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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년 향토사를 말하는 홍예문 /고일

by 형과니 2023. 7. 7.

반백년 향토사를 말하는 홍예문 /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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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3 11:22:12

 

 

반백년 향토사를 말하는 홍여문 / 고일

 

팔미도 저 쪽 넓은 바다에서 해면을 타고 천군만마처럼 달려 넘어오는 급한 바닷바람이 만국공원을 바라보고 기어오르면 동서 일자형으로 된 높은 언덕에 부딪치게 된다. 축항을 넘어 그대로 북진하는 바람은 '웃터골' 을 향하다가 쏜살같이 '홍여문' 외골동굴 속을 힘차게 빠져나가는 것이다. 동장군이 무섭게 전치를 뒤흔드는 엄동설한이 되면 사나운 하늬바람이 반대로 웃터골 오포산(원명은 응봉현) 기슭을 넘어 이곳 홍여문으로 빠져 남향을 하게 되니 홍여문은 남북풍이 통관하는 요로가 되는 것이다. 무더운 삼복에는 길손이 발을 멈추고 웃통을 벗을 것이다. 비오듯 솟던 구슬땀이 이마에서 사라지고 흠뻑 젖은 속옷이 건듯이 말라져서 뱃속까지 속시원하게 후련해지는 것이다.

 

여름철의 홍여문은 향토길손을 흐뭇하게 위로해주는 길가 피서지요, 인천시가지 복판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동혈승지(同穴勝地)인 것이다. '홍여문' 이라고 불리워진 이것은 '홍예문(虹霓門, 무지개꾼)' 또는 '홍여문(, 무지개돌문)' 혹은 '홍여문(虹轝門, 무지개 수레문)'여러 가지 한자 이름이 있으나 하여튼 무지개처럼 된 돌문 은 틀림없다. 일인은 '아나몽(六門)'이라 불렀는데 무지개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심미적인가! 혈문은 너무나 비속하기 짝이 없다. 봄철이 닥치면 돌벽 사이사이에서서 새파란 어린풀과 울긋불긋하고 청초한 작은 꽃이 방긋이 어여쁜 얼굴을 내민다. 얼마나 가련한 모습이냐, 너무나 귀여운 자태다. 낭떠러지에 떨어질 듯 위태롭기도 하다.

 

여름 한 철에는 돌 틈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소담스럽게 풀잎이 무르익어 검푸르게 있고 넝쿨줄기 마디마다 연달아 달린 어린애 손바닥만한 잎이 가지런히 줄기차게 돌벽을 수놓아 무지개처럼 고운 반타원형의 좌우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일인들은 홍여문 남쪽을 야마데(山手町)'라 불렀었고 북편을 야마네(山根町)' 라고 불렀었다. 내동 예배당쪽에서 약댕이집' 고개를 넘어 청관 어구까지 높은 길이로 곱게 꾸민 난간은 산로의 육교를 표시하게 한 것이고 따라서 위험 방지와 조망의 편의를 준 것이며 홍여문의 전체미를 돋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시대 이 곳에서 남북을 전망하게 되면 남쪽 왜시가지와 북촌 화수, 송현시가의 초라한 대조가 식민지의 청년된 원한의 탄식을 빚어내기도 했었다. 해방된 지 10! 오늘의 풍경은 어떠한가? 동란 걷힌 이 땅에는 재건과 건설에 큰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던 죽은 나가이데루오(永井照雄, 仁川府尹)가 부윤관사(군정 때 첫시장 임홍재 씨가 들었다가 화재로 태워버렸다. 시방은 공동묘지처럼 처량한 피난민의 토막이 옹기종기 제멋대로 놓여 있다.)를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해서 인천에서 손꼽던 건물로 신축하고 자동차 길을 새로 마련하기 위해서 지금 인천세무서 뒷길을 양창자길처럼 왼편으로 꼬불꼬불 맴돌아가도록 홍여문 윗길이 근대화되는 동시에 양지바르고 드높은 주택지대가 인천 유일의 산수정 관사 지대로 된 것이다.

 

바다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배 위에서 인천시가를 바라볼 때 청관의 지하실이 고루거각처럼 보였던 것이오, 만국공원에 우뚝 솟은 독일식 건물 '인 천각 (동란 뒤에 자취도 없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었고 홍어문 좌우로 웅거한 양식관사와 '오리당 집과 그외 별장주택이 인천항의 병풍처럼 아름다운 세트도 되고 무대배경도 되었었다.

 

지금부터 50년 전에는 홍여문이 없었다고 한다. 제물포시대 그 꼭대기 예전에는 아마 송림과 내동, 그리고 청관을 지나 월미도까지 모두 산줄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개항 후 인천의 발전을 꾀한 일인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이 홍여문 산허리를 잘라버리고 터널길을 만든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일인이 설계 감독했을 것이고 석수장이는 이름 높은 중국인을 썼을 것이나 흙일과 잡일은 기술없고 돈없던 우리 노무자들이 담당하였다는데 지금도 남북도로면이 gradient(句配)가 심하지만 공사 당시에는 낭떠러지처럼 급한 경사여서 흙구루마에 파낸 흙더미를 잔뜩 싣고 급낙하의 커브를 돌 때 아차 실수로 흙더미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매몰된 희생자가 50명이 넘었다고 했으니 홍여문 공사에도 눈물겨운 숨은 내력이 있었다.

 

홍여문 큰 바위 옆 으슥한 데서 약 40여년 전에 어느 일본여자가 급한 것을 참지 못했음인지 또는 늘 그런 버릇이 상례로 되었던지 이 곳에서 궁치를 허옇게 내놓고 그대로 서서 쉬(방뇨)를 진행시키는 도중이다. 장난 좋아하고 힘센 청년 윤치덕이란 친구가 이 거동을 보고 해괴하기 짝이 없어 힘 있는대로 철썩 볼기짝을 갈기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었다. 일본경찰서로 달려가 봉변당한 이야기를 했으나 도리어 꾸중만 톡톡히 듣고 나왔다는 것이다.

 

한국 풍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녀자의 노변방뇨도 문제려니와 하얀 큰 궁둥이를 내놓고 남자처럼 서서 누는 일은 일본인의 망신이고 보니 다시 그런 짓을 말라고 호령이 추상같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남녀 모두 길가에서 소변을 못 보게 했으며 기립 상태에는 1, 엉거주춤 앉은 것에게는 50전의 벌금형에 처하기로 되었다. 송견영 군이 활동사진에서 본대로 시험을 해보려고 비도 아니오는 날에 우산을 쓴 채 홍여문에서 내리뛰어 떨어져 보았던 것이다. 죽기는커녕 발가락 하나 상하지 않고 완전 무상낙하에 대성공을 하였었다. 우산도 산이니 낙하산과 통용되었던지?

 

5·10 선거이후 곽상훈 씨가 입후보 선전용으로 사진과 광고를 붙여 홍여문을 독점이용한 느낌이 있으나 태평양전쟁 직후에 일본부윤 나가이(永井)와 이께다(池田)가 벌써 먼저 이 곳을 사용했었다. 홍여문은 그 예전과 다름이 없건만 홍여문과 인연깊던 인물은 변했고 또 사라졌다. 인천 50년의 역사를 알려주는 홍여문은 지금도 말이 없이 한국의 국제항도 인천시를 지키고 있다.

 

(인천석금 경기문화사,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