈다. 이것이 대략의 줄거리인데 이렇게 주인공 그는 하루 동안 무려 세 차례나 다방을 드나드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다방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무적이고 냉정한 도시인들의 인간관계일 것이다. 당시 도시 사람들의 입에 붙은 '차나 한 잔'이라는 말을 통해 그 시절 '다방의 한 풍속'을 참으로 절묘하게 그려냈다. 이 소설의 핵심 메시지는 주인공 '그'가 술이 취해 선배 만화가 김 선생을 상대로 내뱉는 말에 드러난다.
"차나 한 잔, 그것은 이 회색빛 도시의 비극이다, 아시겠습니까? 김 선생님, 해고시키면서 차라도 한 잔 나누는 이 인정,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미담……말입니다."
다시 보고서의 다음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로 이어지던 한국의 다방 모습 중 대표적인 특징인 '다방 회사와 다방 사장'에 관한 이야기가 더욱 흥미를 끈다.
다방은 주로 낮에 이용한다. 다방을 가장 많이 찾는 시간은 늦은 오후(38%)이고, 늦은 밤, 즉 저녁 9시 이후(2%)에는 다방을 찾는 발길이 뜸해진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아침, 이른 오후나 저녁때는 각각 다방 이용률이 21% 정도로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손님이 다방에 머무는 시간은 1시간 이하(75%)이며, 19%가 1~2시간 사이, 2~3시간 사이는 6%, 3시간 이상 머문다는 사람은 2%였다.
다방 이용 손님들의 대부분은 단골이다. 자기가 잘 가는 다방이 있다. 다방 측에서 알려준 바에 따르면, 86%의 손님이 평소에도 자주 다방을 찾는 사람들이었으며, 13%는 가끔 들르는 손님들이고, 처음 찾아오는 손님은 1%밖에 안 되었다.
다방을 찾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 손님의 45%는 (응답자의 60%는 사업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업상 업무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 말은 다방이 곧 사업장이라는 말은 아니다. 소규모 자영업을 하는 사업가들이 업무를 위해 예의를 갖추고 고객이나 거래처 사람 등을 만난다는 뜻이다. 또 한국에서 소규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전화, 비서, 사무실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들고 편리한 다방을 애용하는 편이다. 다방에는 전화도 있고 그 전화를 받아주고 차도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으며 편안한 공간까지 제공하는 일석삼조의 곳이기 때문이다.
다방을 찾는 두 번째 이유는 휴식과 오락이다. 38%가 이렇게 답했다. 옛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마담과 수다를 떨거나 웨이트리스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아니면 신문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 있기만 하기도 한다.
다방을 찾는 다른 이유도 두 가지 더 있다. 10%의 손님이 다방에 오는 이유를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무직자였다. 손님의 4%는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 한 잔의 차로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다방을 찾는다고 했다.
그러나 미 공보처는 역자(譯者)가 지적한 대로 한국의 다방을 오직 "그 기능과 역할, 구실이라는 다분히 실용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본 채, "미국의 대외 정책을 해외 현지에서 적극 홍보함으로써 시책 완수에 기여한다는 미 공보처 본연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도구(장소) 차원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다방 대부분이 손님들에게 신문이나 잡지를 제공하고 전시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점을 볼 때, 미 공보처도 다방을 홍보물 배포처와 전시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다방 마담들도 이런 출판물이나 전시물을 다방에 가져가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국의 다방은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거나 의견을 나누는 장소이다. 따라서 일부 다방은 미 공보원(USIS)의 홍보 대상 그룹의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기도 하다. 미 공보처 직원들이 사람을 만나기에 좋은 장소이기도 하며(많은 공보처 직원들이 이미 다방을 그런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미 공보처가 모임 개최, 홍보물 배포, 전시 등을 할 수 있는 곳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다방에 대한 치밀하고 정확한 조사의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는 점에 다소 맥이 빠지는 느낌이지만, 그들이 남긴 '한국 다방에 대한 조사 보고서'가 당시 우리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오늘에 결코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1960년대 말 우리 사회의 한 단면, 자화상이었다고 할 다방의 모습을 요소요소 재미있게 들추어내고 분석해 낸 데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다시 한 번 이 번역 원문이 국립중앙도서관 국외수집기록자료 블로그 '해외기록으로 보는 한국' , (e-문서 13)1960년대 한국의 초상:다방(茶房)- 美 공보처(USIS)가 들여다본 한국의 이색지대'에 의거했음을 밝힌다. 더불어 번역자 이흥환(KISON 편집위원, 국립중앙도서관 워싱턴 현지 해외기록수집팀) 씨께도 감사 드린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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