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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자전거와 인천

by 형과니 2023. 7. 10.

자전거와 인천

仁川愛/인천이야기

 

2022-06-27 00:05:35

 

 

자전거와 인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자전거는 한때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교통수단으로 통근·통학의 출퇴근용과 운반 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나, 오늘날 시내를 메운 자동차 행렬에 밀려 이용 환경이 저조하고 사고 위험성도 높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면당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에 따른 환경오염, 교통 체증 등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주목받으면서 최근 각 지자체는 친환경 교통수단인 자전거를 많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활성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언제 유입됐는가에 대해 이렇다 할 정설은 없다. 단지 개화기 신문물이기도 했고, 당시로서는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오랫동안 체류할 목적의 선교사, 공사나 영사 및 해관 직원 등의 외국인과 개화파 인사 등의 회고담에 이와 관련한 기록이 산재해 있어 추정은 가능하다.

 

미국 공사였던 알렌의 견문록에는 1884년 미국 장교 한 사람이 제물포에 정박 중인 배에서 내려 딱딱한 바퀴에 안장이 높은 구식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 올라왔다 했고, 혼잡한 서울 거리를 누빌 때 알렌은 말을 타고 이 장교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했는데 이것이 자전거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인 듯하다.

 

또 다른 예로 1893년 조선에 입국한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설립자인 의사 에비슨은 조선에 최초로 자전거를 들여온 사람은 1888년 관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의 영어선생으로 초빙된 미국인 선교사 다리지엘 벙커로, 그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유일한 서양인이라 소개했고, 1895년에는 고무튜브의 새 자전거를 영국에 주문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1896년 망명 후 고국에 되돌아온 서재필은 독립문 신축 공사 현장에 갈 때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전해지기도 하며, 2년 후에는 그에게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윤치호가 하와이에서 통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를 들여왔다고 전해진다.

 

1890년대 후반 들어 자전거는 빠르게 보급됐는데, 완제품은 물론 부속품까지 이미 상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독립신문’ 1899713일자에 개리양행(開利洋行)에서 판매하는 미국 자전거 상품이 광고된 이래 본격적으로 다양한 자전거 상품을 소개하는 광고가 잇따랐다. 당시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애륜가(愛輪家)’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듯 190512월에는 가로관리규칙(街路管理規則)’이 제정돼 "야간에 등화 없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금한다"라는 조문이 있는 것으로 미뤄 보아 이 무렵에는 이미 자전거가 어느 정도 상당수 보급됐다고 보여진다.

 

최초의 자전거 경주대회는 1906422일 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서쪽인 훈련원에서 열려 육군 참위 권원식과 일본인 요시가와가 결승전을 치렀다. 이 시기 훈련원은 영어학교학생 운동회, 공립·관립·사립의 소학교연합대운동회 등을 개최하는 체육행사 공간으로 자주 활용됐는데, 이때의 자전거 경주대회는 운동회 행사 중 한 종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전거 경주만을 위한 최초의 경기는 19134월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자전거경주회이다. ‘매일신보’ 411일자 광고에 따르면 412일 인천 만석동 매립지에서 시작해 13일 경성, 20일 부산, 27일 평양 등지에서 개최키로 소개됐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413일 서울, 14일 인천, 27일 평양, 511일 개성에서 개최됐다. 그리고 서울 경기에서 엄복동 선수는 일본인들을 물리치며 우승함으로써 이때부터 그는 자전거 왕으로 불렸다.

 

해방 후 19464월 대한자전거경기연맹이 발족되고, 1947년에는 세계사이클연맹에 가입해 국제 무대에서 활동할 기틀을 마련했다. 1950년대에 들어 인천 꼬마로 불리던 작은 체구의 김호순과 인천 출신의 무명 신인 이홍복 선수가 등장했고, 이들은 1958년 제3회 동경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나란히 국제대회 최초 메달 획득이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인천은 자전거의 유입지이자 경기 개최지로서, 또 해방 후 최초로 국제대회 메달을 획득한 선수를 배출한 지역으로서 연원이 깊다. 우리 고장의 사이클 영웅들을 기억하면서 범시민 자전거 대회를 개최해 보는 것도 인천을 널리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