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 / 나 도원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22-02-11 09:56:18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 / 나 도원
2부 시대의 노래 저항의 노래 中 사람들은 기타를 배웠지
과거를 잊지 않은 거리
내려앉던 봄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 햇볕이 돼 아스팔트를 달구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은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62주기 기념식을 알리는 현수막을 쓰다듬고 어딘가로 슬그머니 사라질 뿐이었다. 애관극장을 지나 용동과 답동 사이로 흐르는 개항로를 연어마냥 따라 올랐다. 더위에 뒷덜미를 잡혀 걸음이 느려지고, 필시 세상을 처음 보았을 땀방울이 모자를 비집고 나와 이마를 적시기도 했다. 그때마다 멀리 불쑥 보이곤 하는 답동성당의 종탑이 뒤꿈치를 들고 살펴보며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한적한 길가의 오래된 약국을 좀 지났을까개항로 86번지라는 표식을 명찰처럼 달고 있는 낡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앞서 갔던 바람이 먼저 도착해서 또 다른 현수막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1970년을 전후해 장미회관에 최고의 가수들이 출연하던 무렵을 지나면서 인천에도 통기타 클럽들이 여럿 생겨났을 것이다. 자취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나선 길이었다. 일제의 계획과 비슷하게 박정희 정권기에도 인천은 서울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가지를 뻗었고고, 그렇게 새롭게 거점이 생길 때마다. 도심은 분산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떠오른 주안과 구월동등지도 분화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바다를 등지고 서울을 바라보는 식이었다. 어떤 학자는 이를 두고 지향과 종속의 심화라고 정리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도 벌어졌다. 마치 여행자들이 길 위에 흔적과 마을을 남기며 나아가, 구도심을 중심으로 옛 동네와 가옥들이 남아 자리를 지켜 온 것이다. 그 또한 재개발이나 정비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이자 멋스러움이며 삶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를 매기게 된다.
1978년 12월에 개항로 86번지, 옛 주소로는 인천시 중구 경동 187번지에도 작은 음악 공간이 만들어졌다. 포크의 시대이기도 했던 1970년대의 분위기 속에 태어난 그 공간은 이전에 시원한 얼음 창고로 쓰였는데, 건물의 소유주인 유용호가 노래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게 된다. 1980년 초부터 연극을 위한 극장으로 바뀌면서 연극 전용 극장으로 유명해졌지만, 그곳 돌체 역시 처음에는 잠시나마 어쿠스틱 기타를 든 음악인의 가창회가 열리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싱얼롱이 이루어졌다.
얼음 창고에서 음악 공간으로, 그리고 극장으로 변신해 온 이 터의 역시를 알기라도 하듯 벽 위에 걸린 현수막은 어떤 (이미 지나버린)연극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헨리 데이 소그는 자신의 명저 『월든』에 현재를 “과거와 미래라는 두 영원이 만는 곳이라 써 두었다. 지금 이 거리와 오래된 건물에서도 과거와 만난 현재, 그리고 어룽거리는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송창식에서 구창모까지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특히 대부분의 남자들이 통기타를 칠 줄 알았다. 최소한 잘 치게 되진 못하더라도 대부분 배워 보려 시도는 했다. 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통기타가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 놓은 이들과 노래들이 있었다.
이 도시 출신의 대중음악인은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한둘이 아니다. 앞으로 등장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이름들이 더 많다. 내 마음 당신 곁으로' 라든지 '사랑의 불시착' 그리고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 와같은 히트송들을 만든 김기표는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본명이 김성철인 그는 1952년 6월 14일에 인천에서 태어나 20대였던 1970년대 중반부터 안치행과 함께 안타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작곡과 편곡뿐만 아니라 연주에도 능했으며, 많은 밴드들을 성공시킨 제작자이기도 했다.
비록 여섯 살 때 서울로 가서 성장하고 활동하며 써 내려간 이력이긴 하지만, 이후에도 저작권협회 수석이사 등을 역임하고 김홍탁이 있는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음악학부 학과장을 맡기도 했다. 김태화와 박영 편성국 같은 이들도 가요계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이쯤에서 다시 불러와야 할 이름이 있다. 1947년 2월 2일에 인천에서 태어난 송창식은 1950년 한국전쟁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3년 뒤에는 어머니와도 헤어져야 했다. 부모 없이 신흥초등학교에 다녔지만 어릴 적부터 음악 듣기를 좋아했다. 6학년 때에는 인천여상 강당에서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고 음악가의 꿈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인천중학교 시절에 학교 대표로 경기도 음악 콩쿠르에 참가하여 수상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기에 서울예고 성악과에 진학했다. 형편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했지만 송창식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1967년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고 쎄시봉'에서 노래했으며, 록밴드 석기시대'를 만들어 활동하는 등 그의 음악 여정과 진폭은 간단치 않다.
1970년 솔로로 데뷔한 것은 그에게는 큰일이었지만 세상의 눈길을 끌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에도 점점 큰일이 돼 간다. 1970년대의 청년 감성을 관통하는 고래 사냥이 그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고, '피리 부는 사나이'와 '왜 불러 처럼 1970년대 중반을 상징하게 될 명곡들도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각종 가수상을 휩쓴 송창식은 가히 당대의 가수왕이었으며, 한번 쯤'과 '우리는' 등을 비롯하여 무수한, 그러면서도 분명히 각인되는 노 래들을 히트시킨다.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영혼의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대인 지금도 송창식은 평단으로부터 계속 새롭게 평가받고 중요하게 인정받는 아티스트로 건재하다. 담배 가게 아가씨'와 '가나다라 그리고 참새의 하루' 에서 볼 수 있듯이 국악과 포크의 접목은 물론, 보편의 정서를 독특한 양식으로 노래한 송창식의 음악에선 살펴보는 만큼 놀라운 구석을 발견할 기회를 더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창모 역시 처음에는 혼자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기 좋아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홍익대의 교내 그룹사운드인 '블랙 테트라'에 들어가 1978년 TBC 제1회 해변가요제에 출전하면서 삶의 길이 바뀐다. 우수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임백천 왕영은 벗님들 주병진 등 쟁쟁했던 참가자들 중에서 활주로의 배철수와도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구창모가 '블랙 테트라'의 이름으로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나 여러 문제로 팀을 떠나 설악산 망월사에 칩거하며 곡을 만들고 있을때 찾아온 이가 배철수였다. 그들이 다시 만나며 '송골매가 탄생했고, 칩거기에 만들어 둔 노래를 첫 앨범에 수록해 1982년에 발표한다. 그 곡이 바로 '어쩌다 마주친 그대이다. 1985년까지 스타 밴드 송골매의 스타 보컬로 활약하다가 솔로로 나선 구창모는 '희나리' 등을 부르며 오랫동안 톱스타로 군림했다.
노래는 시간과 공간과 마음을 잇는 길이다.
제대로 사용법을 익히기도 전에 최신형이 최신형에 의해 금세 고물이 되어 버리는 시대가 오고 음악의 장비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통기타는 무수히 많은 노래들의 시작을 지켜보았다. 그렇기에 한동안 어쿠스틱 기타가 인기를 잃어 가는 만큼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근래 들어 기타 가방을 메고 다니는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다시 부쩍 늘어난 것은 당연하고 반가운 현상이다. 이렇게 여섯 개의 줄을 지닌 이 소박한 악기 자체가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서 만나게 해 주는 연결선이다.
기타 줄처럼 이어진 길마다 따라와 준 눈길에 보답하는 의미로 답동성당을 찾아 손길을 보태고 싶어졌다. 1889년부터 역사가 시작된 오래된 성당으로 오르는 길은 마지막에 원을 그리며 조금씩 언덕의 전모를 드러낸다. 공간과 빛을 담아내는 건축 중에서도 성당은 건축과 조각 그리고 회화의 결합체이다. 위압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솟은 탑은 천국과 지상을 엮어 주고 있었다. 오래된 유적과 역사적인 건축물이 관광과 유흥 산업에 이용되고, 옛것의 보존은 일종의 타협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예외의 자격을 얻은 그곳이 부럽기도 했다. 몸을 이룬 재료가 잘 구운 붉은 벽돌이건 남루한 회색빛 시멘트이건 상관없이 저마다 중요한 좌표가 된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붙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사람과 건축물의 관계는 사람과 노래의 인연과 비슷하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건축이 이루어지지만 어느 시점부터 건축물이 사람에 영향을 주며 습성과 기질마저 변화시킨다. 노래도 그와 같다. 그렇게 노래를 따라간 이야기는 바람과 함께, 길과 함께, 그리고 오래된 건물과 함께 시간과 공간과 마음을 이어 놓았다. / 나 도원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 / 나 도원
삶이 있는 곳이 삶터이고
삶터에서 새로운 삶이 피어난다
무대와 객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삶의 공간이 진정한 공연장이며
음악이 피어나는 스튜디오이다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내려앉을 수만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는 음악이 자란다.
인천시를 배경으로 하여 가지를 치듯 뻗어나온 그 지역의 음악의 역사를 서술해 나가노라면 어느덧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와 연결됨을 이 책의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이며 ‘결국 음악’의 저자(사실 이 책 저자의 기존 글을 읽다보면 열렬한 팬이 될 것이다.)는 이 책에서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과 보컬 등 그룹생활을 하던 젊은 날을 회상하듯, 한국 대중음악의 관문이자 그 자체가 역사였던 인천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찾고자 이 책을 읽는 자들은 다소 따분하리라..그러나, 한국대중음악의 역사속의 애환과 감동을 함께 하고픈 이들은 이 책을 끼고 책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 이 책은 2011년 4월23일부터 2011년 10월 29일까지 기호일보에 연재된 내용을 재 편집하여 엮어낸 수정본이다.
'인천의문화 > 인천배경문학,예술,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백년 향토사를 말하는 홍예문 /고일 (0) | 2023.07.07 |
---|---|
인천 월미도 (0) | 2023.07.07 |
숭의 분수대 / 최 시호 (0) | 2023.07.07 |
'육첩방의 시인' 윤동주 일상을 그린 영화 상영 (0) | 2023.07.07 |
인천각(仁川閣) / 최 성연 (0) | 2023.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