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미담'·중앙동'아카데미'… 아련한 이름들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1-28 23:16:52
동인천'미담'·중앙동'아카데미'… 아련한 이름들
15. 1960년대 추억의 다방들 - 그밖에 인천 다방
▲ 배다리'중앙다방'입구.
"서울의 다방다운 다방의 새 기원(紀元)을 지어준 낙랑(樂浪)이 여기 있고, 그 다음으로 7년의 역사를 가진 플라타느는 서울서도 가장 친밀하고 가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새로 생기는 나전구(羅旬區)도 이 새봄을 기다려 남창(南窓)을 열 것이요, 미모사는 훨씬 규모가 째여서 명람(明朗)보다도 안일(安逸)의 순간을 제여(提與)한다. 음악을 찾는 이는 엘리사로 더 멀리 돌체의 탐탁한 작은 문을 두들기기도 하리라. 이 봄을 장식할 고운 멜로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본아미를 좋아하는 이의 발걸음은 아직도 명과(明菓)나 금강산을 버리지 아니 할 것이나, 미령(美鈴)의 일층은 잠시 태양과 친할 포근한 몇 개의 자리를 갖추어 있고, 프린스는 봄밤의 그림자를 가득히 품어 있다. 혼자 무유(無悠)히 써니의 이층에 오르면 검은 비로드의 남벽(南壁)이 정다운 손길을 기다리고 다이애나 성림(聖林)의 아메리카적 기분을 좋아하여 발을 멈추는 단골손님도 있으나, 노아노아의 흰 원주랑(圓主槨)을 거쳐 넓은 백색 공간, 더 높이 한 층계를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백룡(白龍)은 언제나 화려(華麗)가 경허(輕虛)에 흐르지 않은 매혹으로 넉넉히 시간을 저버리고 앉아 있을 수 있으며, 더욱 페치카의 정취는 겨울보다도 봄밤의 온기를 전하기에 더 정답지 않을까?"
1938년 5월 <삼천리> 잡지에 실린 이 이헌구의 수필 <보헤미앙의 애수의 항구, 일다방(一茶房) 보헤미앙의 수기>는 이미 앞에서 일부 인용한 바 있는데, 여기 실은 것은 그 중 또 다른 일부분이다. 철자는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고쳤다. 당대의 문필가로서 그 무렵 서울의 각 다방들이 가지고 있던 각각의 개성적인 분위기, 그리고 나름대로의 특장을 아주 간결하면서도 감성적으로 감칠맛 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다방 애호가답게 당시 서울의 다방들의 위치를 지도로 그리기도 했다. 물론 서울이라 해도 그때는 인총이 적고 또 잡다한 업소들 역시 적었던 데다가 다방도 종로와 소공동, 명동을 통틀어 불과 몇 군데 안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오면 다방은 그야말로 '거리의 공원(公園)' '거리의 응접실'로서 전국에 유행처럼 늘어나던 때여서 인천에도 이미 100여 군데가 넘어 있었다. 워낙 많은 다방이, 그것도 대부분 중구 일원에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몇몇 다방을 제외하면 그 집이 그 집 같고, 그 다방이 그 다방 같은 느낌이다. 일일이 기억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다. 더구나 박태원이나 이헌구 같은 다방 순례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이렇게 재미나면서도 대번에 어느 한 다방이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도록 글을 남긴 사람도 없다.
수필가 김길봉 선생이 붉은색 줄이 쳐진 원고지를 다방 등불 밑에서 침칠을 해 가며 넘기던 기억이 있으나 다방 이야기는 아니었다. 최병구 선생도 이따금 볼펜으로 원고지 위에 죽죽 글을 써 내리던 모습이 떠오르지만 역시 다방 이야기는 아니고 대부분 시(詩)들이었다.
앞장에서 이야기한대로 화가 우문국 선생이 각종 미술 전시회를 회고하면서 쓴, 그때그때 순례하던 단편적인 이야기와 미술평론가 김인환 교수의 우문국 선생과 관련한 은성다방 일화가 고작이다. 이것도 그 집 한 군데에 한한 이야기로 이헌구처럼 여러 다방들을 떠올리게 하는 글은 아니다.
1960년대 동인천역 축현파출소 옆 건물 2층이 '미담다방'이었다. 이 미담다방에서 다방 출입 최초로 모닝커피를 먹어 보았다. 아침 6시 50분 발 서울행 통학열차를 놓치고는 다음 강의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나처럼 차를 놓친 H와 우연히 이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는데 난데없이 달걀노른자가 뜬 모닝커피를 가져 온 것이다.
이것이 과연 일반 커피와 같은 가격일까, 하는 불안감으로 H 앞에서 내심 크게 마음을 졸였었다. 실내가 넓었던 것과 그 후로도 마담이 썩 친절하게 잘해 주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가수 정원이 가슴을 짜내듯 부르던 '미워하지 않으리'를 다음날 오후에 그 다방에서 들었던 생각도 난다.
▲ 텅 빈'중앙다방'내부. /김효선 촬영
그 건물 1층에 '일번지다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한 번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명다방'은 동인천에서 용동 마루턱이 방향으로 오르다가 우리은행 못 미처, 작은 골목 모서리의 '올레'라는 휴대전화 업소와 나란히 붙은 보건약국 자리쯤에 있었다. 1960년대 중반 무렵 젊은 대학생들이 한때 우르르 드나들던 곳이다. 그 바람에 건달들이 많이 꼬여서 이내 우리들 출입이 시들해지고 말았다. 실내 장식이나 음악, 다방 전체 분위기, 레지, 어느 것도 그다지 별다른 특징을 가지지 못했는데, 아마 동인천역이 가까워 기차 통학생들이 이용하기 편해서였는지 모른다.
그 건너편 2층 지금 맥도날드 햄버거가게 자리가 '상록수다방'이었다. 홀은 넓었지만 역시 '명다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경동사거리, 지금의 내동 패션거리 입구를 막 건너 신포시장 쪽 모퉁이의 시채널 안경점 자리가 한때 청요리로 이름이 높던 중국집 영풍루였다. 거기서 신포시장 쪽으로 두 집즘 내려온 곳에 '태양다방'이 있었다. 이 다방은 1980년대까지 존속하지 않았나 싶다. 특징은 입구와 벽, 천장이 바위 동굴처럼 장식되어 어둑한 느낌이었다.
신포동 시장 손님이 많기는 했지만 이 다방이 의외로 가 앉았기에 편해서 종종 다녔는데, 이렇게 편안할 듯 싶은 곳을 물색해 놓으면 영락 없이 건달들이 들이닥쳐 분위기를 흩으려 놓았다. 군사정부 아래였는데도 당시는 거리에서 주먹 싸움을 하거나 백주 대낮에 패싸움도 종종 일어날 정도로 기강이 잡혀 있지 않았다. 강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서 군사정부가 적당히 풀어놓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탓에 여학생과 다방에 앉아 있으면 툭하면 학생인지 건달인지 모를 몇이 다가와 우정 바로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서는 말로, 행동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 와 곤경에 빠트리곤 했다.
'통일다방'은 애관극장 맞은 편쯤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정확한 위치를 짚지는 못하겠다. 실내가 환해 크게 우울한 느낌은 없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그 일대 상점 사장들이 잠시 휴식을 하거나 손님을 만나러 왔기 때문에 우리 또래가 모여 문학이나 음악 이야기를 하기에는 다소 불편했다.
이 다방은 그 근처 자전거포를 하는 고교 때 동창생 집에 놀러갔다가 가끔 올라 다녔다. 여기서는 우리가 대학에 들어간 뒤 한동안 모여서 중창처럼 부르던 'You Are My Sun Shine'이나 슬림 휘트만의 '에니 로리' 같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은사 최승렬 선생께서 제자 네댓 명에게 막걸리 끝에 여기서도 커피를 사주신 기억이 있다.
중구 중앙동 4가 옛 '미조리' 일식집이 있던 건물 위층이 '아카데미다방'이었다. 이 다방은 이상하게도 문학이나 그림을 하지 않는 친구들과 더 자주 드나들었다. 레지의 성이 L이었는지 J이었는지 흐릿한 가운데도 무척 친절했다는 생각이다. 입구가 넓은 길 쪽으로 나 있었는데 '은성다방'처럼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무계단이었다. 쿵쿵 울리는 소리는 있어도 삐걱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1학년이던 1966년 봄 이 다방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바벨탑'이라는 시를 썼고, 그것이 후일 학교 신문에 게재돼 크게 호평을 받았다. 신문사로부터 원고료라는 것도 처음 받아 몹시 흥분했었다. 그 금액이 생각 밖으로 두둑해서 친구 몇을 이끌고 와 커피를 먹었던 생각이 난다.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조금 관심을 보이고 우리 패를 더욱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다. 별일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 뒤 그녀를-그냥 L이라고 부르자-친구네 여인숙에서 하룻밤 공짜로 재워 준 적이 있다. 1968년 겨울, L이 그 다방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었다. 당구장을 들렀다가 몇이 저녁 시간에 우연히 그 다방에 들렀는데 L이 그날로 그만둘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고향이 경기도 어디라고 들은 듯한데 역시 기억이 흐릿하다. 기왕 차도 끊겼으니 우리와 동행하기로 하고 신포동 막걸리 집으로 갔다. 통금이 가까워지도록 앉아서 L도 제법 몇 잔을 했고, 우리도 상당히 취할 만큼 마셨다. 그런 중에 누군가가 호기를 부렸던 것이다. 친구 L네로 가서 재워 주자는 것이었다. 친구네는 남구 숭의동에서 여인숙을 하고 있었다.
없는 돈에 가까스로 택시를 타고 우리들이 가끔 묵는 친구네 여인숙 골방에 L을 넣어 주었다. 물론 친구 어머니 눈을 피해서였다. 그러니까 이 방은 손님용이 아니라 친구 L네가 쌀가마나 고구마 부대 같은 것을 보관하는 별도의 식품 창고 같은 방이었다. 바깥으로 불빛이 새어 나갈까 보아 불도 켜지 못한 냉방에서 친구 L과 L양과 또 다른 친구 K, 이렇게 넷이서 목소리를 낮춰 3홉들이 소주 한 병을 더 마셨다. 우리는 날이 밝아서야 L이 소리 없이 떠나간 줄을 알았다. 윗저고리 주머니 속에 든 쪽지에는 "꼭 좋은 시인 되세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왕 허튼 말이 났으니 내친김에 다방에서 있었던 웃지 못 할 봉변기(逢變記)- 그렇게 큰 봉변은 아니었어도-를 적어 본다. 당시 인천시청, 그러니까 지금의 중구청 정문 아래 오른쪽 첫 골목 초입쯤에 있었던 다방에서다. 이곳 다방 이름을 기억할 수 없어 여러 사람에게 문의해 보았지만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한다. 기억하시는 독자가 계시면 부디 알려 주시기 바란다.
누구를 만나러 갔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노는 바닥도 아닌, 완전히 어른 다방 구역에 혼자 월경할 리가 없었다. 먼저 가 앉아 기다린 지 한 20여 분이 지났을까. 두 개 테이블쯤 건너에 중년의 아저씨와 마담 아주머니가 나란히 않아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말을 끊고 내 쪽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쑥스러워 이쪽에서 얼른 시선을 돌렸을 것이다.
그 순간 마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더니 잠시 뒤에 차 쟁반을 받쳐 들고 내게로 왔다. 내게 다가온 마담 아주머니는 눈웃음을 웃으면서, "저기 저 사장님이 학생에게 사 주시는 거예요" 하며 쌍화차 한 잔을 내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건너편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해 보이는 것이었다. 마셔도 좋다는 의미였다. 조금 불편한 느낌이었지만 나 역시 감사의 뜻으로 조금 고개를 숙인 뒤 조심스럽게 쌍화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역시 내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이번에는 그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오는 것이었다. 놀란 것은 그 아저씨가 앞자리에 앉지 않고 바로 내 옆 오른쪽 의자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아주 다정하게 혼자 왔느냐,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 따위를 물었다. 내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갑자기 그 아저씨의 오른손이 내 오른쪽 무릎 위에 얹히는 것이었다. "얼굴이 잘 생겼군" 하며 좀 더 가까이 다가앉으며 이번에는 왼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았다.
얼른 마담 쪽을 보았지만 마담은 카운터에 엎드리듯 등을 보인 채 전화를 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무엇이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저녁에 또 오겠어?" 그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목이 쉬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마 아무 대꾸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사일생, 그 순간 내가 기다리던 '누구'가 다방 문을 밀고 들어선 것이다. 생전 처음 먹어 본 쌍화차 값을 그 정도로 치른 것으로써 봉변은 거기서 끝났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세상 모든 일이 다 다방에서 이루어진 듯싶다. 하도 다방이 일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궂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까지도 다방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이제 늙어가는 기억 속에 쓴웃음으로 남는다 /김윤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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