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미도 언덕서 첫 점등···한국등대의 효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42:04
팔미도 언덕서 첫 점등···한국등대의 효시
등대는 어둠속을 항해하는 배들의 이정표일 뿐 아니라 삶의 길잡이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세워진 등대가 세계인의 희망을 나타내듯이 바다가 있고 배가 있고, 또 인생이 있는 한 등대는 언제까지나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나누는 상징이다.
그러한 운명을 투영하듯 등대는 세계 곳곳에서 문학작품이나 음악의 단골메뉴로 자리잡아 왔다.
우리나라 시인 김억(金億)이 ‘등대’를 읊었고 버지니아 울프와 헨릭 센키에비치는 소설로 엮어냈다.
또 한 조사에 따르면 등대는 우리나라 대중가요 노랫말에서 7번째 빈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내력을 품고 있는 등대의 역사,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인천앞바다 팔미도에서 시작됐다.
# 1-2003년, 새로운 역사
이 해 12월22일, 한 세기전인 1903년 세워져 1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인천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매김해온 팔미도 등대가 불을 끄고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어둠속 비바람과 함께 거센 파도가 몰아칠 때나, 수 개월에 걸친 기나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올 때 포근한 엄마의 품이나 다름없었던 등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등대의 규모는 높이 7.9m, 지름 2m크기의 원형 2층탑 모양으로 지금의 최신식 등대들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국내에서는 처음 보는 초근대식 시설이었다.
첫 점등 때에는 90촉광짜리 석유등을 사용했지만 1954년 8월 전기등으로 교체하고 전기식 무신호기가 설치됐다.
이어 1991년 태양광 발전시설, 1999년에는 위성항법정보시스템(DGPS)이 갖춰져 먼 거리를 항해하는 선박과 불빛의 오차가 5m이내로 좁혀졌다.
팔미도등대 불빛은 27마일 밖에서도 볼 수 있었으며 하루도 쉬지 않고 10초에 한 번씩 반짝였다.
이 등대 바로 옆에는 높이 31m, 지하 1층, 지상 4층크기의 최첨단 등대가 새로 세워졌다. 이름하여 ‘100주년 기념 등대’. 앞으로 100년이 될지, 수 백년이 될지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의 책무를 맡아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뎠다.
세계적으로 등대의 역사는 무려 2천년이 넘는다.
무려 120m높이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그 유명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등대가 인류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기원전 280년께. 가까운 일본의 경우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간논사키등대는 1869년에 설치돼 우리보다 30여년 앞선다.
# 2-1950년, 인천상륙작전
“전쟁이 발발한지 2달여.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속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일루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간만의 차 등 여러 악조건으로 성공확률이 거의 없다던 이 운명적 작전에 팔미도등대는 막중한 역할을 짊어지고 있었다.
연합군 함대가 무사히 인천에 상륙할 수 있도록 바닷길을 이끈 것이 팔미도등대였고, 등대에 환한 불을 밝혔던 한국인 ‘켈로’부대원들과 ‘클라크’대위는 작전의 숨은 공로자였다.
영흥도를 중심으로 각종 첩보활동을 펼쳤던 이들은 1950년 9월10일 밤 발동선을 타고 팔미도에 들어가 등대를 조사했다.
무슨 연유에선지 북한군은 이 등대를 전혀 쓰지 않았는데, 조사해보니 반사경의 전선이 끊어졌을 뿐 멀쩡했다.
그들은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부에 ‘필요하다면 등대를 켜놓겠다’고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사령부는 ‘9월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운명의 9월14일 밤, 그들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팔미도에 잠입해 등대에 불을 밝혔다.” -조우성 ‘인천이야기 100장면’
널리 알려져있듯, 이튿날 새벽 7개국 7만5천여명의 병력을 실은 261척의 연합군 함대가 인천에 무사히 상륙, 성공리에 작전을 마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팔미도등대가 6·25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원의 불빛으로 되살아났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3-1903년, 역사의 시작
국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기였던 구한말, 당시 우리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은 다투어 이양선을 몰고와 개항장 인천을 찾았다.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거점을 인천에 확보해 각종 이권을 손아귀에 쥐려고 획책했던 것이니, 인천항의 길목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했던 팔미도도 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점에 먼저 눈독을 들인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침탈의 야욕에 불타있던 일본은 인천항 개항 당시인 1883년 우리 정부와 맺은 통상장정(通商章程)에 “조선 정부는 통상 이후 각 항구를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礁標)를 설치한다”고 명시된 조항을 들어 1901년부터 등대건설을 강권했다.
강화도조약(1876년)으로 쇄국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조선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선박 입출항이 잦아지자 등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등대 하나 세우는 것도 부담스러울 만큼 조선의 국고는 넉넉하지 못했다.
결국 강압에 못이겨 정부는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등대와 백암등표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 이를 각각 완공했다.
이 것이 우리나라 등대의 효시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교묘한 술책과 강권에 의한 시대적 산물이었다.
# 4-등대체험행사
등대 100년은 일반인들에게 큰 선물 하나를 안겼다.
100년만의 새로운 등대 점등과 함께 2004년부터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바다의 날인 5월말과 여름방학 등 매년 2차례 등대체험행사를 해오고 있다.
행정구역상 중구 무의동인 팔미도는 한국전쟁 뒤 해군이 주둔하면서 민간인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현재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소속 팔미도 전탐감시대(레이더부대)가 선박의 검문, 검색을 위해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는 가족과 함께 팔미도에 가 등대시설과 등대원들의 생활모습을 직접 둘러보고, 산 중턱에 올라 인천항을 드나드는 대형 화물선들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등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운항선박과 팔미도 선착장 여건으로 한 번에 40명 정도만 방문이 가능하며 초등학교 4학년에서 중학교까지의 자녀를 둔 4인이내 가족이면 인천해수청 홈페이지(www.portincheon.go.kr)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이인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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