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짐다방과 별다방Ⅰ
인천의문화/김윤식의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2012-01-24 20:55:59
수업이 끝난 오후 발길 잡던'젊은이의 양지'
13.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짐다방과 별다방Ⅰ
당시 여학생, 당구장·술집 출입 기피
부담 없는 최적의 동행장소
짐다방은 클래식·별다방은 팝음악 위주
마주 앉아 잡담하거나 지루할 땐 성냥개비 쌓기 놀이
▲ 인천 중구 내동 215번지, 기업은행 건너편 등산용품점 라푸마 건물 2층이 1960~70년대 당시'짐다방'이 있었던 곳이다. 3층은'삼공탁구장'이었다.
'은성다방'에 이어 1960년대 신포동(실제는 내동이다) 기업은행 건너편 번화가에 자리 잡았던 '짐다방'과 동인천역전 대한서림 빌딩 2, 3층의 '별다방'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다방은 일반 다방들과 구별되는 '젊은 사람 다방'으로 당시 우리 또래 대학생들에게는 '고급문화 욕구'를 채워 주는 유일한 장소였다. 거창하게 '고급문화 욕구'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여학생과 좀 더 편안히 있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 시절 대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유흥 문화 공간은 다방과 당구장과 막걸리집, 그리고 영화관 정도였다. 그러나 당구장은 오로지 남성들의 전유 공간으로서 여성들은 목욕탕의 남탕을 외면하 듯 당구장 문 안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영화관은 단 둘이 어두운 공간 속에 가 앉아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더구나 그 영화관의 '어둠'을 여학생들은 '남자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남학생과 영화관에 가는 자체가 망측스런 일로 여겨졌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뱃심이 좋아도 여학생에게 영화관 동행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영화관 같은 데서 만에 하나 남의 이목(耳目)에 걸리면 대번에 소문이 퍼지는 통에 대부분 영화관 데이트는 단념하는 터였다. 그렇다고 단둘이 아닌 여럿이 한 영화관을 정해 우르르 가는 것도 그렇게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또 그 무렵 여학생들은 남학생들과 술집에 동행하는 일이 드물었다. 학교 인근 막걸리 집에서 과(科) 전체가 회합을 가진다거나 친목 행사를 할 때에 한두 번 참여하는 것이 전부였다. 좌석에 앉아도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구석에 모여 앉아 술은 한사코 사양하거나 어쩌다 막걸리 양재기를 받아 들어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아마 당시 여학생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이 견지해야 할 '고매한 품위'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오늘날과 같이 전원이 잔을 들고 외쳐 대는 '위하여!' 풍조도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당구장, 영화관, 술집은 여학생과의 동행이 용이치 않았지만 다방만은 예외였다. 여학생들도 다방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입장해서 남학생들과 마주앉아 음악을 듣거나 선선히 잡담을 나누었다. 물론 자기들끼리도 예사로이 출입했다. 남녀가 다방에 마주앉는 것은 영화관에 가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훨씬 덜 부정적(否定的)인 일로 생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다방이 여학생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비용의 저렴(低廉)이라는 또 다른 숨겨진 이유도 있었다. 커피 두 잔 값으로 한두 시간쯤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붓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왕 비용의 저렴 이야기가 나왔으니 당시 다방의 다소 궁상스러운 풍경도 이야기해 보자.
다방에는 커피나 홍차 외에도 '달걀' 메뉴가 있었다. 달걀은 반숙과 완숙 두 종류로서 급한 허기를 달래는 요기 거리였다. 반숙은 이를테면 수란(水卵) 같은 것으로 계란을 깨트려 수란짜에 넣고 끓는 물에 반쯤 익힌 것이고 완숙은 완전히 찐 달걀이었다. 다방에 이런 메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전기(前記) 고 최병구 선생이 은성다방에서 이것을 주문해 주었던 일이 있어서였지만, 여기저기 뒤져 봐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 '별다방'은 1960~70년대 당시 동인천 현 대한서림 빌딩 2, 3층에 자리했다. 1층은'별제과'였다. /사진제공=김효선(프리랜서 작가)
달걀 메뉴는 남학생들끼리 다방에 갈 경우 주로 애용했다. 그러나 여학생 앞에서는, 아주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면 금기(禁忌) 메뉴이기도 했다. 식사를 거른 티를 내는 것으로 속된 말로 '쪽 팔리는' 일이었다. 달걀 메뉴 중에도 거개가 완숙을 주문하는데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완숙이 반숙보다 양이 많기 때문이었다. 완숙은 통째로 쪄 나오니까 애초 제 양의 변화가 없지만 반숙은 달걀이 끓으면서 너덜너덜해지는 흰자위 주변을 주방에서 예쁘게 도려내 '정리'를 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양이 줄어드는 것이다.
또 다방에는 여학생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놀이'도 있었다. 물론 같은 남학생들로부터 얻어 듣고 배운 것이지만 '성냥개비 놀이'가 그것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성냥통을 쏟아 개비 하나하나로 정성들여 '두 사람의 탑'을 쌓아 올리거나 혹은 수수께끼 식의 문자(文字)를 만들고, 도형(圖形) 문제를 내는 것이다. '성냥개비 놀이'는 어쩌다 화제가 끊겨도 두 사람을 지루하지 않게 붙들어 주었다.
아무튼 '젊은 사람 다방'으로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해소시킬 공간으로는 각기 학교 근처 다방을 제외하고, 인천에서는 '짐다방'과 '별다방'이 그 대표적인 장소였다. 우리는 학교가 파한 후나 토요일 오후 시간을 '은성다방' 외에도 가끔 이 두 곳에서 보냈던 것이다.
처음 '짐다방'은 주로 클래식한 음악을, '별다방'은 재즈나 팝 뮤직을 전문으로 틀었다. 짐다방이 처음에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는 것은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후일 클래식 고수(固守)에서 선회해 팝 뮤직도 틀었던 듯해서이다. 역시 썩 자신이 없지만, 이 두 다방은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DJ를 둔 인천 최초의 음악다방 노릇을 하지 않았나 싶다.
실내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짐다방은 대체로 정숙한 분위기였는데 의자의 편안함과 장중한 클래식 음악 이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카운터 뒤에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걸려 있지 않았었는지……. 그러나 위치만은 예나 지금이나 인천의 명동으로 불리는 신포동 번화가, 오늘날의 패션거리 한가운데 자리잡은 유리(有利)가 있었다.
당시 머릿속을 점령하던 특이점은 다방 이름 '짐(朕)'이었다. 대체로 다방 상호는 대중적이거나 부르기 편한 명칭, 혹은 세련된 양풍(洋風)으로 작명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다방은 특이했다. 아주 간단 명료해서 발음하기는 좋아도 뜻은 전혀 요해(了解)가 되지 않는 한자였던 것이다. 일상에 거의 쓰이지 않는 이 한자의 뜻을 제대로 알게 되고, 획 또한 틀리지 않고 쓸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훨씬 뒤의 일이었다.
'짐다방'에는 종종 그 위층의 탁구장에서 내기를 하고 땀을 흘린 뒤 가 앉곤 했다. '은성다방'과는 지척이어서 거기 어른들의 분위기에 숨이 막히면 이리로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지만, 워낙 소양이 진중하지 못하고 성정도 고급 음악을 제대로 끝까지 듣지 못할 만큼 경망해서 도무지 '짐다방'은 체질에 맞지를 않았다.
여학생들로는 I여고 출신 여학생들이 이 다방을 제법 선호했다. I여고는 당시 서울 쪽 대학에 입학생을 많이 배출한 여학교로 그런 성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짐다방' 출입을 삼간 것은 이들 여학생들이 모여 든 것이 한 빌미가 되었다. 차츰 여학생 손님의 수가 늘어나자 어디서 왔는지 좀 점잖지 못한 친구들까지 덩달아 많이 드나들었고, 약간의 불상사도 일어나 그 통에 발길을 끊고 말았다.
지금은 이 집이 그 자리인가, 저 가게가 다방이 있던 곳인가, 거기서 일어났던 일들도 다 까마득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려 긴가민가해졌지만, '짐다방!' 이렇게 입으로 뇌어 보면 떠오르는 한 가지 아주 슬픈 추억은 또렷하다.
그것은 군 입대 직전인 1969년 여름 이야기였다. '짐다방'에 걸음을 하지 않고 지내던 어느 날 고등학교 2년 밑의 후배 C가 거기서 DJ 일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는 바로 최병구 선생의 아들로서 서울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 입학해 있었다. 부친을 닮아 시를 썼고 개성이 강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개성을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벼르고 별러 궁금증과 함께 상당한 시기(猜忌)를 품고 '짐다방'으로 향했을 것이다. 후배였지만 우리 동기 여학생들에게까지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과 그가 수많은 여학생들에게 전한 편지 속의 시적인 구절들이 돌아와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이 시기의 한 원인이었다.
어둑한 실내에 무슨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지는 지금 기억에 없지만, 여러 명의 여학생들이 DJ 부스 유리창 너머로 C를 바라보던 장면은 확연하다. 그 중에는 E대 불어과에 다니던 K도 섞여 있었다. K는 C보다 2년 위로 우리와는 중학 시절부터 친교가 있던 I여고 출신이었다. 확 심사가 틀리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는 C를 불러 앉히고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설교를 했다. '문학을 하려면 그따위 겉멋만 잔뜩 든 DJ 노릇을 당장 그만 둬라' '연상의 여자를 끝끝내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시는 연애편지가 아니다. 순수가 생명이다' 등등 입이 있는 자는 돌아가면서 C를 성토하고 매도(罵倒)했다.
젊은 그의 눈 속의 허무를, 젊은 우리들은 읽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입대했고 더 이상 C의 일은 알 수 없었다. 그는 7대인가 8대인가 독자여서 군 입대가 면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1972년 제대를 얼마 앞둔 시점에서 허망하고 가슴 미어지는 소식을 들었다. C의 자살 소식이었다. 그의 죽음은 그까짓 가정 문제 때문도 여성 문제 때문도 아니었다. 그때는 이미 '짐다방' DJ 일에 서 손을 뗀 뒤였고 성정이 몹시 사나워져 있었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날 그를 앉혀 놓고 되지 못한 말로 책망하던 것이 그와 이승에서 보낸 마지막이었다. 정말이지 '짐다방'은 우리 철 없는 젊음의 한때를 이렇게 보내게도 했다.
/김윤식(시인)
'김윤식의 다방이야기 - 도시와예술의풍속화 다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인천'미담'·중앙동'아카데미'… 아련한 이름들 (0) | 2023.06.23 |
---|---|
짐다방과 별다방Ⅱ (0) | 2023.06.23 |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 Ⅲ (0) | 2023.06.23 |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 (0) | 2023.06.22 |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다방 전성기의 시작 (0) | 2023.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