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궁터의 복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22 00:26:15
고려궁터의 복원
13세기 몽고에 의해 전 국토가 유린되고 있을때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을 전개한다. 물론 강화 천도를 두고 여러가지 의미와 분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 하나는 최씨의 무신정권 유지가 목적이었다. 대륙군에의 굴복은 집권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최씨 일가는 부득이 입도해야만 했다.
40년의 항쟁 끝 출륙때도 무신 정권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원종의 폐위를 계획하는 등 공공연히 환도를 늦추었다. 백성들이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복위한 원종의 계획에 사사건건 방해했다. 끝내는 환도 후 친몽정권이 들어서자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 위세를 떨쳤으나 토벌되고 만다.
결국 몽고의 사신이 강화도에 들어오고 궁궐과 성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강화발전연구회 김경준 전문위원의 ‘강화도 역사산책’에 의하면 성곽이 무너지는 소리가 모진 우뢰와 같이 온 거리를 진동하였고 거리의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모두 슬피 울었으며 그후 다시 몽고군이 들어와 남아있던 관아를 모두 불태웠다고 했다.
천도 당시 강화도에는 10만호가 살았다고 한다. 이규보의 시에도 ‘강산의 안팎에 1만가가 들어있다’고 했으며 최항이 ‘복숭아꽃 향기속에 몇천의 집들인가’ 한것을 보아서도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당초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면서 조정은 새 서울을 꾸미되 개경과 같도록 했다. 궁전과 사찰 그리고 지명을 개성에 따라 정했다. 궁궐의 뒷산을 송악이라 하고 여러 대소 궁궐의 이름도 개성 것을 본땄었다. 지금 고려궁터 정문에 걸려있는 현판 승평문(昇平門)은 개성에 있는 궁성의 정남문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강화 고려궁터가 복원된다는 보도이다. 붕괴 739년만의 일로 인천시가 790억을 들여 2009년까지 궁궐 정원 조성 등 완전복원한다는 것이다. 고려궁터는 남한내의 유일한 고려건축의 특징인 3단기단을 갖춘 뜻있는 유적이라고 한다. 그런것을 가깝게 두고도 진작에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등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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