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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검여 유희강

by 형과니 2023. 3. 23.

검여 유희강

仁川愛/인천의 인물

 

 

서예계의 큰 봉우리 검여 유희강

 

생 애

 

1911년 인천 시천동에서 탄생

1943년 중국 상해의 미술연구소에 들어가 서양화 공부

1954년 인천시립박물관장

1955년부터 국전 서예부분에서 4회 특선해 추천작가로 활동

1976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검여 유희강은 지금부터 70여년 전 인천 서곳의 계양산이 올려다 보이는 시천동에서 태어났다. 여러 대를 이곳에서 살아 온 유의강의 집안은 대대로 선비 집안이어서, 형님 되시는 유희진 선생은 성균관 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덕망있는 학자이었고 유희강도 같은 학교에 다녔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붙들여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백범 김 구 선생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인천에 온 백범의 어머니를 그의 집에서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서 풀려나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김구 선생과 그 어머니를 집에서 쉬게 하고 시중을 들어 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백범 기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되자 유씨 집안의 신세를 갚는 뜻에서 유희강의 형님이신 유희진을 중국으로 초청하였으나 유희진은 장남인 까닭에 집안을 비우고 떠날 수 없어 유희강은 형님을 대신하여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중국 상해로 건너간 유희강은 1943년 상해미술연구소에 들어가 서양화를 연구하다가 조국이 해방 되자마자 한 걸음에 귀국하여 서울의 중국어 신문인 한성일보에서 활동하다가 인천 예술인협회가 결성되자 상해에서 사귄 미술평론가 이경성 등과 함께 인천으로 내려와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서예가로서 정열을 쏟기 시작한 것은 1952년 경부터였다.

 

그는 1952년 인천문총회관에서 박세림, 장인식 등과 함께 '대동서화 동인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그 모임의 부회장이 되어 활동하면서 서예활동에 온 정열을 바쳤다.

 

유희강은 1953년 국전에서 박세림, 장인식 등과 나란히 입선하고 다음 해에도 이들과 또 다시 입선하더니, 1955년부터는 특선과 문교부장관상을 연이어 수상하고, 1958년까지 계속 4회에 걸쳐 특선을 차지하므로서 1958년에는 추천작가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서예 활동에 혼신의 힘을 다한 보람이 있어 1959년에는 국전 심사위원 자격을 갖게 되는 국전 초대작가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글씨체를 임창순은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검여 유희강의 초기의 글씨체는 중국의 황산곡풍을 많이 따랐고 조 맹부의 육조풍에도 접근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대개가 틀에 맞고 아담스러운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뚜렷한 개성보다는 유행을 배제하지 않으려는 듯한 감을 주었으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세계를 발견하고 창조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검여풍의 완성을 보았고 원숙한 경지에 들어갔다."

 

그런가 하면 자유중국에서 우리 나라의 문화계를 둘러보러 온 동작빈 등 중국의 석학들은 우리 나라 현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때 당시 우리 나라 일류 서예가들의 글씨에는 곁눈질도 하지 않은 채 검여의 작품 앞에서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이것이 진짜 글씨라고 찬탄해 마지 않았다.

 

이러한 찬사를 한몸에 받았으나, 검여 유희강은 정열을 다하는 작품 활동과 함께 인천시립박물관장, 한국미술가 협회 중앙위원, 인천교육대학 강사, 홍익대학 강사, 서라벌예술대학 강사, 동덕여자대학 강사 등으로 쉴 틈조차 없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1969년 뇌출혈로 병을 얻어 그의 오른손이 마비가 되었다.

 

서예가가 오른손을 못쓰는 것은 축구 선수가 다리가 잘린 것과 같았다. 검여 유희강은 미친 사람처럼 통곡하며 방황하기도 했고 며칠 밤을 지새우며 괴로워 몸부림치기도 하였다. 서서히 안정을 되찾은 유희강은 드디어 왼손으로 붓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해 쓰고 또 보는 피나는 세월이 흘러갔다. 회갑을 맞으며 주옥같은 작품들이 세상에 발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를 설득하여 왼손으로 쓴 작품전인 좌수전을 열게 하였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인간의 최대의 적인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서예가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하고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검여 유희강의 후학들은 그 분의 높은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검여 유희강 서예집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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