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타운 / 1996.2.4 이 규태 코너
인천의관광/인천풍경
2022-03-25 01:11:12
대불호텔 / 중화루
차이나 타운 / 1996.2.4 이 규태 코너
한말에 경인철도가 개통되자 손님이라야 많았을 때가 겨우 20명으로 적자투성이였다. 이에 철도회사에서는 한양 도처에 기차 광고문'이라는 것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녔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철도난 증기와 기계의 힘으로 여객을 장차하야 육상을 쾌주하난 것이니 남대문에서 마포 용산을 가고 오는 시간이면 인천에 왕래함이 넉넉하고 그 값도불과 기푼이니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의 가마 값이면 족하니라.(中略) 류리창에 기대앉아 요지경같이 경인 풍광을 스치고 나면 기도 인천 하여 청관양관(淸館洋館)의 흰 벽 붉은 기둥이 산처럼 옹기종기 솟고 중화루(中華樓) 공화춘(共利春) 주람에 앉아 백주(白酒) 청찬(淸餐)에 거나하여 당일로 돌아와도 해가 남으니 어찌 비장방(費長房)의 꿈이 아니리오.'
비장방은 천리 만리를 날아다닌다는 선인(仙人)이다.
흰 벽과 붉은 기둥이 옹기종기하고 청요리집이 즐비했다는 청관(淸信)이 인천의 명물이요, 그 무렵에 기차 타고 이 차이나 타운에 가서 한 잔 마시고 오는 것이 당시 한양 멋쟁이들의 풍류였던 것이다. 이 청관이 개설된 것은 1885년 원세개(袁世)가 청나라 공사로 부임하면서 동순태(同泰), 인합동(仁合東), 동화창(東和昌) 등 수십 상업 부대를 거느리고 와서 이곳에 집단적으로 점포를 차리게 하면서였다.
바로 중국 상품뿐 아니라 양품은 거의가 이 인천의 청관을 거쳐 나갔던 것이다. 인천 중구 선린 북성 양동에 걸쳐 있는 이 차이나 타운에서 기억되어야 할 건물로 수년 전에 헐리고 없는 중화루(中華樓)를 들 수 있다. 1887년 우리나라 서양 건축 일곱 번째의 역사적 문화재로 수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가장 오래된 양식 건물이었다.
이 중화루의 주방장인 주사부(周師父)의 북경요리를 기억하는 노인도 적지않다. 개국 한국에 들르는 외국의 명사들은 예외 없이 이 중화루의 전신인 대불(大佛) 호텔에서 유숙했었다는 것만으로도 보존했어야 했다.
구정의 이 청관놀이는 대단했던 것 같다. 집집마다 긴 장대에다 폭죽을 수백 개씩 매달아 연쇄 폭발하게 하여 눈과 귀를 현란하게 하고, 무룡(龍)이라 하여 높은 나무다리를 타고 삼국지나 서유기의 인물 탈을 쓴 가장행렬은 인천에서 자란 사람들의 가장 인상적인 추억거리라고 인천향토사의 살아 있는 증인 신태범(愼究範) 박사는 말하고 있다.
청·일전쟁 전에는 2000여 명의 화교가 살았으며 그후 줄기 시작해 지금은 700여 명이 요릿집과 교자 집을 영위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쇠퇴일로를 걸어왔던 차이나 타운에 요즘 중국인들이 돌아오는 회귀 현상이 일고 있다 하며, 서양 대도시의 차이나 타운 같은 관광 명소로 키울 꿈에 부풀어 있다고 한다. (1996.2.4) / 출처 이 규태 코너 (1996-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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