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화첩紀行 / <52> 고유섭과 인천
朝鮮의 아름다움에 바친 영혼
일제강점기 살면서 우리 美術史 연구학계에 연구인력 씨앗뿌린 주인공40여세 짧은 생애동안 名著 다수 남겨
나는 지금 인천 자유공원 아래 중국인 동네인 청관(淸館)에 서 있다.서른해 전 우리는 이 근처 선린동의한 적산가옥에 살았다.여러 세대가함께 산 그‘마당 깊은 집’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문 앞에까지 짙은 해무(海霧)가 밀려와 있곤 했다.간혹 집을 흔들어놓는 무적(霧笛)에 놀라 아침잠을 깨기도 했다.그 기역자집 문간방에는 내 또래의 딸 하나를 데리고 중국인 남자가 살았는데 식당에나가던 그 사내는 가끔씩 냄비에 자장면을 담아와 우리짐에 건네 주곤했다.딸의 이름이 연화(蓮花)였는데기분이 좋은면“니예에엔”하고 연자를 중국음으로 길게 뽑아 부르다가도화가 나면“짱!”하고 외마디로 부르곤 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보면 소녀는 집 앞 커다란 회양목 아래 앉아있곤 했다.서편 하늘이 붉게 물들때까지 하루종일 바다를 향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때로는 나직이 중국노래를 부르기도 했다.어머니는 연화가‘이상스럽게’예쁜 것은 폐병 때문이라고 했고,저렇게 하루종일 바다의 습기를 마시고 있으니곧 죽고말거라고 했다.우리가 이사를 가던 날도 연화는 그 자리에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눈발 속에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선린동 그 골목을 다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그녀의 모습을바라보고 있었다.
내 추억의 사진첩 속에서 희미한기억으로 떠오르곤 하던 그 중국인소녀의 모습 같은 것은 이제 이 거리어디에도 없다.사라진 것이 어찌 소녀의 모습뿐이랴.신비로운 거대한 성(城)처럼 보였던 그 청관의 화려한분위기도,저물녘이면 진동하던 그청요리 냄새도,설날 밤하늘에 터지던 폭죽도 찾을 수가 없다.한때 2천명이 넘게 살았던 중국인들은 이제거의 떠나고 텅빈 거리에는 적막이가득할 뿐이다.삶은 이렇게 지나가는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것일까.
옛이름이‘민주홀’인 인천은 황해문화의 관문이자 개화의 물꼬를 튼곳이기도 하다.이 항구도시는 일찍이 중국의 상하이처럼 서구 각국의조계(租界)가 들어서면서,자유공원의 옛 이름이 만국공원이었던 것만큼이나 여러 문화가 교차한 곳이다.고유섭이 처음 경성제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지도교수마저“집안이 넉넉하느냐.이건 취직을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있어야하는 분야이다”고 했을 만큼 비인기학문분야이기도 했다.그러나 고유섭은 어떤 글에서,자신은 소학교 때부터 이미 우리 미술사 연구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거의 운명적인 길이었다 할 만하다.
한일협약 한해 뒤 태어나 광복 한해 전 세상을 뜨기까지 고스란히 일제 강점기를 보내면서 그는 아무도눈길조차 주지 않던 이 길에 들어와조선의 아름다움을 좇는 고독한 편력을 계속한다.그리하여 갖은 병고에시달리다 40여 세의 짧은 나이로 생애를 접기까지 10년 남짓의 기간 동안 실로 경이로운 저작물들을 쏟아놓는다.
28세 젊은 나이에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해서는 고려의 옛 미술과건축유적에 대한 연구서들을 냈으며그를 따랐던 3인의 제자들,황수영진홍섭 고(故)최순우 등과 함께 흰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일제라는 암담한 시대배경과,걷지 않으면 달구지를 타야 하는열악한 환경 탓에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이 더 애틋하게 발견되었는지도모른다.석양녘 들판에 서 있는 이름없는 화강암 석탑 하나에서도 그는우리 미술의‘무기교의 기교’와‘구수한 큰맛’을 보았으며 역사의 격랑속에서도 죽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온조선의 숨결을 느꼈던 것이다.
“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며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않다”고 했던 신념도 이처럼 발로 뛰고 손길로 쓰다듬어 가슴으로 품었던편력 속에서 얻은 결론이었을 것이다.일찍이 인천 문화운동의 씨앗이된‘경인 기차통학생 친목회’의 문학활동에 참가하여 시와 수필로 단련했던 문청(문학청년)이었던 그는 인천을 사랑하여‘경인팔경(1925)’,‘해변에 살기(1925)’같은 인천 소재의글을 남기기도 한다.그의 인천문화사랑은 민족문화사랑으로 확대되어갔다.그는 미술사 연구를 통해 비록나라는 빼앗겨도 민족의 정신만은 고스란히 우리의 문화유적 속에 깃들어있는 거라는 내밀한 믿음을 가졌던것이고,그래서 더 지극 정성으로 유물유적에 깃든 조선의 넋과 아름다움을 캐내려 했던 것이다.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던 때문일까.그는‘조선탑파의 연구’,‘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우리의 미술과 공예’,‘조선화론집성’등 이제는 이 분야의고전이 된 명저들을 초인적인 노력으로 숨가쁘게 쏟아놓기 시작한다.그러다 필생의 꿈이었던 본격적 우리미술사 저술을 위한‘조선 미술사료’를 유고로 둔 채 박물관 사택에서 숨을 거둔다.
평생“생활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병과 싸운”이 한국미술사 연구의고독한 선구자의 싸움이 비로소 끝난것이다.
/글-그림 金炳宗·서울대미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2432319990322m1221&set_date=19990322&page_no=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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