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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배경문학,예술,문화

해수(海獸) / 오장환

by 형과니 2023. 7. 5.

해수(海獸) / 오장환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21-08-24 23:49:18

 

 

해수(海獸) / 오장환

 

사람은 저 빼놓고 모조리 짐승이었다

 

 

항구(港口)

계집아

너는 비애(悲哀)를 무역(貿易)하도다.

 

진 비바람이 바닷물에 설레이던 날

나는 화물선(貨物船)에 엎디어 구토(嘔吐)를 했다.

 

뱃전에 찌풋이 안개 끼는 밤

몸부림치도록 갑갑하게 날은 궂은데

속눈썹에 이슬을 적시어가며

항구(港口)!

검은 날씨여!

내가 다시 상륙(上陸)하던 날

나는 거리의 골목 벽돌담에 오줌을 깔겨보았다.

 

컴컴한 뒷골목에 푸른 등()불들,

자물쇠를 채지 않는 도어 안으로, 부화(浮華)한 웃음과 비어의 누런 거품이 북어오른다.

 

야윈 청년(靑年)들은 담수어(淡水魚)처럼

힘없이 힘없이 광란(狂亂)JAZZ에 헤엄쳐 가고

간 손톱을 날카로이 숨겨두는 손,

코카인과 한숨을 즐기어 상습(常習)하는 썩은 살덩이

 

나는 보았다.

항구(港口),

항구(港口).

 

들레이면서

수박씨를 까바수는 병()든 계집을

바나나를 잘라내는 유곽(遊廓) 계집을

 

사십구도(四十九度), 한 주정(酒精)에 불을 달구어

불타오르는 술잔을 연거푸 기울이도다.

보라!

질척한 내장(內臟), 부식(腐蝕)한 내장(內臟), 타오르는 강()한 고통(苦痛),

펄펄펄 뛰어라! 나도 어릴 때에는

입가생이에 뾰롯한 수염터 모양, 제법 자라나는 양심(良心)

지니었었다.

 

발레제()의 무디인 칼날, 얼굴이 뜨거웠다.

면도(面刀)를 했다.

극히 어렸던 시절(時節)

 

항구(港口)!

눈물이여!

나는 종시(終是) 비애(悲哀)와 분노(憤怒) 속을 항해(航海)했도다.

 

계집아, 술을 따르라.

잔잔이 가득 부어라!

자조(自嘲)와 절망(絶望)의 구덩이에 내 몸이 몹시 흔들릴 때

나는 구토(口吐)를 했다.

삼면기사(三面記事),

각혈(咯血)과 함께 비린내 나는 병()든 기억(記憶)……

 

어둠의 가로수(街路樹)!

바다의 방향(方向),

오 한()없이 흉()측 맞은 구렁이의 살결과 같이

늠실거리는 검은 바다여!

미지(未知)의 세계(世界),

미지(未知)로의 동경(憧憬),

나는 그처럼 물 위로 떠다니어도 바다와 동화(同化)치는 못하여 왔다.

 

가옥(家屋) 안 짐승 오직 사람뿐

나도 그처럼 완고(頑固)하도다.

 

쇠창()살을 붙잡고 우는 계집아!

바다가 보이는 저쪽 상정(上頂)엔 외인(外人)의 묘지(墓地)가 있고,

얀 비둘기가 모이를 쪼읏고,

장난감만하게 보이는 기선(汽船)은 퐁퐁 품는 연기(煙氣)를 작별 인사처럼 피어 주도다.

 

항구(港口)!

눈물이여!

 

절망(絶望)의 흐름은 어둠을 따라 땅 아래 넘쳐흐르고,

바람이 끈적끈적한 요기(妖氣)의 저녁,

너는 바다 변두리를 돌아가 보라.

이럴 때이면 이빨이 무딘 찔레나무도

아스러지게 나를 찍어 누르려 하지 않더냐!

 

이년의 계집,

오색(五色),

칠색(七色),

영사관(領事館) 꼭대기에 때 묻은 기()폭은

그 집 굴뚝이 그래 논 게다.

지금도 절름발이 노서아(露西亞)의 귀족(貴族)이 너를 찾지 않더냐.

 

등대(燈臺) 가까이 매립지(埋立地)에는

아직도 묻히지 않은 바닷물이 웅성거린다.

매립지(埋立地)는 사문장

동무들의 뼈다귀로 묻히어 왔다.

어두운 밤, 소란스런 물결을 따라

그렇게 검은 바다 위로는

쑤구루루…… 쑤구루루……

부어오른 시신(屍身), 눈자위가 헤멀건 인부(人夫)들이 떠올라온다.

 

항구(港口),

환각(幻覺)의 도시(都市), 불결(不潔)한 하수구(下水口)에 병()든 거리여!

얼마간의 돈푼을 넣을 수 있는 조그만 지갑,

유독식물(有毒植物)과 같은 매음녀(賣淫女)

나의 소매에 달리어 있다.

 

그년은, 마음까지 나의 마음까지 핥아 놓아서

이유(理由) 없이 웃는다. 나는

도박(賭博)

싸움,

흐르는 코피!

나의 등가죽으로는 뱃가죽으로는

자폭(自爆)한 보헤미안의 고집(固執)이 시르죽은 빈대와 같이 술 술 술 기어다닌다.

 

보라!

어두운 해면(海面)에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

짐승과 같이 추악한 모습

항시(恒時) 위협을 주는 무거운 불안(不安)

그렇다! 오밤중에는 날으는 갈매기도 까마귀처럼 불길(不吉)하도다.

 

나리는 안개여!

설움의 항구(港口),

 

세관(稅關)의 창고(倉庫) 옆으로 달음박질하는 중년(中年) 사나이의

렁한 가방

방파제(防波堤)에는 수평선(水平線)을 넘어온

해조음(海潮音)이 씨근거리고

바다도, 육지(陸地), 한 치의 영역(領域)에 이를 웅얼거린다.

 

항구(港口)!

눈물이여!

나는

못 쓰는 주권(株券)을 갈매기처럼 바닷가에 날려 보냈다.

뚱뚱한 계집은 부연 배때기를 헐떡거리고

나는 무겁다.

 

웅대(雄大)하게 밀리쳐 오는 오바다,

조수(潮水)의 쏠려옴을 고대(苦待)하는 병()든 거의들!

습진(濕疹)과 최악(最惡)의 꽃이 성화(盛華)하는 항시(港市)의 하수구(下水口),

더러운 수채의 검은 등때기,

급기야

밀물이 머리맡에 쏠리어올 때

톡 불거진 두 눈깔을 휘번덕이며

너는 무서웠느냐?

더러운 구덩이, 어두운 굴속에 두 가위를 트리어 박고

 

뉘우치느냐?

게거품을 북적거리며

쏠려가는 조수(潮水)를 부러이 보고

불평(不平)하느냐?

더러운 게거품을 북적거리며……

 

음협(陰狹)한 씨내기, 사탄의 낙륜(落倫),

너의 더러운 껍데기는

일찍

바닷가에 소꿉 노는 어린애들도 주어가지는 아니하였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吳章煥

 

 

출생 1918515일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보은

사망 1951(3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직업 시인

학력 도쿄 지산중학교

활동기간 1931~ 1951

 

오장환(吳章煥, 1918515~ 1951)은 한국의 시인이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 또는 삼재(三才)로 불렸다.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였으나,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던 중 월북했다.

 

생애 초반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오학근(吳學根)과 후처 한학수(韓學洙)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7살이 되던 1924년 회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1] 1927430일 회인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52일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박두진과 같은 반이었다.[2] 5학년이 되던 1928년 동시 을 교내 학예부 아동문집에 실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중동학교 속성과를 수료하였으며, 14살이 되던 193141일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정지용을 사사(師事)하였다. 문예반에서 활동하며 1932매일신보조선의 아들발자취 찾아를 발표하였고, 교지 휘문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다가 1933조선문학목욕간을 실으면서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유학과 방랑

1935126일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같은 해 4월 도쿄에 있는 지산중학교(일본어판)(智山中學校)에 전입하였고,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그는 1930년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경향을 따르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11낭만시인부락동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인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제작을 주도하였다. 그 해에 첫 시집 종가를 출판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검열로 무산되었다.1937년 메이지 대학 전문부 문과 문예과 별과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그는 자오선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첫 시집 성벽을 자비출판하였다. 시론과 작가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938722일 아버지 오학근의 사망으로 메이지 대학을 중퇴하고 급히 유학을 마쳤다.아버지의 유산으로 경성부 관훈정에 남만서방(南蠻書房)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차리고, 그곳에서 다양한 문인과 교류하였다. 두 번째 시집 헌사(1939), 서정주의 화사집(1938), 김광균의 와사등모두 이곳에서 출판하였다. 1940년경에는 중국 일대를 방랑하다가 경성부 돈암정 105번지로 이사하였다. 1940-41년에는 도쿄에서 사자업(寫字業)을 하며 가난하게 지냈고, 황달, 두통, 늑막염, 신장병 등을 앓았다. 수술 결정을 앞두고 있어 외출이 금지되었던 병상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와 월북

19451022일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하였고,, 19462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다.19465월 동향사에서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 같은 해 7월 정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하였다. 19461219일 장정인(張正仁)과 결혼하였다19471월 아문각에서 6편의 시를 추가한 성벽의 개정 증보판을, 같은 해 6월 헌문사에서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출간하였다.이후 그는 좌익 계통에서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76월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문화 대중화 운동인 문화공작대에 참여하여 경상남도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국가의 검열과 공연 중지 시도, 그리고 폭탄 테러 등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고, 그 자신은 테러 피해를 입어 상해를 입고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에 치료와 이념 실현을 위하여 19479월 이후 월북하였다. 월북 시기가 분명치 않은 것은 당시 오장환이 조선문학가동맹 등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테러로 다쳤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등 몇 차례 남북을 오간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19487월에 조선인민출판사에서 남조선의 문학예술을 출판하였고,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포의 소련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48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모스크바의 시립 볼킨병원에서 요양하였다.

 

19505월 소련 생활 당시의 체험을 담은 마지막 시집 붉은 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출판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잠시 서울로 와 이전에 만났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알려진 오장환의 마지막 작품은 조선여성19515월호에 실린 시골길,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1년 한국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

 

시집으로는 성벽(1937), 헌사(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붉은 기(1950) 등이 있다. 이 중 병든 서울은 조정래의 역사소설 태백산맥에 발췌되었다. 1982년 군산에서 발생한 간첩 날조 사건인 오송회 사건은 고교 교사들이 병든 서울을 돌려 읽은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