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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배경문학,예술,문화

월미도(月尾島)

by 형과니 2023. 3. 25.

월미도(月尾島)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5 16:03:45

 

월미도(月尾島-배준성(裵畯晟·시인)

 

 

달빛이 꼬리치는

월미도에

사랑이 출렁일 때

포구(浦口)에 넘나든

한 척()의 배가

노을 빛 선정(禪定)

잠을 깨운다.

 

파도(波濤)에 시린

항구(港口)의 질벽(膣壁)

밤마다 이글거린

사랑 놀이에

뜨겁게 뜨겁게

달아 오르고

 

선창(船艙)에 들고 난

가을색 배가

수북한 정()

쏟아 부을 때

이글거리던

월미도의 사랑은

격정(激情)에 취해

분화(噴火)한다.

 

달빛이 꼬리치는

월미도에

사랑이 뜸 들적에

파도(波濤)는 꽃 되고

향기가 되어

갈매기 나래 함께

춤을 춰 댄다.

 

 

 

인천이야기-38, 월미도[경인일보]

 

섬아닌 섬 월미도(月尾島). 그런 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습관처럼 으로 부른다.

인천 지리를 잘 모르는 외지인들은 월미도하면 자연스럽게 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월미도를 섬으로 여기는 인천인들은 거의 없다.

60여년전에 매립, 이미 육지로 변한 지 오래 됐기 때문이다.

이젠 토박이들 중에서도 월미도가 섬이었던 때를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매립전 월미도는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섬으로,

모양새가 마치 반달의 꼬리처럼 길게 휘어져 있다고 해서 월미(月尾)로 불렸다.

현재 월미도는 행정구역상 인천시 중구 북성동 1가에 속해 있다.

인천역 옆길을 끼고 왼쪽으로 인천항 갑문을,

오른쪽으로 가구·사료공장 등 삭막한 공장지대를 지나면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 이르게 된다.

 

월미도는 우리나라 근대화과정에서

특히 외세의 침략근거지로 이용된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기도 하다.

19세기 후반에 구미 열강은 인도·중국 등을 거쳐 우리나라 연안에 대한 탐색을 마치고

쇄국의 빗장을 열게 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통해 프랑스와 미국 함대가

월미도 앞 바다에 닻을 내렸고, 이어 일본 군함 운양호(1875)도 월미도 앞에 나타났다.

 

월미도는 고려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될 만큼 중요한 길목에 위치했다.

그래서 구미 열강도 월미도를 기점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을 위협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월미도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로제섬이란 치욕적인 이름을 얻은 것도 이 무렵 일.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인천이 강제개항(1883)되자

월미도는 외세침략의 본거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1904년 일본은 월미도에 순환도로를 건설하고 해군기지와 석탄창고,

급수소 등을 설치했고 이어 러시아도 이 곳에 저탄고(貯炭庫)를 세웠다.

 

1914년 북성동 일대에 각국 지계가 설정되면서 일본은 자국지계에 월미도를 포함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918년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낙조와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설정한 뒤 녹화사업을 벌였다.

일제가 월미산을 중심으로 순환도로변에 벚나무를 심고 채벌금지령을 내리는 바람에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월미도는 유일한 인천의 녹화지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도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는 월미산의 산림은 아주 울창하다.

 

이후 1922년 일본은 지금의 대한제분공장 앞에서

월미도에 이르는 1길이에 둑길을 축조했다.

이미 녹화사업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이 곳엔 봄이면 벚꽃놀이로,

여름에는 해수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월미도 앞 바다 매립이 완료된 시기는 1930년대 초반.

1926년까지만 해도 둑길을 걸어다녔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뤄

1927년 이후부터 30년대 초반까지 매립공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월미도는 매립공사 이후 교통이 편리해진 데다 요정과 호텔 등 각종 편의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전국에서 유일한 임해유원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월미도가 유원지로 널리 알려진 것은 당시 철도국이 경인간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바닷물을 데워 오늘날 해수탕의 원조격인 조탕(潮湯)과 인공해수풀장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해변가 가장자리에 지은 요정 용국각(龍宮閣)은 만조때면 바닷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좋은 구경거리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인근 해변가엔 3층 목조건물인 (하마)호텔이 들어서면서 외국인과

일부 부유층을 상대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인천 한세기의 저자 愼台範박사(80)

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전시로 호황을 맞자 인천 사람은 물론 서울과 지방에서도

돈 있는 유흥객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월미도로 몰려들었다

당시 소형버스가 중앙동을 출발, 인천역을 거쳐 조탕까지 운행해 교통도 편리했다고 회고했다.

 

해방 후 일제가 물러가자 종업원들이 유원지 시설을 맡아 운영했으나

경영부진으로 폐업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자 인천의 상징인 월미도를 재건하겠다는 취지로 趙慶鎬, 金元奎씨 등

10여명의 지역 유지들이 월미도관광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 마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한국전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중구청 부구청장을 지낸 李根植(62·원광해운 부사장)

60년대 까지만 해도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여서 시민들의 생활이 몹시 궁핍했다.

자연히 월미도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70년대 들어 허술한 횟집과 포장마차들이 장사를 하며 손님들을 끌었다.고 말했다.

 

월미도에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것은 지난 897. 시가 8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750m의 해안선을 포장하고 각종 조각물과 야외무대를 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