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의 시적 편력과 비판적 인식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9-07-10 15:49:15
오장환의 시적 편력과 비판적 인식
이 원 규 (박사과정수료)
- 목 차 -
1. 머리말
2. 현실인식과 전통부정 - 『城壁』
3. 상실의식과 자아찾기의 몸부림-『城壁』
4. 죽음충동에서 생명력 회복으로-『獻詞』,『나 사는 곳』
5. 사회현실에의 참여-『병든 서울』
6. 맺음말
○ 참고문헌 ○
1. 머리말
1933년 11월『조선문학』에 시「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한 吳章煥은, 그후『시인부락』,『자오선』의 동인활동과 더불어 4권의 시집 『城壁』(1937, 풍림사),『獻詞』(1939, 남만서방),『병든서울』(1946, 정음사),『나 사는 곳』(1947, 헌문사)을 간행하는 등 당시의 어떤 시인보다 두드러진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1947년 말 월북함으로써 그후 분단국가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그 존재를 상실하게 되었다. 1988년 7월19일 ‘월북작가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되었지만, 아직까지 월북 이후 오장환의 창작활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 35년은 이 땅에 대한 식민지배를 위한 탄압과 고유성 말살 및 우민화, 철저한 경제적 수탈로 일관되었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암흑기 속에서 오장환은 “진정한 문학이란 인간을 위한 문학”1)이라 정의하였고, 그것을 위해 “신뢰할 만한 현실”2)을 갈구하였다. 다시 말해 당시 오장환에게 가장 절실한 시적 대상은 인간의 현실과, 그 현실에 대처해나가는 자아의 태도3)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국가 상실과 식민지적 근대화의 모순이라는 현실은 오장환에게 기존의 가치와 전통에 대한 회의를 갖게 했으며 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확대시켰다. 따라서 오장환의 시적 편력을 주도하는 것은 ‘부정의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2. 현실인식과 전통부정 - 『城壁』
오장환은 자신의 현실을 ‘상실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과 시대의 균열을 일으킨 근원적 원인을 직시한다.4) 그 결과 오장환은 기존의 가치체계가 응집되어있는 전통-그 중에서도 봉건적 유교제도와 그 관습들-을 부정의 대상으로 제시하게 된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姓氏譜」(『조선일보』, 1936.11.10)5) 전문 -
미래지향적 현실에 저해되는 유교적 관습의 하나로서 오장환은 ‘성씨보’를 거론한다. 그가 관찰한 성씨보는 존재의 근거를 객관적으로 밝혀주는 유산이 아니라, “대국숭배를 유심히 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창작”되고 “매매”되기까지 하며 관습의 가식적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자였다. 성씨보를 조작하고 매매하여 존재의 근거를 어지럽히는 주인공들은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보기에 그 똑똑함은 무거운 “껍데기”같은 허세와 “수퉁”한 “애욕”을 드러내는 우매함이었다. 유교적 관습이라는 것 때문에 우매한 사람들이 조작한 성씨보의 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는 사실은 오장환에게 치욕이었다.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라고 자기 존재의 문서적 근거를 부정함은 성씨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사회를 부정하는 동시에, 봉건적 유교적 관습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다. 위의 시는 시적 화자를 시인과 동일시6)하여 사실성을 높이고 있으며, 부정의 정도도 극단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부제인 ‘오래인 관습-그것은 전통을 말한다.’는 오장환이 성씨보와 유교적 관습을 해석하는 시각을 암시한다. 원래 전통이란 관습 가운데서 역사적 배경과 높은 규범적 의의를 지닌 것으로서 계통에 의해 전승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장환이 바라본 현실에서는 오히려 버려야할 유교적 관습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통인양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풍자성 발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성씨보를 조작하려고 했을까. 유교적 사회의 지배 집단인 ‘양반’들 틈에 포함되고자 함이다. 그러나 ‘양반’의 실상은「宗家」(『풍림』, 1937.2)나「旌門」(『시인부락』, 1936.11) 등에서 드러나듯 볼품없었다.
돌담으로 튼튼히 가려놓은 집안엔 검은 기와집 종가가 살고 있었다. (중략) 종가에 사는 사람들은 아모 일을 안해도 지내왔었고 대대손손이 아모런 재조도 물리어받지는 못하야 종가집 영감님은 근시안경을 쓰고 눈을 찝찝거리며 먹을 궁리를 한다고 작인들에게 고리대금을 하여 살어나간다
-「宗家」중에서 -
유교적 관습의 대표적 공간인 “종가”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아모 일을 안해도 지내왔었고”/“아모런 재조도 물리어받지는 못하야”의 대비에서 드러나듯 “종가”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적 전통에 보호되어 있고 현실적으로는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을 통해 오장환은 유교적 관습의 보수성이 변모되어 가는 사회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괴리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전통에 대한 오장환의 비판적 인식은 근대성에 대한 지향을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랄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 즉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근대적 삶의 방식에 위배되는 관습의 부조리를 부정하고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의 근대화가 일제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모순성은 있었지만 어쨌든 당시의 현실은 근대화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봉건적 유습을 고수하려는 보수세력과 진보적 현실 사이에는 단절감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봉건적 유습에 의한 부조리는 오장환의 시에서 현실의 계급적 차별과 가진 자들의 위선적 측면으로 형상화된다.
장판방엔 곰팡이가 목화송이 피듯 피어났고 이 방 주인은 막벌이꾼. (중략) 방바닥도 눅진눅진하고 배창자도 눅진눅진하여 공복은 헌겁오래기처럼 뀌어져나오고 와그르르와그르르 숭얼거리어 뒷간 문턱을 드나들다 고이를 적셨다. -「雨期」(『시인부락』, 1936.11) 중에서 -
신사들은 식탁에 죽은 어육을 올려놓고 입천장을 핥으며 낚시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중략) 불순한 천후일수록 잘은 걸려드는 법이라고 행랑아범더러 어류들의 진기한 미끼, 파리나 지렝이를 잡어오라고 호령한다. 점잖은 신사들은 어떠한 유희에서나 예절 가운데에 행하여졌다.
-「魚肉」(『시인부락』, 1936.11) 중에서 -
「雨期」에서 묘사되고 있는“막벌이꾼”과「魚肉」에서 묘사되고 있는 “신사”의 생활은 대조적이다. “배창자도 눅진눅진하여 공복을 헌겁오래기처럼 뀌어나오”는 서민의 궁핍하고 비극적인 생활상과 낚시질로 시간을 채우며 “어떠한 유희에서나 예절 가운데에 행”함을 중시여기는 부유층의 생활을 대조적으로 묘사함으로써,「雨期」는 빈곤과 무력감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魚肉」은 풍자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7) “막벌이꾼”과 “신사” 등으로 유형화되는 인물관계의 제시를 통해 오장환은 橫적이 아닌 縱적 인간관계, 지배와 착취8)의 구조를 모순적 현실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魚肉」,「鯨」(『시인부락』,1936.11),「溫泉地」(『시인부락』,1936.11),「首府」(『낭만』, 1936.11)등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신사’는 봉건제도에서의 ‘양반’이 변형한 모습이다. 그들이 자처하는 신사의 유형은 도락을 모험적으로 일삼는 것으로 그들이 갖추는 예절이란 그러한 신사의 유형을 지키기 위한 형식이다.
오장환의 시적 편력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와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의 “닫힌 전망”9)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비롯되었으며, 비판적 인식의 기준은 “과거의 잘못된 인생을 원하는”10) 인간다움의 추구였다.
3. 상실의식과 자아찾기의 몸부림-『城壁』
일제강점기로 인한 국가 상실과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주체성 상실의 현실과 시대착오적 전통을 부정하는 오장환의 시적 현실에는 갈등과 방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즉 전통을 부정한다고 해서 새롭게 만나는 세계가 긍정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장 속에선 무작정하고 연기를 품고 무작정하고 생산을 한다
끼익 끼익 기름 마른 피대가 외마디 소리로 떠들 제
職工들은 키가 줄었다.
어제도 오늘도 동무는 죽어나갔다.
(중략)
썩은새에 굼벙이 떨어지는 추녀들
이런 집에선 먼 촌 일가로 부쳐온 工女들이 폐를 앓고
세멘의 쓰레기통 룸펜의 寓居―다리 밑 거적대기
노동숙박소
행려병자 無主屍―깡통
수부는 등줄기가 피가 나도록 긁는다.
신사들이 드난하는 곳
주삣주삣 하늘을 찔러 위협을 보이는 고층건물
(중략)
씩, 씩, 뽑아올라간 고층건물―
공식적으로 나열해가는 도시의 미관
수부는 가장 적은 면적 안에서 가장 많은 건물을 갖는다
수부는 무엇을 먹으며 華美로이 춤추는 것인가!
-「首府」중에서 -
11연 124행으로 구성된 위의 시는 당시 식민지 수도인 경성을 배경으로 하면서, 각 연을 단위로 하여 도시의 외형적 모습 이면에 있는 정신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을 기본으로 하여 물신화된 “수부”의 모습을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장환이 본 “수부”는 한 마디로 “비만하였다”. 배가 부른데도 걸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끊임없이 먹을 것을 탐하는 모습이다. 그러한 걸식증에는 욕망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이 배어 있다. 오장환이 이 시의 부제에서 “비만”을 거론한 의도는 수부의 이면에 감춰진 여러 가지 병적 요소를 비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비만의 한 유형으로 “신사”를 선택했는데 “신사”는 오장환의 시에서 남성 인물로는 가장 많이 등장한다. 오장환은 도시문명비판의 중심에 “양반”의 변형된 모습인 “신사”를 두면서, 무산계급과 유산계급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수부의 비인간적인 풍경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도시문명은 전통부정과 함께 오장환이 새롭게 만난 시적 대상으로 시적 편력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오장환의 문명 비판적 인식은 그의 시적 편력에서 살펴보았을 때 궁극적 지향점이 아니라, 근대성에 대한 모순을 체험적으로 인식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데카당스적 양상의 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를 단순히 ‘퇴폐주의’, ‘관능주의’로 부를 수 없는 것은 현실의 변화와 모순을 기피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진중한 시적 태도 때문이다.
직업소개소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무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어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 알로 깔리어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긴 그림자는 群集의 大河에 짓밟히었다.
(중략)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어 나의 마음을 傳書鳩와 같이 날려보낸다. 정든 고샅.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혀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중략)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惰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버린다.
-「黃昏」(미발표,『성벽』, 1937.8) 중에서 -
이 시는 1930년대 후반의 식민지 지식인이 겪는 무력감과 소외감을 “황혼”의 이미지와 연관시켜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병든 사나이”이다. 그 이유는 산업화되는 사회 속에서 “일 잘하는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 “타태와 무기력” 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실업자로서 황혼이 스며드는 도시의 거리를 배회한다. 번잡한 군중의 무리는 귀가길을 서두르느라 바쁘지만, 일터를 잃은 화자는 가로수에 몸을 기댄 채 희망과 절망까지 황혼에 맡겨버리는 무기력한 모습이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군중에 대하여 화자는 이질감과 소외감을 느끼다가 공허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이 의지할 곳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지만 기억 속의 고향도 “날마다 야위어가는” “병든 학”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 시적 화자에게 힘이 되지는 못했다.
“황혼”의 이미지도 “검푸른 황혼”에서 “뭇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우고 밟히며 스미어오는 황혼”, “어두워지는 황혼”, “보이지 않는 황혼”으로 바뀌어간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포착될 수 있는 황혼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인식의 내면화 효과를 증대시키고 있다.
결국 도시와 시적 화자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단절 속에서 오장환의 방황은 거칠어지고 급기야는 퇴폐적이고 위악적인 몸부림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자아찾기의 과정인 것이다.
망명한 귀족에 어울려 풍성한 도박. 컴컴한 골목 뒤에선 눈자위가 시푸른 淸人이 괴침을 훔칫거리면 길밖으로 달리어간다. 홍등녀의 嬌笑, 간드러지기야. 생명수! 생명수! 과연 너는 아편을 가졌다. 항시의 청년들은 연기를 한숨처럼 품으며 억세인 손을 들어 타락을 스스로이 술처럼 마신다.
-「海港圖」(『시인부락』, 1936.12) 중에서 -
위의 시는 “늙은 선원”의 항해담과 그 얘기에 몰두하는 “항시의 청년들”의 모습과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항구의 풍경들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늙은 선원을 요지경처럼 싸고둘”르는 청년들의 모습에는 시적 화자의 항구에 대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감은 “컴컴한 골목 뒤”의 풍경에서 무너져버린다. “망명한 귀족에 어울린 풍성한 도박”, “괴침을 훔칫거리는 淸人”, “홍등녀의 嬌笑”에 의해 퇴폐적이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항구의 뒷골목에 대한 풍경들은「夜街」(『시인부락』, 1936.11)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해항도」와「夜街」는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시어나 이미지에서도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항구의 퇴폐적인 모습을 묘사함에 있어 오장환이 빠뜨리지 않는 인물이 있다면 ‘매음녀(기녀, 홍등녀, 매음부, 계집)’이다. 이것은『城壁』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11) 그렇다면 오장환은 왜 여성인물의 성격을 매음녀 등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그 첫째 이유는 항구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함으로써 새로운 만남의 세계 역시 ‘부정의 편력’12) 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여성인물을 남성과 상대적으로 유형화하여 여성을 남성의 쾌락의 도구로 치부하려는 것이다. 남성에 대한 쾌락적 도구로서의 여성이 상징하는 것은 당시 사회의 남녀간 계급적 위상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통부정과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상실의식, 그에 대응하는 퇴폐적이고 위악적인 몸부림은『城壁』이 간행되던 시기에 나타난 오장환의 시적 경향이라 하겠다.
4. 죽음충동에서 생명력 회복으로-『獻詞』,『나 사는 곳』
전통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정은 그 세계에 대응하고 있는 자신까지 부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城壁』에서『獻詞』로의 시적 편력 과정에서 오장환의 시는 몇 가지 변화를 가져온다. 그 첫째는『城壁』에서의 산문시 형태가 행과 연을 구분하는 자유시의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이며, 둘째는『城壁』에서는 화자가 드러나지 않고 묘사적 서술태도를 견지한데 비해『獻詞』에서는 화자가 “나”로 등장함으로써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태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시적 소재나 인물, 주제 등이 대개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지대함은 隕星과 함께 타버리었다
아즉도 나의 목숨은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인가 그 언제인가
허공을 스치는 별납과 같이
나의 영광은 사라졌노라
내 노래를 들으며 오지 않으랴느냐
독한 향취를 맡으러 오지 않으랴느냐
늬는 귀기울이려 아니하여도
딱따구리 썩은 고목을 쪼읏는 밤에 나는 한걸음 네 앞에 가마
표정없이 타오르는 인광이여!
발길에 채는 것은 무거운 묘비와 담담한 상심
천변 가차이 가마구떼는 왜 저리 우나
오늘밤 아 오늘밤에는 어디쯤 먼 곳에서
물에 뜬 송장이 떠오르려나
-「無人島」(『청색지』, 1939.2) 전문 -
위의 시는『獻詞』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특징들을 거의 수렴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절망에 빠진 상태이다. “나의 지대함”이 “타버리”었고, “나의 영광” 또한 “사라졌”다며 소멸된 자아를 인정하면서 이 시는 시작되고 있다. 절망과 좌절에 빠진 자신을 감추려고 도피한다면 “내 노래를 들으며 오지 않으랴느냐”와 같이 당당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고통스런 현실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으로써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능동적 자세가 되었다는 간접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절망적인 현실을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다. 훼손된 세계 속의 자신을 죽음으로 무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키겠다는 인식이 시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獻詞』에서 전반적으로 전개되는 ‘내면화’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혼돈을 일으키는 방랑길을 죽음으로 마무리하고, 새로운 전망을 찾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하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나는 한걸음 네 앞에 가마”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쓰여진 시들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시어로는 ‘묘지(무덤), 묘비, 제단, 송장(시체, 주검), 망토 입은 사람, 곡성, 제단, 상여’ 등이다.
죽음충동으로 자학적 자기비판의 모습을 보여주던 오장환의 비극적 인식은 죽음 자체에서 길을 찾지 못하게되자 신화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원죄를 탐구하기에 이른다. 『不吉한 노래』(미발표,『獻詞』, 1939.7)는 자기 자신을 자학하고 극단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도록 방어하고 있다.
죽음충동과 원죄의식을 통해 드러난 시적 인식의 의미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자기만의 고통이 아닌 인간 전체의 고통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보편화된 고통의 체험 속에서 오장환은 혼자라는 소외감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공동체적 운명을 감지한다. 이것은 훗날 그가 사회주의 현실을 지향하게 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죽음이라는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절망 앞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고통을 주시함으로써 정작 자신이 지향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과연 어느 세대에 있어서나 그 세대에 가장 민감하다는 또는 민감해야만 되는 시인들로서 책상 앞에 가벼운 애상과 고독을 초대해놓고 슬픔과 고독만을 노래함은 옳은 일일까. (중략) 문득 나는 내 자신의 노래를 돌이켜볼 때 내 또한 눈물과 묘지와 비석과 더 나가서는 황무지 이외의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데 악연(愕然)치 않을 수 없다. -「第七의 孤獨」(『조선일보』, 1939.11.2-3) 중에서 -
고독을 통해 자신과 이 땅의 시인들의 현실을 비판하는 모습은 그의 시가 변모할 징조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즉도
누귈 기둘러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路線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The Last Train」(『비판』, 1938.4) 전문 -
위의 시는 화자인 “나”의 주관적 심상을 객관적 상관물과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시적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 시적 긴장은 “The Last Train"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지막’이라는 시어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는 절박한 상황을 제시하고, ‘기차’는 떠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The Last Train"은 순간적으로 스쳐 가버리는 존재를 비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제목만으로도 잠시 스쳐 가는 것들인 시간과 역사, 만남, 인생 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가면 오지 않을 기차는 해가 저물 즈음 역에 도착한다. “The Last Train" ”저무는 역두“, ”못쓰는 차표“, ”청춘의 조각“, ”병든 역사“ 등의 시구는 ”비애“, ”추억“, ”슬픔“ 등과 대응관계를 형성하며 이 시의 분위기를 끌어가고 있다.
화자는 마지막 기차에 비애가 실려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떠나보내고 있다. 진정한 이별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것은 비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화자의 이별의식에서는 담담함을 느낄 수 있다. 청자인 “너”의 실체는 “비애”인 동시에 “병든 역사”이며 “추억”이다. 여기서 “역사”의 범위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 보편적으로 한 인간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말한다.
이 시의 화자를 보편적 인간상으로 확대 해석하는 데는 4연의 역할이 크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서, 아담의 죄가 유전된 표상이다. 그러한 카인을 만나 시적 화자가 “목놓아 울”려고 했던 것은,「不吉한 노래」에서 자신을 “카인의 末裔”라고 자학했던 사실과 무관치 않다. 죽음충동을 느끼며 자신을 무화시키려 했던 오장환은 파괴적인 죽음으로써 절망적인 현실을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새로운 모색으로 신화적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원죄의식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 고통을 인식한 오장환은 자신이 “카인의 末裔”라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한 자신의 역사 앞에서 위악적인 몸부림을 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가 위의 시다.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자신을 찾으려는 의지는 비애의 병든 역사를 마음속에 묶어두지 않고 떠나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못 쓰는 차표”와 “청춘의 조각”은 새 출발을 위해 정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과감하게 정리는 하지만 4연에 이르러, 카인을 만나자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그것은 화자에게는 ‘마지막 눈물’이라 명할 수 있는 것으로, 카인에 대한 동질감의 표시이자 원죄의식의 수용을 의미한다. 혼돈의 실체를 받아들임으로써, 막연한 죽음충동과 원죄의식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구조들이 5연에서 미적 마무리를 이루고 있다. “거북이”는 화자의 심상을 구체화하고 있는 객관적 상관물로서, 느릿느릿한 걸음과 등의 골패인 노선이 매우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시는 자신의 비애와 보편적 인간으로서 원죄의식을 접목시켜 초극하는 과정-떠나보내는 과정-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나 사는 곳』은 오장환이 월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간행한 시집이다. 그러나 창작 시기로 보면『병든 서울』보다 앞선 시기(1939-1945)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적 인식의 흐름에서도『獻詞』의 다음 단계로 연결되고 있다. 자아성찰의 과정을 담은『나 사는 곳』의 시들에서 특징적인 것은『獻詞』에 대비되는 긍정적인 시적 인식의 표출이다.
긍정적 인식을 뒷받침하는 요소로는, 첫 번째 시간적 배경 변화로 절망보다는 “기쁨과 적요”(「길손의 노래」,『춘추』, 1943.3)의 시간이며, 계절에서도 주검과 추위보다는 “다사로이 퍼지는 햇살”(「다시금 餘暇를,,,,,,」,『예술』, 1946.2)을 기다리는 건강성을 회복한다. 시적 인식의 변모를 유발시키는 두 번째 요소로 시의 공간적 배경 변화를 주목할 수 있다. 도시와 항구 등의 타락한 문명세계에서 고향과 산골짜기를 주로 하는 자연의 세계로 이동하며 서정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시적 공간의 변화와 함께 퍼소나(persona)의 변화도 이어졌다. ‘사슴, 양, 비둘기, 말, 토끼, 산새’ 등 약한 짐승을 퍼소나로 하거나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사랑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자아내고 있다. 세 번째 요소로는『나 사는 곳』에 수록된 23편의 시에서 8편이 ‘~노래’라는 제목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노래를 듣거나 부르는 형식으로 양분되는데, 여기에는 화자가 듣고 싶은 노래에 대한 기대와 말하고 싶은 발산의 욕망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기대와 발산의 욕망은 자아성찰의 과정에 이입되면서 긍정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기반이 된다.
오장환은 ‘『나 사는 곳』의 시절’이라는 글에서 “이제는 나 사는 곳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는 곳이다. ‘내’가 ‘우리’로 바뀌는 사다리를 독자들이 이 시점에서 찾는다면 필자는 망외(望外)의 행운이겠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나’에서 ‘우리’로의 변화, 다시 말해 공동체적 인식으로의 변화는 오장환이 나름대로 확보한 시적 전망이었으며, 사회현실 참여로 이어지는 시적 편력 과정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5. 사회현실에의 참여-『병든 서울』
해방 이후에 쓰여진 그의 작품들은 거의『병든 서울』(1946년 간행/1945.8.15 이후의 작품)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병든 서울』은『나 사는 곳』(1947년 간행/1939.7~1945.8의 작품)보다 뒤에 창작된 시들로 구성되었으나, 해방에 맞춰 먼저 간행된 것이다.『병든 서울』에 실린 시들은 거의 순차적으로 실려있다는 것이 특징적으로 눈에 띈다. 이에 대해 오장환은 “일기처럼 날짜를 박아가며 써 나온 이 시편”(「『병든 서울』 머리에」, 1946.12)이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창작충동이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몰래 쉬던 숨을 크게 쉬니
가슴이, 가슴이, 자꾸만 커진다
아 동편바다 왼 끝의 대륙에서 오는 벗이여!
이 半球의 서편 맨 끝에서 오는 동지여!
(중략)
감격에 막히면
아 언어도 소용없고나.
울면서 참으로 기쁨에 넘쳐 울면서
우리는 두 팔을 벌리지 않느냐
들에 핀 이름없는 꽃에서
작은 새까지
모두 다 춤추고 노래 불러라.
아 즐거운 마음은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종소리 모양 울려나갈 때
이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연합군이여!
정의는, 아 정의는 아직도 우리들의 동지로구나.
-「聯合軍入城 歡迎의 노래」(『해방기념시집』, 1945.11) 중에서 -
위의 시는 영탄형 어미로 구성된 찬가의 성격을 띄고 있다. “몰래 쉬던 숨을 크게 쉬니 가슴이 자꾸만 커진다”는 직접적 표현은 오장환이 느끼고 생각하는 해방의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힘차게 울렸으면”(「鐘소리」,『상아탑』, 1945.2)하고 바라던 종소리가 실제로 울리는 감격의 순간이며, “쓸쓸한 목책 안에”(「羊」,『조광』, 1943.11) 갇혀 있던 양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쁨은 “언어도 소용없고나”라는 심정토로로 이어진다. 즉 시적 진술과 시인의 현실이 시적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이며, 이러한 표현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떠나 민족 공감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울리기를 바라던 종소리가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울려나갈 때” 시인이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다 춤추고 노래 불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즉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보다 널리 확산시키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정의”가 우리 곁에 있다는 믿음을 주는 ‘예언자’13)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오장환에게 있어 “연합군”이란 이념을 초월한 “우리들의 동지”이며, 민족적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해방의 감격에 도취되어 있는 오장환을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한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었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중략)
아, 저마다 손에 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 부르며
이것도 하로 아츰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김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어 몬지를 씌워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중략)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들은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나온다.
포장 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구융같이 늘어슨
끝끝내 더러운 거릴지라도
아,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모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식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웨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야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중략)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었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어리는 내 눈
아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씰개
내 눈깔을 뽑아버리랴, 내 씰개를 잡아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病든 서울」(『상아탑』, 1945.12) -
이 시의 화자는 오장환 자신을 유형화시킨 “나”이고 , 청자이자 시적 대상은 “서울”이라 할 수 있다. 해방 당시 병실에 있었던 오장환의 전기적 삶이 시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서울”에 대한 과거․현재․미래의 모습이다. 과거의 서울은 화자에게 “다정한, 아름다운 사랑하는 서울”이었다. 친구들과 술 취해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며 나라 없는 청춘의 설움을 반항으로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포장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놓은 술장수 돼지구융같이 늘어슨 더러운 거릴지라도” 화자에겐 “뼈와 살”이 굵어진 곳이기에 서울의 모습은 곧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해방이 되어 타락한 모습을 드러내며 “병든 서울‘이라 불리어도, 그곳을 향해 뛰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은 병들었지만, 화자에게 그곳이 ”아름다운, 미칠 것 같은“ 서울로 다가오는 것은,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하게 새 나라를 세우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랑스런 서울“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다정한 서울”에서 “병든 서울”로, “미칠 것 같은 서울”로, 다시 “자랑스런 서울”로 바뀌는 것이다.
서울의 변화는 시적 화자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화자의 모습도 과거에서 미래까지 조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수반된다. “술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며 “나라 없는 청춘의 반항”을 하던 화자는 8월 15일이 되자 “병원에서 울었다.” 그것은 해방의 기쁨 때문이 아니라,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하루를 보내고 화자도 만세를 부르는 군중에 휩싸여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쥔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도 잠시, 서울 거리에는 “장사치, 본부, 당”의 이름을 지니고 “검은 쇠사슬”의 정체를 드러내는 무리들이 활보하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뼈와 살이 굳어진 화자는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서울의 병든 모습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러한 능동적 인식에 의해 그는 “병원 문에서 뛰어나”오게 되고, 그 자신 역시 병든 서울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자신과 현실의 퇴폐적인 모습에 정면대결하고 폭로해 가는 중에 화자는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솔직한 자기 비판의 진정성에서 비롯되는 결과이며, 소시민의식을 청산하려는 자기갱신의 몸짓이기도 하다. 일제식민통치 속에서 화자의 모습은 “슬픔에 울기만 하여 질척어리는 눈”과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씰개”로 형상화되고 있다. 자신의 무력함을 소시민적 의식으로 판단 짓고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눈깔”과 “씰개”를 버린다는 것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病든 서울』이 당시 주목받았던 이유는 도식적 구호를 앞세워 무조건적으로 인민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계몽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 비판을 통한 진정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오장환의 자기 비판은 일방적인 과거반성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까지 총괄하여 시 속에 담으려는 면모를 많이 보여준다. 그런 것이 남성적 기질과 역동적인 면에서는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시의 구체성과 긴장성을 획득하는 데는 실패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반항의 의미를 해명한 후, 그것의 무목적성과 무방향성을 스스로 비판하였다. 이러한 자기 반성의 표현에는 자기 부정의 연약함(「共靑으로 가는 길」, 미발표시,『病든 서울』, 1946.1,7)과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한 안이한 결론(「나의 길」,『민성』, 1946.3) 등으로 타인 의존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14)
결국 오장환에게 있어 ‘해방’은, 정치현실에서는 ‘열린 전망의 시대’였지만 문학적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해방공간에 나타난 그의 문학적 특질에서 해명된다. 해방공간에 나타난 그의 문학적 특질은 소시민성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비판하면서 투쟁현실로 나가려는 것이다. 즉 문학적인 면에서의 오장환은 도시적이고 과격한 사회주의 시인이 아니라, 자신과 시대현실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의 진솔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해방공간에서 오장환의 문학관은 주체자라기 보다는 관조자이기를 즐겨 했다는 것이다. 이때 관조자인 시인과 시의 대상 간에는 거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거리는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추상적 감정의 차원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관념화된 시세계는 투쟁현실 속에서 대중성을 얻을 수 없고, 그러한 결함은 투쟁현실을 ‘진보적 리얼리즘’의 범주로 끌어들이지 못하게 된다. 오장환의 문학관에 의한 시적 인식과 해방현실 참여자로서의 인식간 괴리감은 자아를 왜소하게 만들고, 자기 비판적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6. 맺음말
국가 상실과 식민지적 근대화의 모순에 대한 현실인식에서 시작된 오장환의 시적 편력은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유교 전통을 부정하면서 전개된다. 그러나 부정은 더 큰 혼돈과 방황을 불러 일으켰고, 그에 대응하여 오장환은 퇴폐적이고 위악적인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의 방황은 죽음충동과 원죄의식에까지 이르고, 더 이상의 절망을 선택할 수 없는 곳에서 그는 연약한 생명들을 통해 온기를 느낀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오장환은 혼자가 아닌 다수의 삶을 추구함으로써 사회현실 참여에 대한 확실한 토대를 구축한다.
해방공간은 분명 전망이 보이는 시대가 도래했음이다. 오장환에게도 해방은 ‘열린 전망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현실에서는 조금 달랐다. 문학적인 면에서의 오장환은 도식적이고 과격한 사회주의 시인이 아니라, 자신과 시대현실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의 진솔함-달리 생각하면 그런 오장환의 태도는 현실을 보다 냉철히 인식하려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동적인 사회와 오장환의 다소 정적인 사고가 조화될 수 없다는 데 있었다-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때 오장환의 시적 인식과 사회현실 참여자로서의 괴리감이 그에게 또 다른 갈등과 자학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시적 편력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상실의 현실 해방 월북
부정적 시각 긍정적 시각 관조적 시각 괴리감
죽음충동 (?)
닫힌전망 열린전망
위의 도표에서 ‘(?)’ 부분은 오장환이 남겨야 했을 문학적 성과였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해방공간에서의 갈등을 정치현실로 치유하려 했다. 결국 그는 월북을 선택했고 도표에서의 ‘(?)’부분은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그가 사회현실에 참여하여 자신과 체제를 비판했던 의도는 분단상황이 아니라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기대와 방향을 달리했고 그는 비극적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문제는 그의 소망이나 현실이 특정 체제의 현실을 추종하면서 체제를 위한 정치적 이념을 시에 담으려 했던 데 있다. 오장환 자신도 정치와 예술간의 어우러질 수 없는 현실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끝내 자신을 지켜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월북 이후 오장환의 행적은 김광균과의 만남15)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6․25 이후 만난 김광균에게 오장환은『붉은 깃발』이라는 시집을 보였다고 한다. 시집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제목으로 짐작컨대 사회주의 체제에 더욱 충실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시편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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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의 시적 편력과 비판적 인식 .................. 이 원 규 (문학박사)
출처 : [성균어문연구] (제37집), 성균관대학교 성균어문학회, 2003
'인천의문화 > 인천배경문학,예술,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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