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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전통시대 원인천지역의 중심은 관교동(官校洞)

by 형과니 2023. 4. 10.

전통시대 원인천지역의 중심은 관교동(官校洞)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5-31 22:52:44

 

전통시대 원인천지역의 중심은 관교동(官校洞)

 

<전문가 기고 - 김상렬의 인천문화유산 돋보기>

 

 

인천시는 역사적으로 크게 4개의 지역이 모여서 형성된 행정단위이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진행된 지방제도의 변화에 따라 원인천(原仁川;중구·동구·남구·남동구·연수구·경기도 시흥시 일부), 부평(富平;서구·계양구·부평구·경기도 김포시 및 부천시 일부), 강화(江華;강화군), 옹진(甕津;영종·무의도를 제외한 인천시의 도서) 4개의 지역이 인천시로 통합됐다.

 

전통시대 원인천지역의 중심은 관교동(官校洞)이었다. ‘은 인천도호부청사를, ‘는 향교를 가리킨다. 문학산과 승학산으로 형성된 분지 안에 인천도호부청사로 대표되는 행정관련 유적과 교육기관인 향교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언제부터 이곳이 인천의 읍치로 발전하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처음으로 인천에 지방관이 파견된 것이 고려시대 인종 때의 일이므로 이때 비로소 관교동에 관아가 설립되면서 인천의 읍치로 발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인천도호부청사의 설치와 규모

인천시지정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인천도호부청사는 전통시대 지방관청이다. 인천시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던 곳으로 문학초등학교(관교동 146-1) 자리에 있었다. 관아가 언제 이곳에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강희맹(姜希孟)사숙재집(私淑齋集)에 세종 2(1424)에 이미 건물들이 있었다고 언급된 것에서 그 이전에 설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도호부청사 전경

 

 

현재의 건물은 당시의 것이 아닌 듯하다. 객사 지붕의 기와에서 강희십육년(康熙十六年;숙종 3, 1677)’이라는 명문이 나온 것으로 보아 최소한 객사건물은 숙종대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99년 간행된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는 객사(客舍) 30, 내삼문 3, 동헌(東軒) 10, 내동헌 33, 공해 6, 사령청 9, 향청 13, 군관청 7, 훈무당 6, 작청 27, 옥사 4칸으로 관아의 규모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83년 개항과 더불어 관아가 중구로 이전해 가면서 퇴락하기 시작, 일제 강점 이후 1914년에 부평과 인천이 통폐합되어 부천군이 신설되고 관아 터에 부천군청, 부천공립보통학교, 부천주재소 등이 신축되면서 대부분 파괴돼 현재는 문학초등학교 안에 내동헌과 객사의 일부만 남아있다.

 

전통시대의 인천도호부청사를 화도진도(花島鎭圖)에 나타난 관아 그림과 1956년 문학초등학교에서 작성한 관아배치도를 바탕으로 구성해 보자. 학교 정문에는 관문에 해당하는 홍살문이 관아의 시작을 알린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군관청과 향청이 자리하였으며 정면에 2층 누문(樓門)인 외삼문이 서있고 그 좌우로 순노청과 사령청이 있었다.

 

외삼문을 지나면 단층의 내삼문을 거쳐 동헌마당이 나타나고 그 뒤로 한 때 인민당(人民堂)이라 불리었던 동헌이 있다. 동헌의 동쪽담 너머로 수령과 그 가족이 거주하는 내동헌이, 서쪽담 너머로 외삼문과 내삼문을 갖춘 단층 객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도로로 단절되었지만 홍살문 앞에는 연지(蓮池)라 불렸던 인공연못이 있었는데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고 지수정(知水亭)이란 정자를 세웠다. 정문에서 향교 쪽으로 70여미터 떨어진 곳에 원형의 옥사가 있고 문학산 동북록에는 장대(將臺)라고도 불린 훈무당(訓武堂)이 위치했다.

 

 

수령이 하는 일

관아에는 이른바 사또라 불리던 수령(守令)이 근무했다.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부터 국권을 상실한 1910년까지 모두 355명이 인천의 수령으로 재직했다. 인천의 수령은 태종 13(1413)에 인천이라는 명칭을 얻은 후에 인천군수로 불리다가 세조 5(1459) 도호부로 승격한 이후 인천도호부사로 불리었다. 다만 역모와 관련이 있을 때에는 현감으로 강등되어 인천현감으로도 불리기도 하였다.

 

수령은 고을의 모든 행정을 통괄하는 자로서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평가를 받았다. 농사와 누에치는 일을 잘 돌볼 것 인구를 늘릴 것 교육을 진흥시킬 것 군대에 관한 사무를 바르게 할 것 부역을 균등히 할 것 민사의 소송을 바르게 할 것 간교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할 것 등이 주된 임무였으며 치적은 관찰사를 통해 매년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수령은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망궐례(望闕禮)이다. 지방수령은 임금을 직접 배알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객사 전청(殿廳)에 놓인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향하여 절을 올리는 삭망례를 거행했다. 이 때문에 객사는 관아의 중심건물이 되고 동헌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수령의 의식과 관련된 사직단(社稷壇성황사(城隍祠여단(厲壇) 등이 이 일대에 산재했다.

 

수령에 대한 보은, 선정비

 

선정비군

 

 

인천향교 앞에 여러 개의 비석이 서있다. 흩어져 있던 것을 근래에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비문에는 영세불망(永世不忘)’, ‘송덕(頌德)’, ‘선정(善政)’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선정비(善政碑)라 한다. 선정비는 조선시대 인천에서 수령을 역임한 인물 중에서 선정을 베푼 자들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원인천지역에는 모두 19기의 선정비가 남아 있다. 1기는 문학산 남록 청학사 입구에 있고 나머지 18기는 이곳으로 모았는데 근래에 1기를 뽑아 현재 17기만이 서 있다. 황운조(黃運祚)의 선정비가 2기이므로 모두 16인의 선정비가 존재하는데 인천수령이 15, 경기도관찰사가 1인이다.

 

선정비가 세워진 인물 중에는 이희조(李熙朝), 구완식(具完植) 등과 같이 실록에 공로가 소개된 자도 있으나 파직당한 자나 을사오적의 한사람으로 규탄받는 박제순(朴齊純) 같은 이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에서 선정비가 순수한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던 같다.

 

본래 선정비는 수령 중에서 세금을 감면해주거나 농지를 개간하여 고을민에게 경작케 해준 경우, 고을민의 억울함을 해소해주거나 향리의 수탈을 막아주는 등 선정을 베푼 자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임기를 마치고 떠난 후에 주민들이 세우는 비석이다. 그러나 재임 중에 선정비를 세운 것도 6기가 있고 2차례 부임한 황운조는 3개의 선정비를 남기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선정비를 남긴 수령 중에서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출세를 한 인물은 매우 드물다. 지방관의 선정이란 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중앙재정의 안정적 확보라는 왕조의 목적과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령의 선정도 민의 부담을 일시적으로 더는 고육책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 필자는 송암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있으면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운영위원, 인하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