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공고 학생들, 맨 처음 나서 / 4.19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22-03-08 01:56:05
# 4·19 당시 인천시내 중·고·대학생 수 천여 명이 연일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천은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기계공고 학생들, 맨 처음 나서 / 4.19
1960년 3월 2일, 인천 답동 광장에서는 '시민 위안 영화의 밤' 이 열렸다. 상영 프로그램은 독립협회와 이승만, 만송(晩松) 이기붕' 등이었다. 시민 위안을 핑계 삼은 사전 선거 운동이었다. 3월 8일, '인천상공회의소 상임위원회'는 '이승만, 이기붕 당선 추진 결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역 시국은 점점 뒤숭숭해져 갔다. 3·15 정부통령 선거 바로 전날인 14일 저녁, 남녀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공명선거 보장하라는 전단을 뿌리며 데모를 벌였다. 그러나 이튿날 치러진 선거는 95.6%라는 기록적인 투표율을 조작해 낸 부정 선거였다.
이 후진국형 부정 선거는 인천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전국 각처에서부정 선거 규탄 데모가 맹렬히 일어났다. 19일 인천에서는 최초로 인천공고(仁川工高) 학생 3백여 명이 부정 선거 규탄 데모를 감행했다. 그 후 달포 간 산발적으로 규탄 데모가 벌어졌으나, 이를 혁명의 횃불로 발화시킨 것은 4월 11일 마산 김주열군의 참혹한 시신 발견과 18일 서울 의사당 앞에서 있은 정치폭력배에 의한 고려대생 습격 사건이었다.
19일 자유당 정권은 마침내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1백여 명의 꽃같은 학생들이 피지도 못한 채 길바닥에서 산화해 갔다. 20일 서울의 비보를 들은 인천 사범학교 학생들은 총을 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1일 인하공대 학생 1백여 명이 경동 네거리에서 연좌 데모를 벌인 후, 연일 수 천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인천은 무정부 상태가 돼버렸다.
24일 경기도경이 느닷없이 중립을 선언하는 가운데 학생 1천여 명은 답동광장에 모여 '4·19 희생 학도 추도식'을 거행하였고, 26일 인천고등학교생 5백여 명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다. 28일 이기붕 씨 일가가 자살로써 비극적인 삶의 종지부를 찍었고 29일 이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나 정국 수습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로부터 어언 40년 우리는 그 긴 시간을 그들보다 더 살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역사로서 바르게 껴안지 못함은 물론 3·1만세운동, 광주학생 항일운동,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인천의 학생 운동사마저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4.19 44돌을 맞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조 우성 / 인천이야기 100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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