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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完) 양무호(揚武號)

by 형과니 2023. 6. 12.

() 양무호(揚武號)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4-27 23:01:35

 

중고 함선 구입 '해군창설 신호탄'

() 양무호(揚武號)

 

“1903년 대한제국이 구입한 증기선 무장 군함이다.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군함보유를 계속 소망하여 이를 다각적으로 모색하였으나 여의치 않다가 1903년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으로부터 이 군함을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영국에서 제조되어 일본 해군이 사용하던 중고 수송선에 대포 4문과 소포 4문을 장착하여 전투용 함선으로 개장한 배였다.

 

1903415일 인천에 입항하였던 이 함선은 3,436톤으로 길이는 103.8m, 폭은 1.3m였으며, 승무원 72명이 탑승하였다. 190398일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순성(愼順晟)이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어 선박을 운행하였다. 그러나 수송선을 개장한 이 군함의 구입에 무려 55만 원이라는 거액의 예산이 소요되었고 고종의 등극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액의 국가 예산을 낭비하였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1903년 상반기 탁지부의 예산이 약 17만 원 정도로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 정부로서는, 대부분의 세수가 이미 차관의 담보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양무호 구입 대금의 변제는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장차 물품을 구입할 때 미쓰이 상사에 특혜를 베푸는 것을 조건으로 선박 가격을 20만 원으로 인하한 후에도 일시불로 지불하지 못하고 매달 5,000원씩에 빌려 쓰게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군은 양무호를 군수물자 수송선으로 사용하였으며 결국 다시 화물선으로 개조하여 해원양성소로 사용하였다. 결국 양무호는 190911월 경매를 통해 일본의 하라다상회(原田商會)42천원에 매각되었다.”

 

장학근이 쓴 조선시대해양방위사내용 일부이다. 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으면 중고 군함 1척을 구입하는데 이런 어려움을 겪었을까 싶다. 더군다나 먼저 군함부터 구입해 놓고는 그 운용에 대해서 후에 이러니저러니 논란을 거듭하고 있었으니 나라의 꼴이 참 딱하기도 하였다.

 

 

양무호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지금은 천하 각국이 서로 관계를 가지며 경쟁하고 있으므로 해군과 전함(戰艦)이 제압을 하고 방어를 하는 좋은 계책이라고 여기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당한 우리 대한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도 한 명의 해군과 한 척의 군함도 없어 오랫동안 이웃 나라에게 한심스럽다는 빈축을 사고 있으니 무엇이 이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라며 이미 구입해 왔으나 아직 운용하지 못하고 있는 군함 양무호의 운용책의 일환으로 해군 창설을 상소한다.

 

이에 대해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권중현(權重顯)각부(各府), 각원(各院)의 일을 주관하는 관리들이 의정부와 의논하지 않고 감히 외국인과 약조를 맺고서 국고(國庫)의 중대한 재물을 함부로 써서 급하지 않은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근간의 일을 가지고 말하면 군부에서 구입한 총과 탄알을 만들기 위한 기계와 군함 양무호입니다.”라며 질책을 하고 있다.

 

이런 논란과 곡절 끝에 인천항이 모항이었던 양무호는 구입 6년 만에 애초 가격의 10분의 1도 못되는 헐값에 일본 상인에게 되팔리고 말았지만, 이 배를 처음 이끈 선구자가 바로 후일 인천에 터를 잡는 신순성 함장이다. 그의 장남이 의사이자 향토사학자였던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이고, 다시 그의 손자가 아시아올림픽평의회 부회장인 신용석(愼鏞碩) 씨로 3대에 걸쳐 명문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인천은 근대 한국 해군의 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천해역에서 발생한 천안함 사고를 계기로 더욱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도록 우리 인천이 선구적으로 나서서 모금운동 같은 것이라도 벌이면 어떨까. 김윤식·시인/인천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