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지붕 즐비한 제물포 / 퍼시벌 로웰 Percival Lowell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22-03-31 10:25:10
1883년 개항 초기의 제물포와 월미도(1883)
ㅁ 사진설명 ————————————————————————————————————————
제물포 포구는 개항 당시 인구 수천명에 불과한 한촌이었다.이 사진은 개항 직후의 제물포 포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바닷가 주변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초가집과 어선들의 모습을 통해서 개항 이전의 제물포가 한적한 어촌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물포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이전까지 큰 기선이 제물포 내해로 용이하게 들어오기 위해선 월미도에 접안해야 했고, 이를 위해 외국 세력들은 월미도에 저탄시설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출처 공공누리 / 사진및 설명
초가지붕 즐비한 제물포
퍼시벌 로웰 Percival Lowell
제물포는 바다와 육지의 특성을 모두 갖춘, 초가지붕이 즐비한 조그만 섬이다. 마을을 찾으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근방까지 다 와놓고도 대부분의 항해자들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여기기 쉽다. 특히 겨울철에는 풀과 지붕을 덮은 볏짚이 똑같은 갈색으로 변해버리고, 나무 한 그루조차 없기 때문이다.
제물포는 항구가 아니다. 해변과 진흙으로 된 평지가 있을 뿐, 항구로서는 부적당하다. 대신에 하나의 정박지로서 해변 가까이 가는 일 자체가 항해이다. 다른 섬들이나 시가지의 조망에서 격리된 채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황량한 그곳에 외선 두 척이 정박하고 있다.
바다 쪽으로 경사 잔 언덕 위에 일본인 거류지와 유럽식 건물인 일본영사관이 우뚝 솟아 있다. 크고 흰 이 건물은 먼바다로 향한 하나의 이정표처럼 태곳적 황량함을 지닌 제물포의 풍광을 희석시켜준다.
제물포는 한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는 해류의 물결이 대양으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밀물과 썰물이 점차로 사라져 그 본류와 분리된 후, 많은 섬들의 주위를 맴도는 곳이다. 마을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이기도 하다. 대개의 항구는 도시에서 가깝다는 조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데 제물포는 도시와 바다라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조건을 만족시킨다 해도 선박들은 1마일밖에 정박해 있어야 한다. 여기저기 산재한 언덕과 계곡 그리고 조수의 높낮이는 해안을 육지로 만들기도 하고 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밀물 때는 크고 느린 돌고래 같은 섬들이 바다 위에 점으로 뜨고, 썰물 때는 모습을 달리해 토탄 지역의 산처럼 보인다. 하나의 큰 만이던 것이 번들거리는 늪지로 변하고 곧 수평선 가장자리에 대양을 만들기도 한다.
조선인들은 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아니다. 바다건 육지건 이웃한 나라와의 교류를 좋아하지 않는 민족의 기질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는 단절돼 왔다. 이웃 민족의 해적질은 조선과의 연안 교역을 더욱 와해시켰고, 조선인들을 달팽이처럼 스스로를 안으로만 숨어들게 했다. 게다가 자연 또한 조선인들을 외부지향적이지 못하게 했다. 조수의 높이 때문에 부두를 만드는 일. 이 불가능했을지 모르나, 그들은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배를 정박시키려면 해안 멀리서 멈춰야 하고, 해안 가까이 대려면 밀물을 기다려야 한다. 이처럼 조수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결국 이 때문에 상륙과 이륙은 하루에 한 번씩밖에 할 수가 없다. 육지를 떠나면 돌아오기가 무척 힘들고, 돌아왔다 하더라도 다시 떠나기가 어렵다. 자연히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약해지고 외국과의 교역은 꿈도 꾸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황해의 해안가 마을은 황량한 해안이 말해주듯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했다. 중국이나 일본 영해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함대 대신 여기서는 종종 섬마을로 생필품을 실어 나르는 범선을 만날 수 있다.
한나라가 항해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였는가는 그에 대한 어휘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이나 조선 모두 자연발생적인 용어가 부족한 것을 보면 항해의 발달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된다. 배의 형태는 단순히 '큰 배'와 '작은 배'로 분류될 뿐이고, 얼마나 빠른 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또 배의 선미는 높고 선두는 낮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흡사 거꾸로 움직이는 것 같다. 이러한 선채 구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데 비록 바다의 풍파에는 강하지 못하지만, 선장으로 하여금 넓은 시야를 갖도록 해준다.
조선 선원들로 말하자면, 우선 외양이 서양인과 일본인의 중간모습을 하고 있다. 희 무영 띠를 머리에 두르고 차를 마시면 농담하는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언뜻 바다로 몰려온 한 무리의 노파들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이마에 두른 띠에서는 넘치는 용기를 느낄 수 있다.
제물포라는 이름은 '여러 강의 둑' 이라는 듯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지명이 붙게 된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전설 때문이다. 이미 몇 천년 전에 제물포가 조선의 교역항이 되리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이것이 곧 사실로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예언에는 가까운 인천까지 포함됐는데, '인천'이라는 이름은 '인간을 사랑하는 강'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물포는 이름만 그럴싸한 명색뿐인 우두머리처럼 한가로이 졸고 있으며,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다.
제물포는 이제 막 일어서려고 하는 서구의 신흥 촌락과 흡사하다. 급히 들어선 몇몇 오두막 사이로 소규모의 일본인 거류지와 유럽세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은 일본영사관뿐이다. 오두막 사이에 높은 울타리를 쳐서 경계를 표시한 영사관은 일본 거류민이나 자체 경비를 위해 교대로 순찰을 돌고 있을 뿐 서울에서 바다에 이르는 길목에 자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보람도 없이 오늘날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언덕 중턱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정확히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제물포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약 27마일 정도이다. 서울과 통하는 주요 통로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넓은 도로로 말, 가마, 사람 그리고 짐을 실은 황소가 모두 이 길로 지나다닌다.
평민은 걸어서, 관리는 조랑말이나 가마를 타고 다니는데 조선에서 가마는 일상적인 교통수단이다. 그러나 유럽인들한테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언뜻 보면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위엄이 느껴질지 모르나, 실상은 겉만 번지르르한 불편한 교통수단이다.
가마는 의자가 아니라 막대기 위에 얹힌 장방형 상자로 되어있다. 상자 속은 가로 세로 각각 2.5 피트의 빈 공간으로, 거기 들어가 앉아 있으면 마치 움직이는 방안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앞에는 들고나갈 문을 두었고, 분이 을 , 그 위에는 여닫을 수 있는 휘장이 붙어있다. 양 옆으로는 작은 창을 냈는데, 거기 붙은 2 인치 크기의 네모난 유리는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여행자가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창이 작고 높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치 육지가 보이지 않은 바다 위에 떠있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안으로 전달되는 흔들림은 더욱 그런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
두 사람이 가마를 매는데, 막대기 양끝에는 가죽끈으로 알맞게 멍에를 만들어 등과 팔에 부담을 나누어질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장치는 안에 탄 사람의 몸 전체를 움직이게 하면서 승객에게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장거리 여행 때는 교대하기 위해 두 사람의 가마꾼이 더 따라 간다. 긴 막대기를 가마 밑에 끼워 가끔씩 동료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도 그들의 임무이다. 이런 경우에는 안에 탄 사람이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가 없다. 게다가 가는 도중 아무런 통보 없이 가마꾼이 바뀔 때는 생각보다 훨씬 큰 불편을 겪게 된다. 마치 평탄한 길을 잘 가다가 갑자기 돌에 걸렸을 때와 같은 기분이다. 어쨌든 걷는 데 익숙한 유럽인으로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클리포드 이후 우주가 주름져 있다는 설을 믿기는 어렵게 됐지만, 조선을 여행한 사람들은 아마 그렇다고 여길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물에 푹 젖었다가 겨우 마른 몇 겹의 종이처럼 그곳의 땅 표면은 울퉁불퉁하다. 언덕길을 계속 오르노라면 그 노고를 보상이라도 하듯 반대편으로 내리막길이 잠깐 나온다. 그리고는 또 오르막이 이어진다.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는 것은 지루할 뿐만 아니라 어떤 기대도 갖게 하지 못한다. 숲으로 우거진 길이라면 매우 아름답겠지만, 벌거숭이산은 삭막하며 보잘것없고, 인간에 의해 짓밟힌 흔적이 역력하다. 제물포와 서울 간의 길 풍경은 조선의 다른 어느 곳에 지지 않을 만큼 황량한데, 한마디로 말해 흥미로울 것이 전혀 없다.
구릉 위쪽은 드문드문 선 소나무와 키 작은 갈색 풀로 덮여있고, 아래 쪽에는 넓은 장기판 같은 논이 펼쳐져 있다. 스쳐 가는 풍경들은 대체로 암울하고 어두침침한 색조를 띠고 있다. 유독 겨울의 얼음과 흰 눈만이 이 침울한 분위기에 다소 활기를 줄 뿐이다.
조선의 또 다른 특징은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돌담이나 울타리, 그 밖에 사유지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없다. 여러 채의 민가가 옹기종기 붙어있을 경우에만 울타리나 담을 두는데, 그 외의 경우는 집 안을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돼 있다.
조선인들이 경계선에 대해 개념이 뚜렷하지 못한 것은 소유지를 사적으로 분할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나뉜 땅에 특별한 경계를 둘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경작지의 대부분은 벼농사를 짓는데, 벼는 거의 다 자랄 때까지 물이 공급되어야 하므로 경계를 두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논과 논 사이의 논둑이 분할선이면서 동시에 길 역할을 한다.
조선의 도로는 도로라는 이름에 과분할 정도로 빈약하다. 그저 오가는사람들의 발자국에 따라 만들어진 작은 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계획적으로 길을 닦은 것이 아니라 어쩌다 생겨났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자연적으로 생긴 이래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이라곤 미쳐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이런 점은 보수(補修)라고는 전혀 없는 조선의 풍습과 일치하는 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록 순탄한 여정은 아닐지라도, 여행자는 군데군데 사려 깊게 세워진 못말 덕분에 헤매지 않고 원하는 곳에 당도할 수 있다. 이곳의 푯말들은 대체로 회화적이다.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의인화해 세워 놓았다. 규격을 갖춘 번듯한 이정표에 익숙한 사람으로서는 조선의 색다른 이정표에 신기함마저 느낀다. 또한 모퉁이를 돌자마자 불쑥 나타나는 사람의 형상과 마주칠 때면 깜짝 놀랄 뿐 아니라 그 표정을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얼굴은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두커니 서있는 하나의 목각 초상일 뿐이다. 어쩌면 군자의 얼굴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지독한 흉악범 초상 같기도 한데, 사람마다 그에 한 말이 다르고 그에 관한 설명도 없다. 다만 어렴풋이 전해 오는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천 년 전에 살았던 유명한 명장으로서 도로가 없는 지역에 개선된 도로체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업적을 기리고자 그의 초상을 각아 푯말로 사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유래에 관한 이 같은 이야기는 흉측하게 생긴 목상이 주는 인상을 일순 경탄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인공은 극악함이 최고에 달했던 흉악범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네거리에 그의 초상을 내다 걸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이 목상을 '장승'이라고 부른다. 몸통 부분에 해당하는 장승의 하단부에는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글자가 쓰여 있고, 그 바로 아래에 길 안내가 되어 있다. 김 창수 엮음 인천의 산책자들 제4부 푸른 눈동자에 비친 제물포 中
Percival_Lo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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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벌 로웰은 조선에서 1983년 12월부터 1884년 3월 중순까지 약 3개월간 한양에 머무르면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1885년, 그는 이 기록을 정리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을 발간한다.. 이 책에서 로웰은 풍물을 기록하는 것 외에도 고종의 어진(御眞)을 포함한 당시의 조선 풍경을 찍은 사진 25매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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