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비변사의 방비책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4-16 22:49:05
"바닷속 잠수해 유별난 기계로 적선을…"
(62) 비변사의 방비책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천안함 생존자들의 “쾅, 쾅 두 번의 굉음을 들었다”는 증언을 통해 사고 발생 원인이 점차 ‘어뢰·기뢰 버블제트와 일치’해 간다는 판단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면 누구의 소행인지, 또 수중 침투에 의한 것인지 여부도 밝혀질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은밀한 잠수와 수중 침투에 관해서는 300년 전인 1711년(숙종 37) 2월15일 ‘비변사(備邊司)의 계와 방비책’에도 나와 있다. 백령도 등 해안 요충에 대한 방비책을 임금께 아뢰는 내용 중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왜적 등 외적에 대비한 것이었다.
비변사는 1517년(중종 12) 6월에 설치된 ‘남쪽 해안과 북쪽 국경지대에 대한 국방 대책을 사전에 마련하기 위해 설치’된 군사 기구였다. 청사가 설치되고 관원이 임명된 것은 1555년이었지만 이때에는 전국의 군무를 처리하는 기구로 발전했고, 임진왜란 후에는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산업, 교통, 통신 등 주요 국정 전반을 여기서 토의, 결정했다. 그리고 그 주요 내용을 기록하여 1년에 1권씩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엮어냈는데,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등록 273권이 현존한다.
이 중, 앞서 말한 숙종 37년 기록에 특히 백령도 방비와 더불어 해전(海戰)에 있어서 잠수와 수중 침투에 대한 언급이 보이는 것이다.
“모름지기 속히 연해의 배를 댈 만한 곳을 자세히 살펴서 혹 진보를 옮긴다든지 혹 돈대를 설치한다든지 하여 대포를 많이 비치하고 저들의 공격을 막고 또 해상 제도(諸島)의 요해처를 엄히 경비하여야 할 일입니다. 마치 백령도(白翎島) 같은데 서해와 남해의 배들이 바람을 피하여 정박하는 곳으로 전에는 해랑적(海浪賊)이 몰래 점거하기도 한 곳입니다. 지금 비록 진보를 두고는 있으나 형세가 몹시 미약하니 불가불 군병을 더하여 방수하여야 하겠는데 대청(大靑) 소청(小靑) 등의 섬에 백성을 모집해 들여 보전케 하기를 대체로 백령도의 제도대로 하여 기각지세(藪角之勢)를 이룬다면 해적이 필시 깊은 걱정거리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행부사직 이우항(李宇恒)이 진언한 연해에 대한 방비책이다. 거기에 예조판서 이돈토(李敦土)는 바로 기발한 수중 침투 작전에 대해서 건의하고 있다. 오늘날 쓰이는 작전이나 진배없다.
“이제라도 제도에 밀령(密令)을 내려 잠수군(潛水軍)과 어채군(漁採軍)을 모집하게 하여 작은 배를 타고 바다 속에 잠수하여 유별난 기계를 써서 적선에 물이 스며들게 하여 침몰시킨 자가 있으면 높은 품계와 후한 상을 아끼지 않겠다고 한다면 만일의 경우 힘을 얻는 도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천안함의 사고 원인은 선체 인양과 해저에 흩어졌을 각종 파편 등을 수거해 조사하면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모 일간지 기사에는 “우리가 적당하게 원인을 조사해서 발표하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인정 안 할지도 모른다”는 대통령의 발언도 실려 있다. 이번 참극을 당하면서 ‘유별난 기계를 써’ ‘죄를 지은 사람들이’ 결코 우리 동족이 아니기를 기대해 본다. 더불어 국가를 위해 꽃다운 젊음을 바친 46명 영령들과 한 준위의 명복을 머리 숙여 빈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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