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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용흥궁 주변

by 형과니 2023. 3. 25.

용흥궁 주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4 00:47:12

 

용흥궁 주변

 

사도세자가 비명에 가고 아들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측에서는 자신들의 장래가 염려되어 왕자를 새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정조의 이복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곳에서 은신군은 병사하고 은언군은 다시 강화도로 옮겨진다.

 

은언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인 상계군도 1779년 역모에 몰려 역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했고 은언군의 아내와 며느리는 1801년 천주교 박해때 신자로 사사되었으며 결국 은언군도 사사된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반역의 세력들은 왕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1844년의 민진용 반역에 포섭된 은언군의 손자인 이광과 그 아들 원경이 죽음을 당한다.

 

이 반역사건을 민진용이 도모했다고 해서 민진용의 옥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경응과 원범 둘만 살아 남는다. 천애고아가 된 이들은 강화로 쫓겨나 나무꾼이 된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어느날 원범에게 왕통을 이으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조선조 25대 임금인 철종이며 방송극 등으로 알려진 강화도령이다.

 

집안 대대로 죽임을 당하고 숨어살던 강화도의 노총각 나무꾼이 서울서 데리러 왔다는데 고분고분 따라 나설리가 없다. 겁에 질려 아니 가겠다고 해서 소동이 벌어졌다. 그가 외치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천둥치는 소리와도 같아 서울로 가는 고갯길이 천둥고개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오늘의 서울 경계인 고촌면의 48번국도상이다.

 

한편 1853년 강화유수가 원범이 살았던 초가를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용흥궁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궁이라니까 궁궐을 연상하겠지만 일반 살림집과 다름없다. 다만 경내에 철종의 집터임을 표시하는 철종조잠저구기라 쓰인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금 강화읍 관청리의 골목안 속칭 내숫골에 소재한다.

 

토지공사가 이달말 강화소도읍 육성사업으로 용흥궁 주변 공원화사업을 착공할 예정이다. 주변에는 고려궁지를 비롯 성공회강화성당 김상용순절비 등이 있어 정비가 요구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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