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의 금해호 총성의 진실-(3)왜곡된 진실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5-19 15:58:52
안일경에 모든 잘못 '덤터기'
35년의 금해호 총성의 진실-(3)왜곡된 진실
‘제가 저지른 죄과는 어떤 형벌이든 마땅히 받을 각오가 돼있지만 사실이 아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싶지 않아….’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재판부의 사형선고를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던 금해호 참사의 범인 안모(20) 일경이 34년 전 오늘 서울고등법원 항소 재판부에 탄원서를 썼다.
당시 살인, 살인미수, 강도·살인미수, 방화미수, 절도, 폭력, 주거침입 등 7가지 죄를 쓰고 있던 그는 탄원서에서 ‘다른 모든 죄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살인과 살인미수 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관련기사 3면
인천지법 재판부는 사고발생 뒤 인천경찰서 등 수사기관이 조사한 안 일경의 범죄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인천시 동구 송현동205 전투경찰대 소속 안 일경이 해군 경비정이 발사한 총탄이 가슴에 명중하자 일본으로 도피하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해 들고 있던 수류탄을 금해호 객실복판에 던져 폭발케 해 김명철(당시 11세) 등 4명을 살해하고, 이종혁(당시 5세)외 12명에게는 상해를 입혀 미수에 그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안 일경은 ‘경찰과 검찰조서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범죄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총상으로 경기도립병원(지금의 인천시 중구 신흥동 인천시보건환경연구원 자리)에서 입원치료 중 잠을 재우지 않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안 일경은 정기외출을 나올 때 부대 막사에서 수류탄 2발을 몰래 가지고 나온 뒤 서울의 한 가정집에 들어가 집 주인과 딸을 위협 현금과 일본제 시계를 빼앗은 뒤 두 사람을 옷장에 가두고 방에 불을 지른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수류탄을 객실에 던져 터트린 것이 아니라며 살인과 살인미수 등의 죄를 시인하지 않았다. 그는 탄원서에서 경비정이 쏜 총탄에 왼쪽 가슴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놓쳐 폭발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 일경은 경비정이 총을 쏘자 승객들에게 엎드리라고 했고, 20여명의 승객과 함께 있는 객실에 총을 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탄원서에서 당시 상황을 밝혔다.
아들 명철과 딸 자애(당시 13세)를 잃은 아버지 김모(85)씨와 두 딸을 잃은 염필주(71)씨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모든 잘못을 안 일경에 덤터기 씌운 것이라며 사건의 진상규명과 발포를 명령한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자애는 머리에 총알을 맞은 데다 염씨의 딸 기숙(당시 11세)이 숨진 직접적인 원인은 가슴에 맞은 총탄이었다는 당시 인천기독병원 사체검안 의사(당시 46세)의 법정증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식 둘을 한꺼번에 잃은 이들의 진정서가 계속되자 해군본부는 1973년 8월 참모총장 이름으로 한쪽 분량의 공문을 보냈다. ‘사건 당시 위협사격으로 범인(안 일경)이 왼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어 들고 있던 수류탄이 폭발, 인질이었던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사상케 되는 불상사를 일으켰다’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해군본부는 발포명령자나 책임자처벌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넘어갔다. 단지 (금해호와 부딪힌 인천~옹진군 북도면 시도간 정기여객선) ‘창성호’의 무장공비출현 보고를 접한 긴박한 사태에서 현장에 출동한 장병들의 작전이었고, 관련자를 문책했다는 정도로 답했다.
결국 안 일경의 탄원서와 유가족들의 진상규명은 허사로 끝났고, 대법원에서도 그의 범죄사실이 원심 그대로 인정돼 1974년 12월26일 사형대에 섰다.-끝-
박정환·최보경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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