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나무 고갯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6 04:38:08
싸리나무 고갯길
정다운 옛 지명중 아직도 명맥을 잇는 곳이 배다리와 싸리재이다.
옛 자취는 사라진채 서로 이웃하면서 토박이 시민들에게 향수를 품게 한다.
4차선의 비좁은 경인선 철교였다가 지난해 복복선 공사로 시원스럽게 뚫린 배다리에서 시작 애관극장에 이르는 거리가 싸리재이다.
옛날 싸리숲이어서 싸리재가 되었다고 하나 정작 긴담 모퉁이 일대는 작은 소나무숲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완만한 고갯길이 당시엔 가팔라서 우마차의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임항지역의 수질이 좋지 않아 동쪽의 한인지역에서 급수를 했는데 겨울철 고갯길로 지장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1913년과 17년 두차례 언덕을 깎았다고 한다.
자연히 싸리재길은 번화가가 되었다.
그 지위는 60년대 초까지도 유지되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광복과 6·25를 지내는 동안 기억되는 싸리재는 이러하다.
배다리로 들어서면 우선 큰 포목점이 있었다.
주인 이씨는 늘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 있어 ‘파이프 이’로 통하는 멋장이였으며 집에는 피아노가 있어 피아노집으로도 불렸었다.
왼켠으로 율목동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는 함경도 북청 출신의 원장인 김응석의원이 있었다.
응접실에는 샴쌍둥이 표본이 있어 어린이 환자들에게 겁을 주었다.
싸리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포는 문방구점 희문당이었다.
무엇을 사든 반드시 영심환이나 압지등 사은품을 주어 학동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영심환은 달착지근한 소화제 환약이요 압지는 잉크 글씨가 번지지 않게 물기를 빨아내는 종이였다.
6·25 이후 비만의 경상도분 유씨가 잠시 재개업했는데 곧 문을 닫았다.
싸리재 마루턱이 주차장이 된 조흥은행 터에는 김휘관 양조장이 있어 소성소주를 양조했다.
그리고 건너편 대제한의원은 인력거업도 겸했다.
애관극장 아래로는 최익환 철공소가 있어 비교적 근래까지 도심 속의 대장간 모습을 보였었다.
지금 싸리재는 완전히 한적한 거리가 되었다.
문닫은 점포는 퇴락하여 무너질 지경이요 무슨 공사를 했는지 아스팔트 노면은 더덕더덕 땜질을 한 그대로 여름을 난다.
싸리재가 되살아날 날은 언제인가. ‘경동개발 설명회’라는 플래카드가 싱겁게 나부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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