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백범의 첫 인천 방문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4-16 22:54:17
'옥살이' 인연… 민정시찰 첫 걸음
(63) 백범의 첫 인천 방문
“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 깊은 곳이었다. 스물두 살에 인천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한 살 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었다. 저 축항에는 내피와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하여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 해 전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에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
『백범일지』 하권 말미, ‘조국 땅에 돌아와서’ 편에 보이는 구절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과의 ‘유별난 인연’을 말하며 귀국 후 제일 먼저 인천 땅을 찾은 내력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백범의 또 다른 인천 방문 사진.(1947.11.12)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 환국하자마자 이내 12월말부터 시작된 신탁통치 반대 운동 전개와 이듬해 2월 비상국민회의 조직,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 취임, 임정(臨政)에의 정권 이양 요청을 위한 브라운 미 군정장관과의 회동 등의 바쁜 일정을 보낸다. 그런 와중에도 제일 먼저 계획한 것이 민정시찰이었다.
국민의 삶을 위로하고 살피며, 국가 부흥을 위한 산업 건설의 중요성을 전파하기 위한 시찰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첫 대상지로 인천을 택한 것이다. 그때가 1946년 4월 14~15일로 64년 전 바로 어제와 그제 날짜였다.
“민주의원 김구 총리는 1일 오전 10시반경 자동차로 수행 한탁렬(韓鐸烈) 씨를 대동하고 내인했다. 이번 내인한 목적은 산업시찰이 주(主)로, 내리예배당에서 오전 11시부터 감상담(感想談)을 이야기하고 숙소에 돌아갔는데 15일 계속하여 공장 시찰을 하고 귀경한다.”
이것은 백범의 인천행 목적과 첫날인 4월 14일 일정을 보도한 1946년 4월 16일자 자유신문 기사이다. 백범은 인천에 오는 길로 자신이 옥살이를 하던 인천감리서 바로 뒤편의 내리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강연을 한 것이다. 이날 ‘감상담’ 내용은 주로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옥바라지 하던 이야기로 전해진다. 그날 백범의 강연을 들은 어느 신자의 늦은 기록이다.
“사식이 들어올 때마다 밥 색깔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하얀 쌀밥이고 또 다음날은 보리밥이더니 한 날은 온갖 곡식이 들어간 잡곡밥이었습니다. 이상하긴 했지만 까닭을 알 리 없는 저는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지요. (중략) 제가 인천에 내려온 것도 그때 어머니께서 못난 자식에게 사식을 들여보내기 위해 꽁꽁 어는 겨울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니셨던 그 거리를 걸어 보고 싶어서입니다."
4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날 인천시민 유지 백여 명의 초대로 동양헌(東洋軒)에서 간소한 환영연을 가진 후 현하 우리나라 산업 건설의 절실함을 피력하고, 지난날 일본인을 타살하고 영어(囹圄)의 몸으로 축항 작업에 취로하였던 당시의 감회를 토로하여 모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요지의 이틀째 동정이 실려 있다.
서두의 백범일지 구절과 두 신문 기사 그리고 내리교회에서의 강연 내용을 종합하면 백범 자신이 민정시찰, 산업시찰을 계획하면서 첫 방문지로 인천을 꼽은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그 자신 끔찍한 ‘악연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이 다른 곳보다 오히려 더 빨리 찾아보고 싶었었는지도 모른다.
불과 64년 전 어제 그제, 인천에서의 백범의 강연 내용은 어느 신자 한 분의 기억이 고작이고, 첫 산업 시찰에 대한 기록은 그나마 남아 있지도 않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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