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손이 정미소 최초의 근대식 방앗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12-23 12:56:05
‘담손이정미소’
최초 근대식 방앗간
글 김윤식 시인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미곡수출장면
“다시 20년 전부터 서인 땀손이(人名)방아깐이 생긴 이래 근년에는 일본인 상공업의 번영을 따라 선인(鮮人)의 직공의 수도 격증되야 목하 인쇄, 철공, 양촉(洋燭), 비루(飛陋), 제염, 양조(釀造), 인촌(燐寸), 염색, 인접(?摺, 매갈이), 정미 등 각 공장만 하야도 약 2천여 명이나 되고 더구나 각 정미소에 노니어 노역하는 천여의 여공이 잇슴은 이곳에서 처음 보앗다. 매일 아츰 저녁으로 화평(花平), 신화수리(新花水里), 송림(松林), 송현(松峴) 등 각리(各里)의 토옥(土屋)으로 들고 나는 백의군(白衣群)은 전부가 각 공장에서 활동하는 노작대(勞作隊)이다.”
인용한 글은 1924년 8월호 ‘개벽’ 잡지의 기사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의 일부분이다. 당시 철자(綴字)로 옮긴데다가 생소한 어휘도 섞여 있어 이해하는 데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용인즉 인천의 여러 상공업 분야 가운데 정미업이 가장 활황이며, 노동자 총 2천여 명 중 정미소 여공이 그 절반인 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인천항은 국내 최대의 미곡 집산지로 등장하게 되어 시중 도처에 미곡이 쌓이게 되었다. 이때 일본 상인들은 처음에는 벼를 섬 채로 수입해 갔으나 선임이 많이 들었으므로 이를 인천항에서 가공하여 백미로 가져가게 되었기 때문에 인천항에 정미업이 발달된 것이며, 미곡의 수출은 인천항에 정미공업을 싹트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인천상공회의소 120년사’의 내용으로 인천에 정미업이 발전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최초의 정미소는 눈치 빠른 진등(進藤鹿之助)이라는 일본인이 1889년 3월 중구 중앙동 4가에 설립한 인천정미소(仁川精米所)다. 물론 그 전에는 ‘인력으로 커다란 흙 맷돌을 돌리는 매갈이공장’이 있었지만 질이나 양에 있어서 정미소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렇기는 해도 인천정미소 역시 하루 16시간을 가동해 고작 30석 정도를 정미하는 여전히 빈약한 수준이었다. 이때 인천항에 정착한 미국인 무역상 타운센드(Townsend)가 중구 송학동 3가에 본국으로부터 엥겔식 증기동력 정미기 4대를 들여 정미소를 차린다. 뉴욕제인 이 기계는 ‘쌀을 곱게 마찰했기 때문에 윤기가 나고 깨끗하며 돌의 섞임이 전혀 없는’ 신안특허품이기도 했다.
‘타운센드’라는 발음이 설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정미소를 ‘담손이정미소’라고 불렀는데, 앞에 인용한 글에 ‘땀손이방아깐’이란 구절이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1892년에 설립된 이 담손이정미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로 기록된다.
자료에는 이 해 9월에 일본인 오전(奧田)도 송학동에 정미소를 차렸는데 이때 인천정미소를 인수한 것으로 보이며, 러일전쟁 후에는 담손이정미소까지 수중에 넣어 오전정미소(奧田精米所)라는 이름으로 인천 ‘정미 왕국의 첫 테이프’를 끊고, 러일전쟁을 전후해서는 역무(力武), 가등(加藤), 십천(?川), 삼야(衫野), 제등(齊藤), 유마(有馬) 등의 대형 기계식 정미소가 생겨나 바야흐로 인천항에 정미업 시대를 연다.
특히 역무, 가등 두 정미소는 1920년대 이후 시설이나 생산 능력에서 선두를 달리는 큰 업체였는데,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과 인간적인 대우 문제로 툭하면 노사가 충돌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대부분의 정미소 역시 임금 문제로 자주 노사분쟁을 일으켰다. 이런 경험이 후일 인천 노동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인 경영의 정미소는 1924년 4월 유군성(劉君星)이 신흥동에 세운 유군성정미소가 최초다. 이듬해에 주명기(朱命基)의 주명기정미소, 1929년에 김태훈정미소(金泰勳精米所)와 뒤이어 이흥선정미소(李興善精米所), 이순일정미소(李順日精米所) 등이 생겨나 일본인들과 경쟁했다. 광복 후에는 주로 ‘일본인 정미소를 인계한 고려, 협신, 삼화, 대륙정미소 등이 명맥’을 이어오다가 근일에 이르러 모두 폐업하면서 곡항 인천의 정미업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튼 당시는 중추 산업인 정미업에 관련한 이런 우스개도 있었던 모양이다. 1933년 2월호 <별건곤> 잡지에 실린 유머 모음집에서 ‘백노동(白勞動)’이란 웃음거리를 옮겨 본다.
지배인 『자네 그전에 어대서 노동해 본 경험이 잇나?』
구직자 『네. 잇고 말고요 날마다 새하얏케 되도록 힘드는 노동을 해 보앗는 걸요!』
지배인 『응~ 하얏케 되는 노동? 아마 새까맛케 되도록이란 말을 잘못하는 말이겠지!』
구직자 『아니요. 천만에 말슴입니다. 이전에 정미소에서 일을 하엿는 걸요.』
별난 역사, 별난 물건 시리즈에 게재된 정미업 관련 물건 및 사진은 중구 차이나타운에 있는 <인천근대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엔 희귀한 근대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료는 성인 2천원, 학생 1천원. 문의 76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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