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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19.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 다방 - 거리의 응접실, 비서실

by 형과니 2023. 6. 24.

19.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 다방 - 거리의 응접실, 비서실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4-08 21:40:43

 

 

전화·비서·사무실'삼박자'사장들 출근 도장

19. 거리의 응접실 1970년대 다방 - 거리의 응접실, 비서실

 

 

"연락온 데 없냐" "손님 안 왔냐"

마담·레지에 일과 확인

 

휴대전화 없던 그 시절

약속 상대와 만남 불발 땐 '메모'로 의사 소통

 

1970~80년대 다방에서 사용하던 다이얼식 공중전화기.  /김영준 소장

 

앞서 소개한 미 공보처의 우리나라 다방에 대한 조사 보고서 중에 "한국에서 소규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전화, 비서, 사무실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들고 편리한 다방을 애용하는 편이다. 다방에는 전화도 있고, 그 전화를 받아주고 차를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으며, 편안한 공간까지 제공하는 일석삼조의 곳이기 때문이다"이라는 대목이 있다. 이른바 1960~70년대에 유행하던 '다방 회사, 다방 사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무렵이라면 인천에도 '은성다방''짐다방' '별다방' 등을 제외한 대다수의 다방이 미 공보처 보고서 내용과 같은 풍경을 보여 주었다. 그 보고서는 사무실을 열고 비서를 둘 정도의 자금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대부분 브로커 아니면 명색만 사장인 사람들이 다방을 마치 자기 회사 사무실처럼, 레지나 마담을 개인 비서처럼 쓰면서 매상을 올려 주는 공생 관계의 풍경이었다.

 

넓은 다방 실내 이쪽 저쪽에, 둘셋씩 나와 앉은 사람들이 바로 '사장님'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혼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도 있지만. 여느 회사 사장들처럼 그들은 대체로 정장을 하고 아침 일찍, 사무실에 출근하듯 다방에 나와 앉는다. 좌석도 거의 고정적으로 늘 앉는 자리에만 좌정한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는, 우선 레지가 가져다주는 엽차 한 잔을 천천히 위엄 있게 마시면서 "여기 오늘 신문 좀 가져와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좀 있어 찾아오는 이런저런 손님을 접견하거나, 부지런히 다방 밖을 들락거리며 "어디 연락 온 곳 없는가?" "누가 찾아오지 않았나?" 하며 일과를 보는 것이다. '사장님'은 자기 돈으로는 종일토록 차 한 잔밖에 마시지 않지만 그를 만나러 오는 '손님들'의 차 매상이 다방에 납입되는 그날그날의 자리 값이요, '사장님 수발' 대가인 것이다.

 

 

1975년 다방에서 사용하던 커피잔. /김영준 소장

 

 

다방에서의 비서 노릇, '사장님 수발'은 주로 전화 심부름이다. 간혹 쓴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이 다방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사장님'에게 바꿔 줄 때의 풍경이었다. 간혹 레지나 마담이 무심결에 "사장님, 전화요" 하는 경우 다방 안에 있던 여러 명의 '사장님'들이 일제히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아니, 저기 최 사장님이요."라고 확인을 해 주어야 나머지 '사장님'들은 비로소 방금 전의 자기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당시 참으로 넘쳐 나는 것이 '사장님'이었다. 원로 대중가수 김용만(金用萬)이 부른 가요 <회전의자>나 동갑 여가수 현미(玄美)가 부른 "길을 가다가 사장님 하고 살짝 불렀더니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네요. 사원 한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데 왜 이렇게 사장님은 흔한지 몰라요.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몽땅 사장님……"이라는 가사의 <몽땅 내 사랑>은 모두 이 시절 우리 사회에 넘쳐 나던 회전의자의 임자, '사장님 인플레'를 풍자하던 노래였다.

 

일반 다방이 이렇게 사장실화 하면서 전화 수요의 증가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은 가정에 전화 보급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라 일반인들도 다방에서 전화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 한두 경우는 다방 카운터에 설치된 자체 전화로 서비스를 했으나 수요가 늘어나면서 전화 요금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매번 '한 통화에 몇 원씩' 하는 식으로 요금을 받기도 했지만 시외전화나 시내 통화수가 늘어날 경우의 요금 징수가 복잡했다(물론 다방마다 전화기에 시외전화 방지 잠금장치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다방 안의 공중전화였다. 송화자가 동전을 넣고 거는 전화이니까 다방으로서는 아무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따라서 송신 전화는 '사장님'들도 자신의 동전으로 걸어야 했다. 다방 측이 할 일이란 공중전화에 들어갈 동전을 충분히 준비해 지폐와 교환해 주는 일뿐이었다. 후에는 아예 송수신이 가능한 공중전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 마담이나 레지가 '사장님'을 위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사장님'이 다방 밖으로 출타했을 경우 걸려오는 전화 내용이나 방문하는 내객의 연락처를 메모해 놓는 일, 그리고 내객이 적어 주는 메모를 잘 간수해 전하는 일이다.

 

특히 기억에 남은 다방이 1990년대까지도 건재했던, 중구 신흥동 로터리 북쪽 모서리의 2'대원다방'이 있었다. 이 다방은 사라질 때까지 '다방 회사, 다방 사장' 그 진풍경을 보여주었었다.

 

또 조금 뒤늦게 문을 연 것으로 기억되는 '우봉다방'도 이런 서비스로 정평이 났던 곳이다. '우봉다방'은 중구 내동 내리교회 인근, 옛 식락원으로 들어서는 골목 초입, 지금은 문을 닫은 심치과 건물에 있었는데 특히 1970년대에 근무했던 기억력 좋은 카운터 여인의 명성이 자자했다.

 

소문에는 그 여인의 전직이 전화 교환수였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출입하는 다방 손님의 목소리를 용케도 잘 구별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밖에서 다방으로 전화를 걸면 이쪽이 누구라고 밝히기도 전에 ", 임 사장님, 정 사장님" 하고 알아 맞히는 바람에 손님들, 특히 '사장님'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목소리를 구별해 낸 손님이 무려 150여 명에 달했다는 이야기를 인천의 문인 동료 서부길(徐富吉) 씨가 귀띔해 주었다.

 

앞에서 잠시 다방 메모 이야기를 했는데, 이 메모 역시도 우리나라 다방의 또 다른 특징이랄 수 있었다. 다방에서 메모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다방이 '만인의 연락 장소, 거리의 응접실'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손님들의 메모를 꽂아 두는 메모판이 다방마다 출입문 옆에 비치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어쩌다 약속했던 상대가 아무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쪽도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고 자리를 떠야 한다. 이때 먼저 온 사람은 자신의 내왕 사실을 알려 놓거나, 늦게라도 올지 모를 상대에게 다음 행선지를 알려 주기 위해 메모지를 다방에 남긴다. 다방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런 경우가 빈번해지고 급기야 모든 다방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오늘날 같이 휴대전화가 발달했다면 다방 메모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메모가 다방 출입 손님 간의 긴요한 의사 전달 수단이 되면서 거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얽히게 된다. 메모는 받는 사람을 위해 쪽지 겉면에 수신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여성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 짓궂고 죄 많은 자들은 종종 그런 메모를 슬쩍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내들이란 늘 일상이 지루한 데다가 이렇게 해서 혹 얄궂은 운명을 맺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런 메모 가로채기가 자주 발생하면서 나중에는 피차 암호를 정해 메모를 남기게 되었다.

 

1970년대 초, 군 제대 후 복학을 하지 못한 채 시내 한 다방에서 지루하게 봄날 낮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다방 안에는 가벼운 옷차림의 여대생쯤으로 보이는 두 여자와 저 안쪽에 앉은 중년의 신사 세 사람, 그리고 창가에 앉은 데이트 족 한 쌍이 전부였다. 두 여자는 동행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동행은 얼마를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둘은 기다림을 포기한 듯 대화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입문께로 가서 그 중 한 여자가 메모지를 판에 끼우는 것이었다. 온통 그 여자들에게만 신경을 쓰던 이쪽 죄 많은 인간들도 잠시 후 다방을 나서면서 레지의 눈을 피해 그 메모를 슬쩍했던 것이다.

 

겉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여자 이름 두 글자만 쓰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39년 전 일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네가 오지 않아서 송도행은 취소하고 대신 키네마극장으로 간다'는 내용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쪽 인간들도 부리나케 극장 쪽으로 달려갔었던 것 같다. 뭘 어쩐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무작정 뒤를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문 앞까지가 전부였다. 여자들은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극장 출입구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고 이쪽은 뭐 쫓다 지붕 쳐다보는 짐승 꼴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장료! 그 거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름 끝 자에 '' 자가 들었던 듯한 메모의 주인 여성이 늦게라도 다방에 왔었는지, 왔다가 그냥 낭패해 돌아갔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다방 메모 이야기는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인 고동화(高東華)<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아주 재미있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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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 없는 사람의 실없는 이야기를 듣는 세 여자의 표정에서 엷은 호기심을 찾아낸 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기로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죠. 지난 봄 어느 일요일이었는데 나는 명동에서 이상한 술래를 한 사람 찾아내었습니다. <중략> 술래는 설파다방 쪽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잠깐 서서 하늘을 한번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좀 지리해졌습니다만 나의 술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방금 들어선 다방 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순간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만큼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술래가 나의 한쪽 팔을 가볍게 붙들고 빙그레 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펜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하길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술래는 메모지에 뭔가를 적더니 입구의 메모판에 끼어 놓고는 제게 펜을 돌려주고 다방을 나갔습니다. 나는 술래를 따라갈 것도 잊고 레코드가 제자리에서만 돌듯 반복해서 흐르고 있는 라벨의 '볼레로'를 귓전으로 들으며 놓쳐버린 술래가 지금쯤 어디를 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술래가 남기고 간 메모에 시선이 갔습니다. 나는 부쩍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더군다나 점점 고조되는 '볼레로'의 이국적인 선율이 나를 유혹했습니다. 결국 죄 많은 나의 오른손은 메모판 앞에서 춤추는 방울뱀마냥 머뭇거리다가 술래의 메모를 집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접혀진 종이의 앞쪽에 사람의 이름 대신 그냥 작은 동그라미 하나만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말입니다. 거기 적혀 있는 내용이……."

 

나는 말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세 여자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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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당시 심사위원들로부터 '군계일학'이라는 대단한 호평을 받으며 당선에 오른 작품이었다. 인용한 부분은 여름휴가를 맞은 주인공이 할 일 없이, 길 가던 여자들을 따라 다방에 들어갔다가 여자들로부터 추궁을 받게 되자 즉석에서 꾸며댄 거짓 스토리인데,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다방에서 실제로 남의 메모에 손을 대는 사례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가 있다.

 

'다방 회사, 다방 사장' '거리의 응접실, 비서실' 그리고 다방의 공중전화와 메모지 등은 한국 다방의 명물이면서 미국 공보원의 비상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한국 다방만의 독특한 풍속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