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억의 술집들 上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05-25 14:37:30
가난한 문인 적셔주던 그때 그리워…
시작을 술집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좀 뭣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도 인천의 한 부분이라면 선후 가리지 않고 쓰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듯싶다.
큰 이름은 내지 못했으나 오늘날까지 글 씁네 하며 살아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집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술집이라도 가무(歌舞)를 익힌 기생이 있고 고급 요리가 나오는, 이른바 방석집이라는 데는 가 본 바 없으니 고작 선술집, 대폿집 수준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런 한데 술집들조차 이제는 거의 사라져가고, 더불어 출입하던 인천 인사들 또한 적막하니, 쓸쓸한 감회로서도 몇 줄 기록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물론 술집 이야기라고 해야 지면이 짧으니 그저 어디에 무슨 집이 있었네 하는 정도일 것이다. 자, 그럼 중구 용동의 막걸리 집부터 시작해 보자.
용동은 일제시대부터 기생조합인 권번(券番)이 있었을 정도로 인천 유흥가의 중심지였다.
이른바 요정이라고 불리던 값비싼 술집들이 후일까지도 빽빽이 들어차 있던 곳이었다. 그것이 70년대 이후 맥주집의 번성과 함께 불어닥친 음주 문화의 변화와 80년대 시청 이전 등으로 인한 중구 지역 낙후로 이어지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신포동은 시장통을 끼고 있어서 아무래도 서민적인 선술집이 많았다. 시장에서 일하는 인부, 지게꾼 상대의 허름한 집들이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이제는 한산하기 그지없어서 한 두 집을 남기고는 다 사라져 갔다.
'인천 하면 신포동!' 이렇게 말하던 옛 시절 그 은성했던 날들은 아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여전히 그때를 못 잊어하는 토박이 몇 사람만 하릴없이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린다.
용동 ‘큰우물집’은 1960년대 대학시절 저녁이면 동인천에서 기차를 내려 우르르 달려가던 막걸리 집이었다. 큰우물 바로 옆 골목 초입에 있었는데 애초에는 간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탁자 네댓 개가 촘촘히 놓인 불과 몇 평 안 되는 작은 술청이었지만 용돈이 궁한 대학생이나 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 집의 명물 안주는 노가리구이였는데 값이 헐해서 크게 환영받았다. 바삭하게 구워 대가리를 비틀어 놓고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맛이 흠잡을 데 없었다. 1970년대까지도 시인 최병구, 손설향, 서예가 장인식 선생 등을 모시고 자주 드나들었다. 약주가 거나해지면 장인식 선생은 종종 논어를 강론했는데 옆에서 구시렁대다가 크게 야단을 맞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림을 그리던 고 김영수 군, 원용연 군 등의 기억이 아련하다. 후일 부지런히 돈을 모은 주인이 건물을 새로 올리고 번듯하게 실내도 꾸미고 해서 번창하는 듯했으나 결국 문을 닫았다고 한다. 80년대 후반 무렵부터 시작된 중구의 몰락을 견뎌내기가 힘겨웠던 것 같다. 대학생들에게는 실로 천국 같은 곳이었는데…. 그 주인이 아직 생존해 있다고 하는데 아마 일흔을 훨씬 넘겼을 것이다.
상호가 ‘골목집’이었던가. 동인천 옛 주택은행 옆 골목 안 언덕으로 오르는 초입 경사(傾斜) 길에 있던 이 막걸리집은 누추한 대로 돼비지, 두부부침, 계란말이가 가효(佳肴)로 소문났었다. 80년대까지 언덕 위쪽으로는 사창(私娼)이 있어서 이 집 출입이 다소 꺼림칙했으나 주머니가 헐한 문인들은 어쩔 수 없이 찾아들었다. 배다리에 ‘여백(餘白)’이라는 희한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미술 선생 김진안 군과 자주 드나들었다.
선술집 ‘열차집’은 동인천역 광장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청과물 가게를 두어 채 지나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 안 중간쯤에 있었다. 집이 골목을 따라 좁고 길게, 마치 열차 칸 모양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바로 뒤로 기차가 다닌 때문이었는지 주점 이름을 모두들 ‘열차집’이라고 불렀다. 안주는 오늘날 포장마차처럼 다양했던 생각이 난다. 학생들, 인근 상인, 리어카꾼, 지게꾼들이 드나들었다.
대형 고급 맥주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때가 아마 1960년대 말일 것이다. 그 효시가 당시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던 용동 큰우물거리에 등장한 ‘로젠켈라’였다. 이 집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생맥주와 고급 안주와 호화로운 인테리어, 한 마디로 한량들이 가는 레스토랑도 겸한, 라이브 연주도 하던 집이었다. ‘화백’ 역시도 큰우물거리에 있던, 넓은 실내를 가진 호화 맥주집이자 레스토랑으로 로젠켈라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 후 몇 집이 더 문을 열었었지만 지금은 단 한 곳도 남아 있지 않다.
경동 안쪽에 있던 몇 군데, 생굴과 조개 그리고 물 좋은 생선회와 서덜탕, 구이를 내놓던 한송집 같은 노포가 몇 채 있었으나 은근히 가격이 높아 자주 출입하지는 못했다. 지금은 다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술집이라면 신포동 일대를 빼놓을 수 없다. 거두절미하고 사라진 추억의 선술집 ‘백항아리집’부터 이름을 댄다. 이 집은 6.25 직후에 신포시장 아랫길 중간에 문을 열었는데, 특이한 것은 1960년대 말까지도 전기를 놓지 않아 카바이드 불을 켰던 점이다. 초기에는 물론 구루마꾼, 지게꾼, 막일꾼들이 많이 찾았지만 차차 인천의 웬만한 유명 인사들, 특히 문화 예술 쪽 사람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
1990년대 초반 문을 닫을 때까지 스텐 잔에 약주술을 부어 주었다. 술청 삼면 벽에 빙 둘러 선반처럼 받침을 달아 거기에 술잔을 놓고 의자 없이 서서 마시는 구조였다. 그러니까 허기진 인부나 구루마꾼이 들어와 후딱 잔술 한잔을 들도록 꾸민 것이다. 때문에 안주라고는 시장에 흔한 황새기 나부랭이나 빈약하고 썰렁한 감자국이 고작이었다.
안주 없이 마시는 사람에게 거저 내놓는 것이 양념하지 않은 날 새우젓이었다. 문 앞에 지게를 세운 인부가 들어와 약주 한 양재기를 들이키고 손으로 짠 새우젓을 집어 입에 털어 넣고 돌아서는 그런 집이었다. 이 집에 당시 인천의 문화 예술인들이 찾아든 것은 아무래도 황량한 주머니 사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황새기를 두어 마리 굽거나 작은 양은그릇에 감자국을 떠 놓는 ‘잔칫날’은 몇 번 없는 썩 운이 좋은 경우로 아마 주객 중에 교사나 공무원이 월급을 탄 날이었을 것이다. 안주와 관련해서 이 집은 자기 먹을 것을 가져가도 되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멸치 꽁다리, 땅콩 부스러기, 혹 호사스럽게 어란(魚卵)쪽을 들고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주인 영감님이 타계한 후 할머니(부인)가 오래도록 운영했고 다시 딸의 도움으로 몇 년 가게를 더 보았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 1990년대 들면서 문을 닫았다. 60년대 대학생 시절, 문을 들어서면 무조건 술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영감님의 모습이나, 늘 쌀쌀하다 못해 찬바람이 부는 할머니 음성도 다 인천의 한때 추억으로 남는다.
여기를 드나들던 사람들은 참으로 많지만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소설가 심창화 선생, 시인 박송 선생, 시인 최병구 선생, 화가 우문국 선생, 선영제 국장, 이희철 선생, 서예가 부달선 선생, 김인홍 선생, 평론가 김양수 선생, 화가 정순일 선생, 고촌 김영일 화백, 상임시사편찬위원 윤용식 선생, 중앙동에 사시던 야구인 김 선생, 권투인 김 선생, 아동문학가 김구연 형, 장주봉 화백, 시인 채성병 군 등등! 그리고 대동강집 김 선생, 신신옥 사장을 비롯한 많은 시장 사람들, 특히 이 집에는 1960년대 말 결성된 미슬 동호회 오소회(五素會) 멤버였던 당시 윤갑로 인천시장도 이따금 들르곤 했다.
‘백항아리집’은 냉장고 대신에 출입문 옆 땅바닥에 큰 오지항아리를 묻어 약주술을 보관했다. 그런 용도였는지 모르지만, 그 옆 선반 아래에 놓여 있던 커다란 빈 백자 항아리가 있었다. 그 때문에 ‘백항리, 백항아리’ 불리다가 그것이 상호처럼 굳어진 것이다. 이 백항아리 역시도 남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새 임자인즉 신흥동 긴담모퉁이 송도중학교 쪽 초입에 있는 ‘구주정육점’ 안주인으로, 연전에 고 정구홍 선배가 그리로 안내를 해 가서 들여다보며 잠시 감회에 젖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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