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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제물포 구락부

by 형과니 2023. 3. 23.

제물포 구락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48:22

 

제물포 구락부

 

 

제물포는 인천의 한 해안 옛이름이다. 정확하게는 지금의 북성동 일대라고 한다.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 조선 초기부터 수군 기지가 있었다고 한다.

 

제물포라 하면 인천의 옛이름이요 고등학교의 교명과 경인선의 전철역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수년전만 해도 근교의 노인들은 인천시내로 나들이 할때 제밀 간다고 했었다.

 

아무튼 작은 포구 제물포는 1883년 개항되면서 크게 부상했다. 우리나라를 찾는 서양인들에게 처음으로 발을 딛는 제물포가 인상 짙게 각인되었음을 그들의 기록에서 짐작할수 있다.

 

우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은인이라 일컬어지는 허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제물포를 가장 중요한 수입항으로 활기차고 발전이 빠르다고 적고 있다. 특히 그는 외국인촌이 훌륭하고 멋있다고 했다. 가파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경치를 매력있게 보았다.

 

코리언 스케치를 쓴 게일 선교사도 각국기가 펄럭이는 외국인촌이 평화롭다고 했다.그러나 고종 황제의 고문관을 지낸 샌즈는 조선의 마지막날에서 한 나라의 관문 치고는 별 매력이 없는 곳이라고 썼다. 해안에 돌출한 헐벗은 언덕에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찾아보기 힘들다고 쓰고 있다.

 

런던의 데일리 메일 기자로 1906년 우리나라를 취재한 맥켄지도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일본인들로 꽉 차 급수문제가 어렵다고 적었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인천은 외교의 각축장이었다. 서울 보다도 외국인이 더 많았다. 이미 1897316일자 독립신문은 인천항 거주 외국인 수를 보도하고 있는데 영국인 남자 12명 독일인 8명 미국인 6명 프랑스인 5명 이탈이라인 2명 그외 포르투갈 스페인 오스트리아인 그리스인을 꼽고 있다. 그러니 영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영사관을 인천에 둘 정도였다.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사교장으로 사용할 제물포 구락부가 건립된 것은 1901년이었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자유공원 남록에 벽돌로 올린 2층 건물을 짓고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등을 마련했다고 한다. 격변기의 세월 만큼이나 용도의 변경도 많더니 지금은 인천시 문화원이 자리하고 있다.

 

내년3월 개관을 목표로 복원되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