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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써 제임스 홀 군도

by 형과니 2023. 3. 18.

써 제임스 홀 군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09 08:29:53


  써 제임스 홀 군도                                     

남북한이 종종 첨예하게 갈등을 보이고 있는 곳이 서해 5도 부근인데 이 섬들은 어장으로서의 중요성도 크지만 옹진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요충지로서도 일찍부터 외세의 주목을 받아 왔다.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서세동점의 시기에 특히 서해 5도와 옹진반도 일대를 중시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던 해군 장교 홀(Basil Hall)이 ‘수많은 임무’를 띄고 백령도에 상륙한 사실이 그러한 영국의 의중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홀은 ‘조선서해탐사기’(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에 서해 5도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주 중국 대사인 맥스웰(Murry Maxwell) 대령과 홀의 주요 임무는 백령도 해안과 동경 124˚ 46´, 북위 37˚ 50′ 일대의 섬들에 대한 측량이었다. 그들은 섬들을 ‘써 제임스 홀 군도’(Sir James Hall‘s Group)라고 해도에 명명했다. 제임스 홀 경은 지리학자로서 에딘버러 왕립학사원 원장이었는데 바로 백령도를 탐사한 홀의 아버지였다. 그들이 작성한 해도에 따라 서해 5도는 홀 군도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다.


홀 일행이 1816년 9월1일 아침 9시, 백령도의 한 만(彎)에 정박한 뒤 섬에 상륙해서 본 것은 ‘갈대에 진흙을 발라 대강 역은 듯한 40채의 집들과, 얼굴이 구리 빛으로 탄 험상궂고 약간 야만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영국인의 눈에 보인 백령도 주민들의 첫인상이었다. 홀은 특히 전족(纏足)이 궁금했던지 이곳 여인들의 발이 ‘중국에서처럼 죄이지 않은 보통 크기였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홀 일행을 처음 접한 백령도 주민들은 그저 그들이 빨리 떠나 주기만을 바랐다. 개중에는 돛배 모양의 종이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흔들어 떠나라는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홀은 그 후 10일간의 여정으로 서해의 몇몇 해안 지역과 제주도 등지의 지질 조사 외에 약간의 한국어 어휘 채집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한다.


여담이지만 홀이 영국으로 귀환하던 중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을 만나 극동지역 탐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비웃음인지 감명인지, ‘조선은 그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나라’라고 말하자, 나폴레옹이 웃으며 ‘그런 민족이 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오늘 우리가 한번 상기해 볼 것은 근세 한국 수난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천이 이렇게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190년 전부터 이미 열강들의 눈독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