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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2. 추억의 술집들 下

by 형과니 2023. 6. 13.

2. 추억의 술집들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05-27 23:52:38

 

세상만사 얘기하며 울고 웃고 아련한 추억으로

 

신포동의 유명한 대폿집으로는 백항아리집에서 세 번째 길로 내려서는 중간 골목 좌우에 있던 신포주점미미집을 빼놓을 수 없다. ‘중간 골목이란 신포시장 두 번째 길에서, 보신탕으로 유명한 북청집이 한가운데 들어 있는 샛길, 곧 옛날 함흥냉면집 화신면옥쪽으로 뻗은 골목을 말한다. 이 두 집은 골목 안에 서로 마주보듯이 있었다가 지금은 신포주점만 홀로 남아 지난날의 영화(榮華)를 뒤로 한 채 퇴락해 가고 있다.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1950년대에 주인 한 씨가 중구 경동에서 양복점을 했는데 불운이 겹쳐 안주인이 이 술집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청강이라는 옥호를 쓰다가 후에 신포주점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두어 평의 목로와 신을 벗고 올라앉는 평상처럼 생긴 구들방이 있었는데 밀려드는 손님을 받기 위해 뜯어내 술청을 넓혔다. 우리 또래들이 본격적으로 이 집을 기웃거린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주인아주머니로부터 온갖 괄시를 다 받았다.

 

우리 같은 대학생층과 간혹 동반하는 여학생 손님에 대해서는 찬바람이 일도록 냉정하고 싸늘하게 문전박대를 했던 것이다. 항시 술이 떨어졌다거나 탁자마다 예약이 다 되었다는 이유를 대며 쌀쌀하게 입장을 거부했다. 그나마 나이 지긋한 어른이 동행할 경우에만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몇 십 년이 지난 후일, 그 연유를 들으니 대학생층은 안주는 거의 시키지 않고 거저 내놓는 김치나 짠지 보시기만을 수없이 비워대 매상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한눈이라도 파는 날이면 영락없이 술값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영업방침(?)을 정했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1960년대, 아직 전쟁의 상흔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빈곤 속에서 벌어졌던 풍경이랄까.

 

뭐니 뭐니 해도 신포주점은 안주에서 백항아리집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술은 똑같이 김포(金鋪)’ 약주를 주종으로 했지만 안주는 종류가 훨씬 다양했다. 양념간장을 얹어 먹는 두부중탕, 구수한 돼비지, 감자탕, 그리고 호사스런 달걀프라이, 우스갯말로 군화(軍靴)를 삶아 만든다는 족편에 구덕구덕 말린 박대, 서대, 가자미구이와 홍어찜, 그리고 꽃게장, 우무, 통북어구이 같은 안주가 이 집의 장기였다.

 

아아, 정주성(定州城)!’의 시인 박송 씨가 주말이면 서울에서 내려와 약주병을 얹는 선반 옆에 선 채로 두부를 안주삼아 술잔을 들던 모습이 떠오른다. 1980년대 초중반 후배이자 회사 동료였던 고 한기천군과는 단짝으로 이 집을 출입했는데, 둘이 뜯은 북어만 어림잡아도 아마 기백(幾百)에 이르지 않았을까 싶다.

 

미미집은 그야말로 가난과 궁상과 눈물과 시가 있던 집이었다. 5백 원짜리 마른 북어와 역시 5백 원이던, 속칭 법주병(法酒甁)’ 약주를 손설향 시인 등에게 매일 무상으로 내놓던 착한 보니파시오 씨가 주인이었다. 1980년에 화신면옥을 마주한 골목 모서리 퇴락한 집에 문을 열었다가 얼마 후 신포주점 앞으로 옮겼다.

 

천주교인인 주인의 인심이 후해서였는지 웃으면 금이빨이 환하게 보이던 주방 아주머니도 가난한 우리를 위해 보쌈 잎이나 무채를 슬며시 접시에 담아내곤 했다. 매일 저녁 많게는 스무 명, 적게는 칠팔 명이 모여들어 방담과 재치로 웃었고, 시를 이야기하며 황홀했고, 세상을 말하며 침울해 하기도 했다.

 

랑승만 시인, 정순일 화백, 미술 평론가 김인환 선배, 고촌 김영일 화백, 장주봉 화백, 아동문학가 김구연, 허욱 시인, 이석인 시인, 조우성 시인, 채성병 시인, 송서해 시인, 이효윤 시인, 김학균 시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1990년대 중반에 중구 선화동 쪽으로 이사했다가 얼마 후 영영 문을 닫고 말았다.

 

빈대떡으로 유명했던 집이 화신면옥이 있는 큰 골목 중간의 대전집이다. 지금도 즉석에서 돼지기름을 번철에 둘러 부쳐 주는데, 왜 그런지 맛이 옛날만 못한 듯이 느껴진다. 돼지족도 이 집의 대표 안주였다. 지금은 거리가 죽어 초라한 느낌이나, 1990년대까지 현 주인의 어머니가 경영하던 무렵이 진정 은성(殷盛)한 시절이었다. 물론 집을 고친 후로도 웬만한 회사 회식을 2층 방에서 베풀곤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주 시들해졌다. 이 집 바로 옆에 비슷한 충남집청대집이 나란히 있었다.

 

길 맞은편의 다복집은 이 거리에 남은 몇 안 되는 오랜 집이라고 할 것이다. 이집은 1960년대 중반에 처음 가 보았는데 보쌈과, 두부 반 모의 속을 3분의2쯤 갈라 그 안에 돼지고기를 다져 양념에 버무린 소를 넣어 번철에 부쳐 주는 두부샌드위치와 스지탕, 각종 저냐, 그리고 꽃게장이 특히 유명했다.

 

당시 대학생 또래에게는 가격이 높은 편이어서 상시 출입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뚝뚝한 대로 술값을 십만 원 단위로 불러 손님들을 놀라게 하던 위트(?)를 지닌 주인이 작년에 작고한 이래 딸이 맡아 운영한다. 주인 생전에 들은 바로는 인천에서 스지탕을 안주로 개발한 당사자가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스지탕 맛은 근동에 제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집의 또 다른 특징은 돼지족을 자작으로 삶아 낸다는 점이다. ‘카라멜이라는 색소를 바르지 않고 일반 가정에서 삶듯 한다. 맛이 담백해서 올드 팬들은 요즘도 이곳을 찾는다. 족발을 좋아하시던 은사 시인 최승렬 선생의 단골집이기도 했는데, 선생은 족발에서 오려낸 동그랗게 생긴 돈살이라는 부위를 특히 즐겨 자셨다.

 

외환은행 뒷길 끝 쪽에 있던 오술해집은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안주도 아구탕을 주로 하게 되었지만 지난날에는 여느 술집과 비슷했다. 1980년대를 전후해 철판구이 부대고기집으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술꾼들의 저녁 순례지로서 항시 입에 오르내렸다.

 

신포동 염염집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1970년대 몇 번 주머니가 두둑한 선배들에 이끌려 드나들었다. 흔히 말하는 대포집도 선술집도 아닌 상급 주점이었다. 거기서 먹은 안주가 생선회와 스지탕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권투 챔피언 서강일 씨의 장모가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중구 관동 초입 건너에 있는 요즘 염염집은 그 옛날 집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마냥집은 엊그제까지도 돌아가신 노파의 뒤를 이어 딸이 운영했는데 그새 또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지금은 그런 맛을 내는 집이 없을 정도로 노파 손에서 만들어진 족발과 모듬전이 특히 수했다. 이른 낮에 가면 돼지족을 삶거나 전을 부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인자하고 깨끗한 노파여서 성미가 곧으셨던 우문국 화백이나 김인홍 선생이 친근하게 출입했다.

 

수원집6·25 이후 옛날 인천 부두가 인천역 뒤에 있을 때,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북성동 언덕 중턱에 있던 밴댕이집의 후신이다. 그 원조집은 간판이 없는 채 연유를 모를 인민군집으로 불리었는데 헐한 잡고기와 밴댕이회와 구이를 됫병 소주, 약주와 함께 팔았다. 1970년대 그 집에서 일을 보아주던 신 씨가 지금의 자리로 내려와 차린 집이다.

 

오랜 세월 하인천역 일대 전통, 명물집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손님들이 내려온다. 이 집의 번창과 함께 인근에 몇 집 밴댕이회집이 생겨났다. 몇 푼 안 되는 술값으로도 우문국 선생, 김인홍 선생, 정순일 화백, 고 김영일 화백 등과 동락(同樂)하던 시절이 그립다. 서울 살던 정공채 선배 시인이 인천으로 이사를 해 함께 밴댕이를 즐겼는데 최근 그 분도 타계를 해서 이제는 누구 하나 대작할 이가 없다.

 

많은 시인들이 신포동시장 술집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고 최병구(1924~1981) 시인도 허전한 마음을 이렇게 한잔 술로 달랬다.

 

 

 

아무도 오지 않는

집이라 해도

외로워 말자

 

혼자서 누워 생각하면

나도 찾아가고 싶은 곳

 

보고픈 얼굴도 있지만

참는 사랑의 마음만

 

손자와 딸도

보고 싶지만

 

자가(子家)로 가는

지워지지 않을

마음에 모습을 그립니다.

 

흑발(黑髮)을 날리며

신포동시장에 가면

술집이 있습니다.

 

술잔을 들고 구름을 보면

선인(仙人)의 옷자락이

내 보고픈 얼굴들 같이

흘러갑니다.

 

-최병구, 버리고 간 노래 중

어느 여름날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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