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사랑한 낙타와 달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22-02-18 01:37:33
문우들과 북한산에서 서있는 이가 최 무영 시인
시를 사랑한 낙타와 달
김진초
노래는 저 혼자 울고 있고
석남동에 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1947년 대무의도에서 태어나 줄곧 인천에 살며, 신문사와 잡지사 등에서 글품을 팔아온 원고지 농사꾼으로, 시와 사람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 예순을 앞둔 2005년 8월 홀연히 세상을 등졌다. 그의 이름은 최무영이다.
그의 소원은 나이 오십에 소설책 한 권, 육십에 시집 한 권, 칠십에 수필집 한 권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35년 동안 시를 썼으면서도 끝내 시집 한 권을 남기지 못한 채 떠나고 말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문우들이 뜻을 모아 유고 시집을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노래는 저 혼자 울고 있고』다.
우편함에서 책을 받아들고 한동안 먹먹했다. 최무영 시인과 각별한 관계였던 김구연, 김동환, 신연수, 신원균, 전방욱, 정승렬, 허문태 그리고 유족대표로 고인의 딸 최하나 씨가 정성을 모아 만든 시집이었다. 고인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사후 11년 만에 시집으로 엮어준 문우들의 귀한 마음이 감동의 쓰나미로 몰려왔다. 그러니까 『노래는 저 혼자 울고 있고』란 유고시집은 인간 최무영이 사후 11년 만에 받아보는 인생 성적표인 셈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세상, 소중한 것도 귀한 것도 없는 이 시대에 방점처럼 찍힌 영롱한 우정의 무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으로 엎드려 절하고 싶을 만큼 고마운 일이었다.
시집을 정독하다 문득 시선이 고정된 시 몇 편을 소개한다. 최무영이 시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의 문학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다.
갈망이 길게 누워 있다.
가슴뼈를 드러내는
탐욕의 가쁜 숨결로
대지의 속살을 핥아 내리는
햇살이 뜨겁게 무너져 내린다.
손바닥에 묻어오는
죄업罪業의 육즙肉汁
끈끈한 신음이
땅속 깊숙이 가라앉고
머리 풀어 지평地平을 건너는
바람이여.
아마亞麻빛 머리카락의 집시가
짚고 가는 목발을 물고
한 마리 뱀이 죽어가고 있다. -「가뭄」 전문
온 산의 나무와
하찮은 풀씨들도
여린 싹 하나를 틔우려
인동忍冬의 아픔을 앓고 있나니
산다는 것은
전량全量의 넋으로
타오르는 것 -「겨울의 詩」 부분
연달은 흉작으로 다락같이 올랐다는, 그래서 한 잔의 커피조차 죄스러운 가난은 도둑처럼 발끝을 세우고 커피를 탄다. (……) 강경한 커피 유해론자인 아내의 눈길을 피해 자정 넘은 시각에 커피 한 잔을 준비하는 나의 소심小心으로 나의 詩는 결국 너절하리라는 예감. 그 한 자락을 깔고 몸져누우면 창 아래 커피 빛깔로 돋는 서릿발, 쌉쓰름한 커피향 속에서 나는 광대보다 외롭다. -「커피를 타면서」 부분
시간時間의 물레를 감아 여윈 바늘귀 속의 생애를 풀고 뜨며
어두운 선창船倉의 기억記憶으로 어부漁夫는
그물코의 가난을 깁고 있다.
철선鐵船이 닿는 연안沿岸으로
우리가 반출搬出하는 이야기, 이야기의 비린내 낭자한 슬픔을 길들이듯
한낮에도 닦아 걸던 램프등.
풍요한 파시波市의 잠을 깨우던 무적霧笛소리는
어디쯤의 해원海源을 울고 있는가.
먼 돛대 위에 낮달 비낀 부둣가
거대한 자장의 와각瓦角에서
문득 엿보는 하늘의 여백餘白 -「겨울 부두」 부분
시인 최무영은 시도 좋지만 창작메모가 더 눈길을 끌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산다는 것이 어쩐지 죄스러워지고 외로워지는 봄날.
개나리도, 진달래도, 그리고 산목련도 피었더군.
교정에 옹기종기 모여서서 겨울을 이고 있던 측백, 플라타너스, 버드나무들이 다투어 잎을 피우는 이 현란한 계절에 나의 일상이 꼭 잔존殘存일 것만 같은 짙은 불안감이 또 ‘파시킨’ 몇 알을 사게 한다.
-나는 아무래도 일찍 죽을 것만 같다-는 암담한 예감으로 외출했다가 물 밴 솜처럼 녹초가 되어 마지막 버스에 실려 돌아오는 귀로歸路.
이제껏 넘쳐보지 못한 그릇. -『해안』 제1집(1973. 5.5)
가끔 밤차를 타고 떠나는 버릇이 부산이나 목포나 여수의 생경한 아침 한가운데에 나를 던져놓곤 한다.
역 부근의 허름한 식당에서 허기를 메우고 찻집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곤 황황히 상행열차에 몸을 싣는 나의 출분出奔.
그런 나의 버릇을 누구는 사주팔자에 낀 역마살이라 풀기도 하고 누구는 헤르만 헤세류의 로망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나의 삶이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낡은 외투 같다는데 그 뿌리를 박고 있음을……. -『표류』 제1집(1978. 5. 5)
2월의 마지막 주말. 자정 겨운 시간을 비가 내리고 잠은 오지 않는 밤이다. 묵은 일기장을 편다. 맛은 알지도 못한 채 사과만 익혀내는 멍청한 사과나무처럼 시를 쓰는 일은 그렇게 멍청한 무상無償의 행위일 뿐이라는 구절이 눈에 잡힌다. 비어 있는 원고지의 칸들이 을씨년스럽다. 될 수 있으면 도망치고 싶다. 멀리 아주 먼 데로. -『내항』 제3집(1984. 5. 15)
잘 보이는 안경 하날 갖고 싶다는 충동에 문득 사로잡힌다. 안경 낀 비렁뱅이는 없다는 항설이거나 안경이 풍기는 지적 분위기에의 천착이 아니라, 세상엔 감춰진 것이 너무 많고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너무 많다는 인식 때문에다. -『내항』 제4집(1985. 5. 20)
최무영 시인은 석남동 어느 빌라 지층에서 2005년 여름 만성신부전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저쪽에 가서 그는 잘 보이는 안경을 마련했을까? 이런 한심한! 거긴 안경 따윈 필요 없는 세상일 텐데…….
달을 끌고 가는 사내
가정동 중앙시장에 또 한 명의 시인이 있다. 최무영 시인은 송림동에서 살다 지천명 즈음에 석남동으로 이사했는데 허문태 시인은 결혼(1978)과 동시에 서구에 터를 잡았다. 두 사람은 내항문학에서 함께 활동하다 최무영 시인이 이쪽으로 이사하자 함께 서구 예술인회 문학분과와 서구 구정신문 편집위원을 하며 자주 교류했다. 이따금 둘이 함께 한전발전소 근방 저수지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과 문학을 논했다고 한다. 마침 허문태 시인도 첫 시집 『달을 끌고 가는 사내』을 상재했기에 직접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얼마 전 발표한 연봉 순위를 보면 청소부, 가사도우미에 이어 소설가가 워스트 직업 3위를 기록했다. 시인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이 나라에 전업시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문태 시인이 가정동 중앙시장에서 건강원을 하는 건 다행이라 하겠다.
“무영이 형은 매사에 의아할 정도로 관조적이었어요. 본인의 지병에 대해서도 아예 무관심했고요. 하도 병원에 안 가 형수가 어렵사리 설득, 거북시장 근처 병원에 갔는데 역시나 뿌리치고 나오는 바람에 형수가 복받친 나머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대요. 그랬더니 나중에 형이 그러더래요. ‘이 사람아, 우는 것도 가려서 울어야지 거기서 울면 내가 뭐가 되나?’ 바로 앞에 산부인과가 있었던가 봐요. 요즘 식으로 치면 웃픈 에피소드지요.”
필자도 이삼 년 정도 최무영 시인과 함께 편집위원 일을 했다. 이따금 있는 회식 자리에서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좌중을 향해 빙긋이 웃곤 했다. 당뇨 때문에 군데군데 빠진 치아가 어린아이 같았다. 병색이 짙은 얼굴, 모든 걸 다 놔버린 표정으로 그는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곤 했다.
“그 형은 남들과 다른 세상에서 초연하게 살았어요. 강자들만 군림하는 세상이 싫어 낙타처럼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던 거지요. 낙타가 왜 사막엘 갔겠습니까? 포식자인 맹수를 피해 척박한 환경을 선택한 거 아닙니까. 형이 살다간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지 싶습니다.”
故 최무영 시인을 ‘낙타’에 비유하는 허문태 시인은 ‘달을 끌고 가는 사내’다. 뿔을 이마에 세우지 못하고 등에 세운 낙타나 달을 끌고 가는 사내나 고단하긴 매일반 터, 그래 그런지 두 사람의 시적 분위기가 유사하다. 염세의 칼날 같은 허문태 시인의 시도 소개한다.
까까머리 머슴애가 얼굴이 누에고치처럼 하얗고 갸름한 계집애에게 불쑥 감꽃 목걸이를 걸어준 것도, 아이스케키가 하 먹고 싶어 아버지 흰 고무신과 바꿔먹고 흠씬 회초리 맞은 것도, 대학도 못 가고 감히 시를 쓰겠다고 한 것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직업마저 없으면서 눈이 커서 겁이 많은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휙 낚아채 살림을 차린 것도, 친구와 술만 좋아하다 끝내 가난을 면치 못한 것도, 역설과 반전이 없는 생은 맹물이라고 호기 넘치게 허세를 부린 것도, 자식들에게 오직 성실하게 착하게만 살고 꿈만 있으면 풍요롭다고 한 것도,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빳빳하게 솟아나는 무모함이었다.
매일매일 잘려나가는 목숨이었다. -『수염』 전문
누가 먹고 버린 통닭 뼈다귀에서
까만 강이 흐른다.
태고로부터 강은 수치스러웠다.
뱀처럼 땅바닥을 교활하게 긴다.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지독한 겨울을 만나면 멈춘다.
사막을 만나면 도망치고
치욕의 한가운데를 무심히 흐른다.
푸른 별의 창자
내 몸에 창자가 있다는 것을
무단가출하고 삼 일째 되던 날, 그리고
호박꽃이 깊고 둥근 밥그릇으로 보일 때 알았다.
구불구불 수치스런 칭송을 껴안고 흐르는
치욕의 온기가 되는 지난한 몸짓을 보았다.
하짓날 가정공원
누가 먹고 버린 통닭 뼈다귀
티끌 같은 개미들이 까맣게 들러붙었다.
강이 발원하여 흐르고 있다. -「강」 전문
고문 틀 같은 녹즙기 속에 민들레를 넣고 주리를 튼다.
핏줄 터지는 소리
근육 으깨지는 소리
뼈 부서지는 소리
자백을 해라, 자백을 해
세상 쓴맛이란 쓴맛 다 맛본 죄밖에 없소.
차라리 죽으라고 짓밟고, 짓밟아도
죽지 않고 살아난 죄밖에 없소.
이파리를 잘게 찢고
꽃 대궁을 뚝뚝 잘라
다시 고문 틀에 넣으려 하면
오직 진실만 말했다고
이 몸 다 짓이겨봐야만 알겠냐고
이차돈처럼
허연 피를 울컥울컥 쏟아낸다. -「민들레 녹즙」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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