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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인천항 초기 주요수출품 홍삼

by 형과니 2023. 3. 23.

인천항 초기 주요수출품 홍삼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50:34


인천항 초기 주요수출품 홍삼  
 

1898년 일본인 2명이 펴낸 '신찬 인천사정' 번역 완료 당시모습 생생 귀중한 자료

 
인천항 개항 초기의 주요 수출품은 무엇이었을까.

1883년 개항 이후 10여년 동안 인천항을 통해 해외로 나간 수출품 중 으뜸은 홍삼이었다. 이때는 또 쌀이 주요 수입 품목이었다.

특히 일본인들 사이에선 본국 각 지역별 언어가 뒤섞여 만들어진 또다른 일본어를 '인천어'란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번역이 완료된 '신찬(新撰) 인천사정(仁川事情)'에서 드러난다. '신찬 인천사정'은 1898년 야쿠시지, 오가와 유조 등 2명의 일본인이 펴낸 인천항 개항 초기의 인천 모습을 생생히 담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개항 초기 인천항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홍삼은 1890년 쌀에 밀린다. 직전까지는 쌀이 수입품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1890년 일본에 큰 흉년이 들었으나 한국에는 보기 드물게 쌀 풍년이 들었던 탓으로 쌀 수출이 급증한 이유를 분석한다. 인천항이 본격적인 미곡 수출항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게 1890년인 것이다.

특히 주목을 끄는 대목은 개항장의 풍속이다. 일본인들은 인천을 '작은 일본'으로 인식했으며, 인천에서는 도쿄·오사카·나가사키·쓰시마·야마구치 등 여러 지방의 언어가 뒤섞이게 되고 이를 '인천어(仁川語)'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도 인천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주의식이 희박했던 것으로 분류된다. 저자는 "(일본인들 중)평생을 인천에서 보내려 하는 사람은 새벽하늘의 별만큼 적다"고 표현할 정도다. 돈을 벌어 떠날 도시로 당시 일본인들은 인천을 여겼다는 얘기다.

또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의 생활풍속이 무척이나 저급했던 것으로 나온다. 절조도 품격도 없었으며, 무뢰한이 많았고 부패와 호화사치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인천에 최초의 조계를 설치한 일본인들은 '일본 거류민회'를 구성했는데, 회원 자격은 25세 이상의 남자였고, 거류지 안에 토지나 가옥 등을 갖고 있어야 했다. 무척 엄격했던 것이다.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원은 "신찬 인천사정은 인천 개항기의 다양한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자료"라면서 "타자의 언어를 갖고 우리의 기억으로 전환시켜 연구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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