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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조선 1894년 여름 - 제물포

by 형과니 2023. 7. 11.

조선 1894년 여름 - 제물포

仁川愛/인천이야기

2022-08-04 00:31:51

 

 

한국의 주요항구인 제물포 1900년대

 

 

조선 1894년 여름 - 제물포 / 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텍의 여행기

 

지난 6월 일본의 침략군이 처음으로 조선에 상륙했을 때, 신문 독자와 편집자들은 아마도 제물포라는 항구를 지도에서 찾아보느라 꽤나 헤맸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헛수고에 그쳤을 것이다. 제물포는 극소수의 지도에만 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오랜 명성을 간직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인 제물포는 불과 10여 년 전에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도시 이름과 관련해 조선보다 더 큰 혼동을 일으키는 나라는 없으며, 코리아라는 국명조차 이런 혼란을 가중시킨다. 이 혼동의 원인은 수백 년에 걸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오랜 분쟁이다. 중국과 일본은 지속적으로 번갈아 가며 조선에 대한 주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도시와 강 이름 역시 때로는 일본식으로 때로는 중국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코리아' 라고 부른다. 그러나 '코리아' 라는 국명은 이곳에서 이미 500년 전에 사라진 이름이다. 현재의 지배 왕조가 이전의 왕조를 전복하고 왕좌를 차지했을 때, 나라 이름 역시 코리아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코리아, 정확히 말하면 고려는 중국 말이나 조선 말로 '고상한 단아함' 또는 숭고한 우아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은 '고요한 아침'을 의미하며 현재 조선에서 유일하게 사용되는 국명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1860년대에 조선국왕은 일본 미카도의 서신을 개봉도 하지 않고 반송해버렸는데, 그 이유는 서한에 '조선 국왕이 아니라 '코리아 국왕'이라고 적혀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동아시아의 바벨탑에서 벌어지는 언어적 혼란은, 예컨대 강이 흐르는 지역마다 강 이름이 상이하게 불리면서 더욱 가중된다. 물론 유럽의 독자들에게 강 이름은 도시 이름보다, 특히 제물포와 같이 유럽인에게 개방된 항구의 명칭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12년 전 제물포 개발 이전까지 수도 서울의 항구는 황해에 위치한 인천이었다. 중국인들은 젠챤이라고부르고, 일본인들은 닌센 또는 니가와라고 부른다. 제물포는 일본 증기선 항로의 가장 중요한 항구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 일정표에조차 제물포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고, 앞에서 언급한 인천의 일본식 이름 대신 조선식 이름인 인천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다행인 것은, 일본 증기선이 인천이 아니라 제물포에 상륙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천과 제물포는 완전히 다른 곳이고, 거리도 4.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조선 여행길에서 나를 태운 증기선은 인천을 그냥 통과해 4.8킬로미터나 더 항해하여 제물포 앞, 육지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정박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제물포를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대충 중국 닝보나 푸저우福州와 같이 탑과 사원들이 있고 기묘하게 휜지붕들이 있는 아시아의 도시 모습을 기대했다. 이런 기대와 달리 내 눈앞에는 아주 근대적인 유럽의 도시가 펼쳐진 것이다! 10년 전 이 장소에는 조선인이 거주하는 초라한 진흙집 몇 채가 고작이었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제물포는 양키들과 맞먹는 성장 속도로 발전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시카고를 한번 생각해보라! 해안에서부터 계단식으로 그림같이 꾸며진 언덕들 위로 가옥들이 솟아 있고, 집들 사이에는 짙은 그늘을 드리운 나무들이 많은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왼편 끝의 언덕에는 영국 영사의 훌륭한 빌라가 있고, 그 뒤편에는 몇몇 조선 요새가 능보와 성곽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편 끝자락에는 또 다른 언덕이 있는데, 여기에는 매혹적인 일본식 찻집과 정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두 언덕 사이로 유럽식 고층 건물이 있다. 그 뒤편으로 세 번째 언덕이 있는데, 이 위에는 사각형의 튼튼한 탑을 갖춘 당당한 건물이 있고,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정원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넓은 돌계단이 도시와 이곳을 이어주고 있다. 나는 그것이 아마도 조선의 수령이나 관찰사의 거주지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내가 우리 배의 선장에게 이런 내용의 질문을 하자, 그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여기에서 조선인은 그 어떤 것도 명령할 수 없습니다. 조선 관청도 없습니다. 저기 위에 보이는 아름다운 집은 마이어 씨 댁입니다."

 

조선의 마이어라니! 마이어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일곱 개의 봉인으로 닫혀 있던 땅이 유럽인에게 개방되자마자, 이 땅에 들어온 최초의 유럽인 가운데 한자리를 마이어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마이어 상사는 조선에서 명성 있고 사랑받는 가장 영향력 있는 상사다. 그리고 마이어 상사의 사장 중 한 명인 함부르크의 마이어H. C. E. Meyer는 조선이 유럽에 두고 있는 유일한 명예영사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유럽에 어떠한 외교적 대표부도 갖고 있지 않다. 심지어 영국에서도 없다. 그래서 유럽의 상품과 정보를 얻기 위해서 조선이 제물포에 있는 마이어 상사에 의지해야 하는 것처럼, 유럽이 조선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함부르크에 있는 마이어 영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한다. 아주 드문 형태의, 아마도 세상에서 유일한 이중적 지위라 할 수 있다!

 

.닻이 내려지자마자 승객들을 육지로 이송하기 위해 일본식으로 제작된 삼판선이 다가왔다. 이 신생 항구에서 당분간 도크와 부두 시설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더욱이 썰물 때에는 나룻배로 육지에 도착하는 것조차 어렵다. 썰물 때면 해안선이 수백 미터 밀려나가고, 사람들은 제물포와 반대편에 놓인 산림이 무성한 로즈 섬' 사이에 있는 작은 섬들을 물에 빠지지 않고 걸어서 갈 수 있다. 하지만 밀물의 장난은 때때로 수심 10미터에 이를 정도로 매우 심하다.

 

우리 배와 동시에 일본 부대 수송선이 도착해 항구는 온통 일본 군인으로 붐볐다. 조선 삼판선의 다수는 일본 깃발을 달고 있었다. 일본 깃발은 도시의 수많은 건물뿐 아니라, 찻집을 둘러싸고 오른쪽으로 뻗어 있는 대병영의 천막 위에서도 휘날렸다. 상륙할 때 나는 일본군 대대들의 긴 행렬을 따라 걸었다. 큰길에 있는 집들은 일본 군인으로 넘쳤다. 내가 그나마 쓸 만한 숙소로 구한 다이부쓰 호텔은 유럽식 시설을 갖추었지만 일본인 소유였다. 내 시야에 들어온 도시는 온통 일본식이었다. 이 조그만 무뢰한들은 이웃나라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노획물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은 제물포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유럽인 지구가 있고, 바로 옆으로 초라한 조선인 마을이 잇닿아 있다. 왼편에는 영국 영사관을 향하여 솟아오른 언덕에 영사관과 상가 그리고 아편굴을 갖춘 중국인 거주 지역이 있다. 그러나 하늘의 아들인 중국인들은 일본인들처럼 자신들의 무역 회의소를 두고 있다. 세관을 겸하는 우체국도 있다. 중국인 관세청은 이미 말했듯이 조선의 세관도 관리한다. 그들은 수입을 서울로 보내고, 베이징에 연례 보고서를 올린다. 아마도 그 반대가 중국인들에게는 더 좋겠지만 말이다.

 

 

 

제물포의 일본조계거리

 

하지만 가장 중요한 외국인 거주지는 일본인 지구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조선 무역을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뿌리내린 일본인은 본국이나 부산에 있는 일본인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곳의 일본인은 전통적인 일본식으로 일하며, 대개 어부나 뱃사람 또는 짐꾼이다. 그들에 비해 제물포의 일본인은 현대적인 '신사' 들이고, 고기잡이나 노 젓기, 짐 나르기 등은 조선인에게 맡긴다. 조선인들은 짐꾼들이고 일본인들에게 봉사한다. 황해에 거주하는 세 인종이 이곳 제물포에서보다 더 첨예하게 마주치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제물포를 흥미롭게 만든다.

 

경주마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은 마구간이 아니라 경주로에서 내릴 수 있다. 제물포는 그러한 경주로이며, 유럽인은 관객이다. 소수이긴 해도 일본인은 그래도 제법 중국인과 조선인보다 앞서 있다. 그다음이 중국인이고, 조선인은 그 뒤를 마치 짐 끄는 말처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조선인들은 경기에 참가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다. 언젠가 교역이 좀 더 확대되고 나라가 개방되어 이 나라의 낡은 문화의 폐허 속으로 현대적 삶이 들어올 경우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확실히 소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잿더미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교역과 생산이 다음 10년 동안 두 배가 되지 않는다면 내 판단은 크게 어긋나게 될 것이다.

 

비록 제물포의 중심 지역이 일본인 지역이긴 해도 왜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호텔과 상점에서부터 우체국과 영사관 건물에 이르기까지 상당수가 유럽 스타일로 지어졌고 주민들도 각양각색의 유럽식 옷을 입고 있다. 부산은 100년이나 된 오랜 일본인 거주지라서 그림 같은 풍경을 가진 일본 제국의 여느 도시와 같이 일본식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제물포는 일본 대혁명' 이후 10여 년간 투자되고 건설된 도시로, 일본인의 오래된 전통 방식 대신 유럽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그들의 탄력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일본인 지역은 그곳에 접해 있으며 독자적인 행정권도 가지고 있는 유럽인 지구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도시 전체가 1만 명을 넘어서지는 않지만, 그들은 네 곳의 자치행정 구역과 네 개의 상이한 경찰 병력, 네 개의 상이한 법정을 가지고 있으니, 지구상에서도 유일하게 별난 곳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일 몇 채 안 되는 가옥을 도시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면, 도시 전체보다 더 기묘한 것은 유럽인 구역이다. 군대 초소로 끝나는 일본인 구역과 유럽인 구역을 하나의 도로가 갈라놓고 있고, 다른 길 하나는 초라하고 지저분한 조선인 촌락과 경계선을 짓고 있다. 동아시아의 세 민족 사이에 끼인 채, 영국인, 독일인, 미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덴마크인, 이탈리아인,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포르투갈인을 모두 합쳐 32명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이 소수의 유럽인 무리가 문화, 언어, 취향, 풍속이 그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도시 행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클럽까지 하나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라이프치히 화보신문><그래픽>지와 <르몽드 일러스트> 옆에 놓여 있고, 작고 잽싼 일본인이 온갖 술을 섞어 만들며, 저녁에는 프랑스인이 독일인과, 러시아인이 영국인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하거나 당구를 친다. 어떤 부류는 독립적인 상인들이고, 다른 부류는 중국의 세관이나 조선 항구에 근무하는 사람들인데, 대다수는 선장이나 건축가 또는 선교사들이다.

 

선교사들은 유럽인 지역에서 살지 않고 먼 외곽, 그것도 조선인 마을 너머에 거주한다. 이들은 가톨릭과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그리고 미국의 고백파라 불리는 종파의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그곳에 편리한 설비를 갖춘 아름다운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데, 상인들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 단지 전부 프랑스인인 가톨릭 선교사들만이 검소하게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들은 선교활동에서 다른 모든 선교사들을 합친 것보다 열 배나 더 큰 성과를 올리고 있고, 열 배나 더 우호적으로 대우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몇해 동안 선교사 두 명이 죽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났다. 침례교와 감리교의 미국인 선교사 둘이 사망했을 때에는, 그들 교우 중 한 명이 내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아무도, 심지어 유럽인 거주지에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 선교사가 죽었을 때는 1천여 명의 조선인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고, 다들 슬퍼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온정적인 개신교도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이러한 진실에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조선에서 내가 사귄 유럽인들 모두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제물포의 조선인거리

 

만약 산책을 하다가 유럽인 지구를 떠나 조선인 마을로 들어선다면, 두 눈을 가리고 있더라도 이를 즉각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인들의 거리는 아주 청결하고 질서 있게 유지되고 있지만, '거류지'가 끝나는 곳에서 깨끗함이 갑자기 사라지고 날씨에 따라 끝도 없는 먼지와 진창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짚으로 덮인 초라한 진흙집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고, 집들 사이로 포장 안 된 흙길이 오른쪽, 왼쪽으로 휘어지기도 하고 빙 돌아가기도 하며, 위로 아래로 형편 되는 대로 이어져 있다.

 

유럽인 지구 바로 옆에 조선인 '시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사고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나 굶주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여기에서 구운 개고기나 날생선, 삶은 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오이, 호박과 붉은 고추 등을 즐겨 먹는다. 원래는 하얗지만 먼지와 오물이 덮인 해진 옷을 두르고, 결혼 여부를 표시해주는 모자()를 쓴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입에 담배를 문 채, 지저분한 간이음식점과 싸구려 상점들 사이를 이리저리 배회한다. 또는 길거리 쪽으로 개방된 집에서 돗자리를 깔고 빈둥거리며 잠을 자거나 논다.

 

이들이 절대 하지 않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 이다. 아마도 죽어버린 이 나라에 일자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할 기회가 좀 더 많은 항구의 조선인은 더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다. 게다가 중국인처럼 인내력 있고 만주인처럼 힘이 좋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불쾌하고 역겨운 더러움 역시 고유한 사정이 있다. 시장에서는 단지 남자들만이 장사를 하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닦거나 문지르거나 비질을 하는 것은 조선 남자들에게 명예롭지 못한 일인 것 같다.

 

우리가 시장을 떠나 조선인 고유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풍경이 바뀌었다. 길과 집들, 또 가옥을 둘러싸고 있거나 그 안에 있는 정원은 대단히 깨끗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한데,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집안을 돌보는 것은 여자의 몫이다. 여자들은 감동적인 부지런함과 감탄할 만한 인내력으로 그 의무를 다한다. 주민 숫자가 수천을 헤아리는 마을의 색깔은 온통 회색빛이며, 예쁜 일본식 찻집 옆에 있는 언덕에서 보면 금방 쌓아올린 한 무더기의 흙더미처럼 보인다.

 

오두막이라고나 해야 할 집들은 아주 좁은 정사각형 모양의 방을 겨우하나 가지고 있다. 반은 돌로, 반은 짚과 진흙으로 만든 벽 위로 다듬지 않은 나무기둥을 올려놓는데, 의도적으로 휘고 반듯하지 않은 것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나무줄기를 가로질러 다듬지 않은 나뭇가지들을 걸치고, 이 이상한 지붕의 뼈대 위로 촘촘한 짚단이 층층으로 고정된다. 물론 마디와 옹이 등으로 인한 나무줄기의 불규칙함은 지붕 위에 그대로 드러난다. 고르게 만들어진 지붕은 보기 드물다. 마당을 두른 담장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다듬지 않은 굽은 나뭇가지를 갈퀴 모양의 나무 위에 얹고 길게 늘어뜨린 짚단으로 덮는다.

 

일본집은 밝고 청결하며, 바람이 잘 들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개방되어 있다. 반면에 조선의 가옥은 폐쇄적이고, 어둡고, 숨 막히며, 축축하다. 일본 집에는 다양한 공간이 있고 지붕 하나가 그 공간들을 다 덮고 있는 반면, 조선의 가옥은 단지 하나의 공간만을 가지고 있다. 다른 공간이 필요한 경우 조선인은 첫 번째 집 옆에 다른 집을 하나 세운다. 말하자면 방 하나가 그 자체로 하나의 집인 것이다. 하수도와 상수도, 가스등 같은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가난한 이 지역에서 매우 검소한 유럽인의 요구라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집은 수령의 관저다. 사실 그의 집은 인천에 있는데, 그는 여기서 종종 머문다. 하지만 누군가 그를 필요로 할 때는 결코 이곳에 없다. 나는 이키 큰 고관을 그의 관저에 있는 중국 양식으로 지어진 바깥문에서 만났다. 그는 엄청나게 크고 둥근 안경을 끼고, 은제 단추를 단 크고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노인이었다. 진홍색 소매를 단 주황색의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발까지 이르는 소매 없는 검은상의를 입고 있었다. 흰옷을 입은 예쁘장한 소녀 같은 시동이 그의 가마옆을 따랐다. 가마는 네 명의 짐꾼이 들었는데, 이들 역시 녹색 띠와 가장자리를 댄 흰옷을 입고 있었다. 긴 자줏빛 예복을 입은 두 명의 비서가 이 고관을 수행했고, 여섯 명의 군인들이 이 독특한 행렬을 앞장서나갔다. 이들이 제물포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 수비대 전부였다!

 

이런상황인데 적은 이 나라에 들어와 있다! 일본은 제물포를 점령했고, 이미 수도마저 점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행동거지가 더 낫다. 그들은 모든 물품을 현금으로 지불했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으며, 술에 취한 채 다니지도 않으며 규율이 잡혀 있었다. 나는 일본 영사의 저택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일본 장교 집단을 만났는데, 대다수가 교양 있고 예의바른 사람들이었고 하나 정도의 유럽 언어와 정중한 예절을 알고 있었다.

 

제물포 상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동전은 일본의 엔화이지만, 중국인지역에서는 중국의 은량과 은괴도 쓰인다. 은화가 아니라 단지 청동과쇠로 만든 동전만을 갖고 있는 조선인은 일본 은화를 꺼리고 일본 동전으로 받는 것을 더 선호한다. 항만의 장은 독일인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증기선 선단 선장들도 유럽인이다. 이 선단은 모두 네 척의 작은 해안증기선으로 이루어졌는데, 소규모 항구들을 찾아다니며 거기에 쌓여 있는 토산품들, 주로 쌀과 콩, 생선을 제물포로 운반한다. 이렇게 일주를하는 데에는 날씨나 안개와 같은 기상 조건에 따라 3일에서 14일이 걸린다. 내게 이 나라와 주민들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준 선장들은 급여를 조선식 시간관념과 비교할 때 정확한 때에 받는다. 내가 체류하는 동안 그는 다섯 달 전부터 월급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돈이 필요하면, 이 신사들은 간단하게 화물 운임료에서 자신의 월급을 빼고 나머지만 건넴으로써 곤란을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